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재연구소에서 지난 4월 27일 홍천강의 니산구곡 답사를 행하였다는 소식을
전한 뒤 몇 가지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어 재조사를 진행하였다.
오늘 마침 KBS2의 '1박2일' 프로그램에서 어린이날 특집으로 춘천의 호수와
홍천강의 배바위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배바위 앞 강변버덩에서 게임하는 장면이
방영되는 모습을 보며 얼른 새로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침 27일 배를 타고 우리가 답사하던 시간에 그 프로를 촬영하던 모습도 보았었다.
우리 고장의 자연유산에 대한 올바른 지식,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서 할 일이다!
먼저 배바위의 위치를 모르는 분을 위해 춘천시홈피에 올라 있는 행정지도의
서남쪽 부분을 보자. 빨간 동그라미로 배바위와 홍무벽을 표기해놓았다.
(클릭해서 보면 크게 보임)

지도에서 색깔로 표기한 것처럼 소남이섬과 배바위는 홍천 소속이 아니라 춘천시 남산면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충의대교 아래는 홍천군의 말골유원지로 개발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배바위까지는 산책로도 만들어져 있다. 아마 오지캠핑지로 소개되면서 소남이섬이 유명해진
모양으로 주말이면 배바위 앞의 강변은 아무런 통제 없이 수많은 차량과 인파들이 텐트나 보트를
싣고 와서 붐비고 있다. 아마 '1박2일'도 그런 유명세를 탄 모양이고, 앞으로는 더 인파가 늘며
일대가 망가지기 일보직전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방송에서는 물론 '배바위'라는 명칭만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번 답사 결과 이 바위의 원래 명칭은 '천근암(天根巖)'임이 밝혀졌다. 재작년 역문연의
사진전에서도 답사기에서 홍무벽을 소개하면서 함께 천근암을 소개하였지만, 그때는 자료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홍무벽 아래라고 잘못 추정했었기에 이 기회에 바로잡아 알릴 필요도
있다. 그때 도록의 설명문에는 홍무벽을 설명하며 "그 바로 앞으로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만큼
널찍하게 강으로 튀어나온 암반인 천근암"이라고 말했었다(30쪽/올해의 <시민 역사를 듣고
문화재를 보다>에서는 201쪽) 이 말은 "홍무벽에서 홍천강 상류 소남이섬 윗쪽의 강 가운데
높직하게 들어서 있는 바위"로 바꿔써야 옳은 것이다.
답사시에 강원대 한문교육과의 권혁진 선생으로부터 의암 유인석의 시에 천진암을 언급한 것이
있으며 훨씬 남쪽이라는 말과, 허준구 선생으로부터 천근암이란 의미를 따라 여럿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에 따라 다른 천근암의 존재를 확인할 필요가 생겼고 연관된 시문 자료를
꼼꼼히 재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그리고 어제 토요일(4일)에 재답사를 통해 배바위가 바로
천근암이고 홍무벽 아래의 바위를 천근암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최종 결론을 확정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 홍무벽이나 천근암이라는 명칭을 처음 명명한 사람은 성재 유중교 선생이었다. 조선의 수준높은 정신문화를 외면하며 외세를 추종하는 개화 일변도의 정책을 비판한 성재 선생의 상소가
고종 임금에게 거부당한 뒤인 1885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에 지은 시 제목에 "가정리 앞 강 상류에 커다란 암석이 물살의 흐름을 자르고 강 가운데로 들어와 있는 것이 있어, 벌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읊조릴 만하니, '천근암'이라 명명한다(柯亭前江上流 有大石截流入江中 可列坐觴詠
命曰天根巖)
"라는 말이 있다. 재작년에는 '상류'라는 말을 간과한 것이었다.
1889년 성재 선생이 제천으로 옮겨갈 때 가정서사의 여러 문인들이 함께 지은 시들이 있지만
거기서도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성재 선생이 타계한 뒤 1895년 5월 의암 선생이 다시 또 제천
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을미년) 의암 선생은 성재 선생과 가정서사의 자취가 짙게 배어 있는
이들 유적을 둘러보며 <홍무벽가>와 <천근암가>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근암가>는
연도 표기가 없지만 문집에서 <홍무벽가> 바로 아래 수록되었고 이 시와 유사한 분위기라 같은
때 지었다고 추정된다. 더욱이나 이 <천근암가>에 "천근암은 가정촌 동쪽 작봉산 남쪽 모퉁이에
있다(巖在柯亭村東 雀鳳山南阿)"는 시구가 있다. 작봉산은 가정리의 어르신들께 탐문한 결과
잣방산, 좌방산을 말하는 것이 확실함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자로 이렇게 표현한 사람은
의암 선생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의암 선생은 1903년 이미 중수한 가정서사의 정당인 주일
당의 중수기를 쓰면서 홍무벽과 함께 천근암이 '스승(성재)께서 남기신 자취'라 언급하였고,
편지글에서 주일당이 "두니산을 등지고 작봉산을 대하고 있다(負斗尼對雀鳳)"는 말도 하였다.
게다가 항와 유중악 선생은 지평으로 돌아가는 금계 이근원 선생을 송별하면서 가정리에서
천근암까지 전송하였다는 기록도 남겼음을 발견하였다. 이런 자료들을 습재연구소에서 재확인한
결과 홍무벽 아래의 암반이 천근암은 아니며 현재 배바위라고 알려져 불리는 바위가 바로
천근암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며 의병투쟁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던 가정서사의 선배 학자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우리 고장의 유적을 이제야 바로 보게 되었다. 홍무벽은 그 상징적 의미가
깊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심지어 흑산도의 면암 최익현의 암각자보다도 미적으로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이 드문 실정이다. 이번에 새로 밝혀진 천근암도 마찬가지다.
양기가 쇠미해져도 언젠가는 음기를 넘어 다시 양을 회복할 것이라는 하늘의 이치가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안다는 의미로, 가평 조종암의 암반에 새겨진 '견심정'이란 말처럼 하늘의 마음을
알게 한다는 철리를 상징하는 명칭이다. 춘천시에서는 홍천강 일대가 온통 유원지로 변해버리기
전에 홍무벽과 천근암의 유적을 포함한 니산구곡의 사적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을 포함한 우리 고장의 자연유산도 시민들이 보존에
나서 관심을 가져야 옳지 않을까 싶다.
아래는 4/27일 답사시의 사진이다. 1박2일 촬영 모습도 보인다.


배를 타고 답사할 때는 강쪽만 둘러보았기에 지난 토요일에는 한의민 감사, 우은희 회원 등과
강변으로 차를 몰고 가서 직접 올라가 재탐사작업을 벌였다. 성재 선생은 천근암에도 암각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혹시 암각자가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천근암은 장마 때면 불은 물로
강중의 섬이 된다. 지금도 하류쪽의 모래톱으로 간신히 강변에 이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로 바위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윗면에는 두서너 그루의 소나무가 멋진 반송으로 자라나 있다.
강변에서 보면 상류쪽과 하류쪽의 두 봉우리로 되어 있고 가운데가 약간 잘록하다. 올라가면
위험하기는 하지만 다 둘러볼 수 있다. 강변쪽의 사면도 자세히 살핀 결과 별다른 암각자를 발견
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위쪽 잘록한 부분의 암벽 반반한 곳에는 먹으로 쓴 달필의 해세체 시구처럼 보이는 글귀가
오랜 풍화에 희미해진 채로 발견되었다. 몇 글자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1) 강변쪽에서 본 천근암

2) 하류쪽 꼭대기 모습

3) 붓글씨를 촬영하는 한희민 회원

4) 상류쪽 꼭대기 모습

5) 강건너편 홍천군에서 만들어 놓은 산책로

6) 강상류쪽 전망 - 만곡부 아래의 우측 암벽 아래가 니산구곡 제9곡인 오지소란 곳이고 맞은편은
모곡의 유원지에 새로 들어서는 건물들 모습

7) 우은희 회원과 행락 차량들 모습

8) 아래는 충의대교 곁 비득재 아래 비도암 위로 내려가서 바라본 상류쪽 소남이섬 모습. 여기서
천근암은 멀어서 식별이 안 된다.

첫댓글 어제 사진을 보면서 재작년 홍무벽 답사시 천근암을 홍무벽아래의 큰바위로 하였던 생각에 그런의문이 들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또다른 숙제가 하나 해결이 되었네요....수고하셨습니다...
재작년 답사 때 나도 그래서 유연훈 님한테 상류쪽의 큰 바위를 물어보고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시를 읽던 사람들이 시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앞이 바로 천근암이 분명하다고 하여 그리 설명되었던 겁니다. 의암 선생의 글이 없었다면 결코 찾지 못했을 겁니다.
잘보았습니다. 잘 정리해주셔 고맙습니다.
그간 정재경 전문위원님의 노력과 결실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천근암(배바위)이 1박2일 프로그램을 통해 세간에 소개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닌 듯 합니다. 6월 1일 의병의 날에 즈음하여 언론을 통하여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함께 수고하신 한희민 감사님과 우은희 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좀 더 필요한 정보를 아시려면 아랫글인 '尼山(니산)구곡 (홍천강) 답사 사진 (습재연구소): 1906년 의암 유인석 선생과 항와 유중악 선생께서 홍천강 勝景(승경) 9곳을 을 정하셨다'와 자유게시판에 4월 29일 올린 '의암 유인석 선생의 망명전 마지막 유적 니산구곡 위치도'를 참고하세요.
홍천군에서는 올해말까지 이곳 배바위 부근에 관광레포츠 마을을 대대적으로 조성을 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배바위는 행정구역상 춘천시 남면 땅인데 홍천군에서 발빠르게 지역활성화 차원에서 선점을 한 듯 합니다.
아~~아! 그배바위 이름이 천근암이라! 그렇군요!!!
위의 언급 중 "주일당이 '두니산을 등지고 작봉산을 대하고 있다(負斗尼對雀鳳)'는 말"은 인용이 잘못되었기에 뒤늦게나마 정정합니다. 여기서는 주일당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구성묘(만세사)를 말한 것이고 편지를 쓴 날에 상량하였다고 하였지만, 완성하지는 못하였던 듯합니다. 주일당과 만세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2015년 역사문연의 강좌 때 바로잡은 내용을 이미 공개한 바 있었습니다. 중수한 주일당의 위치가 현위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는 여러분의 착오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