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항상 예쁜 옷을 입고 말도 잘하고 예쁘고 키도 크고 ~ 나는 참 부러웠다. 존재감 없이 살던 내가 그 애와 친해진 건 그 애 집에 가면서였다. 그 당시 나는 주산을 잘 놨다. 시험이 끝나면 담임 선생님께서 성적 전표를 주셨다. 총점과 평균을 내게 했다. 성적 전표를 가진 나는 다른 애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 친구도 성적에 관심이 지대한 애였다. 꽤 공부를 잘하는 애여서 시험이 끝나면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나는 성적 전표를 끝내고 가야 해서 애들이 가고 몇시간 늦게 집에 갔다. 그 친구는 계단참에서 기다렸다. 서둘러 교실을 나온 나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 친구는 떡볶이를 사주고 성적을 확인했다. 요즘같으면 비리다. 나는 그애의 질문에 잘했더라, 5등 안에 있다고 귀뜸해준다. 그리고 그애를 따라 그 애 집에 간다. 그 애 집에 엄청 키가 큰 그 애 엄마가 내가 가면 무척 반갑게 맞이하셨다. 그리고 강정이며 과일을 내주셨다. 그리고 재봉틀에 앉아 자식들 옷을 만들고 계셨다.
밭에서 일하느라 집에 가도 못 만나는 내 엄마와 달리 자식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그 애 엄마.
우리는 고등학교 때 다시 만났다. 중학교 때는 다른 학교를 다녔다. 그애는 정말 공부도 잘하고 실장을 맡아 지도자로 거듭났다. 우리들 관계는 조금 아는 애에 불과했다. 그애는 무척 바쁜 몸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내가 교사로 발령받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애가 집으로 편지와 사진을 보내오면서였다. 깜짝 놀라 편지를 열었을 때 '섬유리포트' 라는 잡지의 기자였다. 서울 모대학의 국문과를 나왔다고 한다. 나는 학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장학금과 안정된 직업을 찾아 지방 국립대를 선택했다. 국문과를 가려던 나에게 그 애가 부러웠고, 그 애를 찾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엄청 초라했다. 그런데 이젠 교사로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고 그 애집으로 찾아갔다. 서울이었다. 하룻밤 그 애 집에서 잠을 잤다. 엄마는 여수에서 계시고 서울집은 언니와 남동생, 아빠와 같이 살고 있었다. 월차까지 내고 서울까지 갔던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규칙적으로 연락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지부진했다. 아주 가끔 잘있지 하고 인사만 나누었다.
급격히 친해진 건 우리 둘 다 아픔을 겪으면서였다. 나는 2015년에 뇌출혈, 그 애는 그해 겨울에 유방암으로 둘 다 명예퇴직을 했다. 그때부터 재활치료와 방사선 치료에 집중했다.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나는 순천에서 그애는 서울과 경기지역을 오가며 건강에 맞춰 생활했다.
그 애는 기독교 봉사단체에서 핵심적으로 참여했다. 신영복 글씨를 연습해서 전시회도 하고, 나름의 글씨를 선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동문회 제작을 맡아 글을 계속 쓰고 있다. 제주의 문화를 담당하는 화가와 우리 시골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애의 엄마는 그 애와 가까욵곳에 산다. 일전에 혼자 여수에서 사시던 아버지도 윗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년 전에 그 애가 아버지를 뵈러 어머니랑 왔다. 내게 주려고 쉐터를 떠서, 게다가 손수 비즈로 팔찌를 만들어 내게 선물했다. 어렸을 때 보고 어른이 된 나를 친 딸처럼 아껴주셨다.
나는 여전히 그 애가 부러웠고 그애 부모님께서 오래 사시라고 기원했다.
오지랖이 넓은 그애는 재서울 여고 동문회 사람들과 여수를 방문한다는 연락이 왔다. 만나자고 했으나 나는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거절했다. 억지로 그 사람들을 놔두고 순천으로 들르지 말라고 했다. 보고 싶어도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해서 참아야 한다. 좋은 인연은 길게 이어지는 게 참으로 소중하다. 유방암도 무사히 완쾌하였고, 하고 있는 일 모두 탄탄히 이루어지고 있으니 또 부러운 그 애. 나도 글 열심히 쓰고 운동 잊지 말아야지 명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