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륙의 유두류록에 법계사에 관해 적혀있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 법계사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 서쪽으로는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이라 한다..는 대목.
1489년 4월 22일,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록. 중산리, 칼바위 거쳐 천왕봉 오르던 김일손 철쭉꽃 하나 꺾어 머리에 꽂고 일행에게도..
...우람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다.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5리쯤 더 가니 법계사가 나왔다. 절엔 중 한 사람 나뭇잎이 널찍널찍 자라나고 산죽은 곱게곱게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다. 잠깐 쉬고 곧 올라가니 돌이 있는데 배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목.
이들 문헌에서 나오는 세존암은 지금의 망바위를 지칭.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천불암과 암법주굴에 대한 견해.
천불암 터는 법계사에서 20∼30분 가량 오르면 있는 암굴. 길이 10 여m, 높이 1.5m가량 비박하기에 적절한 장소이다.
일부 산악인은 이 굴(천불암터)을 암법주굴이라 주장. 암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 천연 수도처로 본다. 그러나 암법주굴과 천불암은 문헌상 따로 표기되고 있다.
하여 문헌상 천불암과 암법주굴은 각각 다른 곳에 위치. 하지만, 암법주굴의 위치는 최근까지도 베일 속 수수께끼.
지리산 제일의 토굴 기도처로 알려진 암법주굴 이성계가 이조 건국하기 전 기도를 드렸다는 곳. 일명 '이성계굴'은 옛 문헌을 통해 전해 왔을 뿐.
최근 '유두류록'의 기록따라 답사하는 지리산행 열풍. 지금까지 베일 속에 가려진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졌다. ('지리산 아흔아홉골'의 답사여행을 통해 밝혀진 것임)
현재, 법계사는 천왕봉에서 남동 방향에 위치해 있다. 전망 좋은 천왕봉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은 남동쪽이다. 천왕봉 남동쪽 아래 암법주굴이 있다면 그 아래 천불암.
즉, 암법주굴 위치는 천왕봉과 광덕사지 사이 토굴.
광덕사골에 있으며 광덕사지의 위쪽에 있는 암법주굴. 거대한 바위가 초가 지붕처럼 튀어나와 지붕을 만들고 그 바위 뒤로도 숲에 가려져 있는 어마어마한 병풍바위
'양지바른 마당 건너 석벽이 담을 친 천혜의 토굴.'
법계사에서 천왕봉 가는 등산로 바로 옆에 있는 석굴. 일부에서 암법주굴이라 하지만 천불암일 가능성이 높다. 암법주굴의 남쪽 아래 있다는 천불암이 곧 '광덕사지' 터.
............ ........암법주굴 찾아가는 길................... 2006년 6월 4일 광덕사지 암법주굴 법계사 답사 산행. 동학혁명 당시 천주교도들 은신처였다는 광덕사지 인근. 광덕사지에는 기도처가 두 곳 있었으며 취나물이 즐비했다.
인적 끊긴 광덕사골따라 오르다 보면 폭포가 수려한 쉼터. 그곳에서 20분 가량 더 오르면, 암법주굴을 만날 수 있다. 암법주굴에서 인적 드문 오솔길따라 나오면 법계사와 만난다.
천왕봉에서 천년을 지켜온 왕건태조의 어머니 석상 신라 말 한 부인이 지리산 산신에게 빌어 낳은 아들. 훗날 난세의 후삼국을 통일하니 그가 고려태조 왕건. 그가 어머니 위숙황후의 석상을 만들어 모신 성모사
성모석상은 천년간 지리산을 상징한 신으로 존재했다. 고려 때 성모사당을 지키는 신관을 당지기라고 불렀다. 당지기가 남원 곡성 구례 하동 함양 산청 진주를 순찰하면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륙 일행이 천왕봉 성모사에서 날씨의 쾌청을 기원 그 대상이 바로 이 왕건태조의 어머니 사당인 것이다. 당시 성모사당은 3간 판옥인데 지붕 너와에는 큰 쇠못
성모석상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여 눈길을 끌었다는 대목. 성모석상은 지리산의 흔한 화강암이 아닌 약간 검은 빛 돌. 석상은 쪽진 머리에 얼굴이 둥글고 코가 우뚝한 40대 연령 신라시대 소박한 어머니들의 인상 같아서 친근감이 들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법계사와 성모사는 밀접한 관계. 고려 때 성모사를 찾는 이들이 법계사에 머문듯 싶다. .......................................................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 동쪽 중턱에 있는 사찰.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544년(신라 진흥왕 5) 조사 연기가 창건 후, 1405년(조선 태종 5) 선사 정심(正心)이 중창 6·25 때 불탄 뒤 토굴 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법당이 준공되었다. 보물 473호 삼층석탑이 있고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찰.
법계사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 보물 제473호. 법계사 아래에는 1978년 10월에 준공된, 60명 수용규모........ 로터리 산장. 법계사에서 천왕봉까지 4㎞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2시간 거리. 법계사와 천왕봉 중간 지점에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개선문, <천왕봉 아래 500m 지점에 천왕샘> <중산리―천왕봉간 총 5~6시간 소요.>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법계사 1박 후.........., 새벽산행이 바람직.
동아시아 불교권 저지대는 모두 침수. 저지대에 살던 민족들은 고지대로 이동. 바다물은 저지대를 쉴사이 없이 삼켜갔다.
하루가 다르게 바다로 변해간., 삶터. 탈출하는 동안 수많은 떼죽음도 목격.
대홍수 망망대해에서 우뚝 솟아오른 천왕봉 저지대민족에게 탈출할 방향을 알려준 희망봉. 높은 산으로 가야만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 뿐.
당시, 저지대민족에게 높은 산은 신앙의 대상. 하여, 천왕봉 인근 순천 고창은 고인돌 군락지 저지대에서 무사히 탈출한 민족이 남겨놓은 흔적.
하여, 신성하게 여긴., 천왕봉의 일출.
결국, 그들을 저지대에서부터 살려낸 천왕봉.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이자 꿈의 성지인 희망봉. 지긋지긋한 장마비를 멈추게 해주던 동쪽의 태양.
........................................................... ........................................................... 저지대민족은 언제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 ..............................................................
2만여년 전 신안군 부근은 바다가 아니었다. 서해(황해) 일대는 물이 비워진 거대한 대륙. 지금의 중국과 한반도,일본 열도는 모두 연결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야생동물들이 살던 곳.
빙하기 해수면은 지금보다 140m나 낮은 곳에 위치 1만년전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며 빙하가 녹기 시작 빙하가 녹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해수면이 상승하자 산과 들이 물속으로 잠겼다. 서해에 살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대홍수를 목격. 노아의 방주 같은 홍수 신화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대홍수가 삼키고 남겨놓은 것들은 높은 봉우리 뿐. 산들이 정상 인근만 수면 위에 내민 것들이 현재 섬 임자도는 그렇게 탄생되었고 처음부터 섬은 아니었다.
임자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섬. 바닷물은 솟아오를 당시 제방을 쌓았다. 수천년 동안 바닷물과 싸워 만들어진 섬.
여섯개 섬을 하나로 이어 만든 임자도.
임자도 대기리 삼막동의 구석기시대 유물들. 마제 돌대패날,돌끌,숫돌도 함께 발굴되었다. B.C 6000년 이전 태양신의 변심을 목격한 인류.
'하루밤 사이에 수십리씩 물에 잠기는 육지.'
물에 쫓겨 중국, 한반도, 일본 고지대로 흩어졌다. 한편, 갈증을 해소할 눈 얼음이 곳곳에 있던 빙하기.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자 사정이 급변했다.
'히말라야 일대 인류 거구지도 비슷한 현상.'
식수 제공원, 눈 얼음이 모두 녹아 저지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을 구하려 하천 따라 내려왔다. 그곳엔 먼저 온 사람도 있었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다.
서로 경계하며 강가에 움집을 짓고 함께 살게되었다. 소수집단의 이동생활이 대규모 집단 정착생활로 대체. 수만년 동안 막대기 돌멩이 정도만 사용해오던 사람들
집단생활을 하며 언어가 발달되고 토기가 만들어졌다. 수렵 채취 만으로는 좁은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없었다. 새로운 생산방식이 모색되어졌으며 농경과 목축이 등장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종교도 등장했다. 태양신이 숭배되었으나 그 권위는 점차 약해져 갔다. 씨족 집단 별로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민간신앙이 성행.
마제석기에 이어 청동기 문화가 일어나며 생활이 급변. 청동기로 만든 검과 방패의 파괴력은 가공할만한 파괴력. 목검이나 돌칼 구석기인들은 청동검 신석기인들에게 참패.
청동거울 모양의 번쩍이는 방패와 청동방울 소리. 태양신이나 조상신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려나갔다. 청동기인들이 서남 해안육지로부터 섬으로 들어왔다.
임자도 청동기인들은 영광 쪽으로부터 건너와 장포만 일대에 거주한 흔적이 지석묘(고인돌). 지석묘군은 임자도 내 4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패총은 구산 염동 마을 뒷산 야산 기슭에 있다. 청동기 시대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사용된 패총. 고인돌은 지배계층 또는 가족 묘지나 공동 묘지.
B.C 300-400년 전 구산리 염동 패총의 발견으로 임자도에 처음 거주한 청동기인은 구산일대 거주 청동기시대 이후 특징으로는 국가 정치권력의 등장
기원 전후로 한반도 남쪽에는 수십 수백개 소국들 개울가 저지대 평야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민족 대이동.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또 군신 칭호도 없었다. 아도간,여도간,차도간,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명. 산과 들에 모여 살았으며 우물을 파고 밭을 갈아 먹었다. ..........................................................
당시의 생활상을 정감있고 단아하게 표현한 글이다. 위 글은 신석기시대 무리의 규모에 대해 대변해준다. 1백호가 7만5000명이었다는 말은 1戶 씨족이 약 750명
10간이 1백호란 1간이 10호 씨족을 지배했다는 뜻. 간은 부족장에 해당하며 1개의 부족은 약 7500명. 이것이 단군신화 이전 한반도 남단 신석기시대 모습
한반도 남단에 더 큰 부족 연맹체가 있었다는 증거.
이중 주목할 만한 경기, 충청, 전라지역 마한. 마한은 여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것이 충청도 지역에 있던 목지국
마한 소국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 제사장인 천군 그리고 신성지역으로 소도(蘇塗)란 별읍을 두었다. 마한 소국의 일반민들은 초가지붕 반움집이나 귀틀집
괭이 낫 도끼 가래 자귀 등 목제 농기구를 이용 벼 오이 참외 박 호두 살구 등 밭농사를 지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마찰을 이용해 불을 피웠다.
가죽 신발을 신었고 해마다 5월 수릿날과 수확기인 10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
이 날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며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흥겨웁게 놀았다.
이 때 급격한 상황변화가 발생한다. 소국 중 하나가 팽창해 소국들을 접수 그 주역은 한강 유역에 자리잡았던 백제.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마한의 소국들은 백제의 팽창앞에 역부족이었다. 청동검 백제에 쫓겨 내려간 마한 마제석검 유민들.
뒤늦게 청동기를 수입하고 힘을 키워 나갔으나 백제는 이미 철기문명까지 이룩한 놀라운 성장 결국, 마한은 백제의 철기문명 앞에 패하고 만다.
.....'임자도에서 발굴된 철기시대 유적들.'....... 반남면 일대 신미제국은 마한과 동일한 생활양식 삼두리와 대기리 패총 옹관묘 조각이 이를 뒷받침 그물을 사용한,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유적. .....................................................
백제는 마한 영역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설치. 마한 서편 섬 지방도 백제의 통치권 내로 편입. 백제는 임자도 주위 섬들을 한 행정단위로 개편.
현(縣)이라 칭하는 말단 행정단위 이름은 고록지현(古祿只縣)이었다.
백제는 오늘날 신안군 지역에 고록지현 뿐만 아니라 아로현, 아차산현, 거지산현이라는 현도 설치하였다. 이러한 행정구역 기본 골격은 백제말까지 지속되었다.
신안군은 백제시대 내내 백제 영역으로 정착.
백제의 개방적인 성풍속을 대변해주는.. 서동요. 백제는 국제무역이 성행했던 동아시아 해상왕국. 당시 백제 성풍속은 활발했던 국제 교류에서 비롯.
이륙의 유두류록에 법계사에 관해 적혀있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 법계사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 서쪽으로는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이라 한다..는 대목.
1489년 4월 22일,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록. 중산리, 칼바위 거쳐 천왕봉 오르던 김일손 철쭉꽃 하나 꺾어 머리에 꽂고 일행에게도..
...우람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다.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5리쯤 더 가니 법계사가 나왔다. 절엔 중 한 사람 나뭇잎이 널찍널찍 자라나고 산죽은 곱게곱게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다. 잠깐 쉬고 곧 올라가니 돌이 있는데 배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목.
이들 문헌에서 나오는 세존암은 지금의 망바위를 지칭.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천불암과 암법주굴에 대한 견해.
천불암 터는 법계사에서 20∼30분 가량 오르면 있는 암굴. 길이 10 여m, 높이 1.5m가량 비박하기에 적절한 장소이다.
일부 산악인은 이 굴(천불암터)을 암법주굴이라 주장. 암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 천연 수도처로 본다. 그러나 암법주굴과 천불암은 문헌상 따로 표기되고 있다.
하여 문헌상 천불암과 암법주굴은 각각 다른 곳에 위치. 하지만, 암법주굴의 위치는 최근까지도 베일 속 수수께끼.
지리산 제일의 토굴 기도처로 알려진 암법주굴 이성계가 이조 건국하기 전 기도를 드렸다는 곳. 일명 '이성계굴'은 옛 문헌을 통해 전해 왔을 뿐.
최근 '유두류록'의 기록따라 답사하는 지리산행 열풍. 지금까지 베일 속에 가려진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졌다. ('지리산 아흔아홉골'의 답사여행을 통해 밝혀진 것임)
현재, 법계사는 천왕봉에서 남동 방향에 위치해 있다. 전망 좋은 천왕봉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은 남동쪽이다. 천왕봉 남동쪽 아래 암법주굴이 있다면 그 아래 천불암.
즉, 암법주굴 위치는 천왕봉과 광덕사지 사이 토굴.
광덕사골에 있으며 광덕사지의 위쪽에 있는 암법주굴. 거대한 바위가 초가 지붕처럼 튀어나와 지붕을 만들고 그 바위 뒤로도 숲에 가려져 있는 어마어마한 병풍바위
'양지바른 마당 건너 석벽이 담을 친 천혜의 토굴.'
법계사에서 천왕봉 가는 등산로 바로 옆에 있는 석굴. 일부에서 암법주굴이라 하지만 천불암일 가능성이 높다. 암법주굴의 남쪽 아래 있다는 천불암이 곧 '광덕사지' 터.
............ ........암법주굴 찾아가는 길................... 2006년 6월 4일 광덕사지 암법주굴 법계사 답사 산행. 동학혁명 당시 천주교도들 은신처였다는 광덕사지 인근. 광덕사지에는 기도처가 두 곳 있었으며 취나물이 즐비했다.
인적 끊긴 광덕사골따라 오르다 보면 폭포가 수려한 쉼터. 그곳에서 20분 가량 더 오르면, 암법주굴을 만날 수 있다. 암법주굴에서 인적 드문 오솔길따라 나오면 법계사와 만난다.
천왕봉에서 천년을 지켜온 왕건태조의 어머니 석상 신라 말 한 부인이 지리산 산신에게 빌어 낳은 아들. 훗날 난세의 후삼국을 통일하니 그가 고려태조 왕건. 그가 어머니 위숙황후의 석상을 만들어 모신 성모사
성모석상은 천년간 지리산을 상징한 신으로 존재했다. 고려 때 성모사당을 지키는 신관을 당지기라고 불렀다. 당지기가 남원 곡성 구례 하동 함양 산청 진주를 순찰하면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륙 일행이 천왕봉 성모사에서 날씨의 쾌청을 기원 그 대상이 바로 이 왕건태조의 어머니 사당인 것이다. 당시 성모사당은 3간 판옥인데 지붕 너와에는 큰 쇠못
성모석상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여 눈길을 끌었다는 대목. 성모석상은 지리산의 흔한 화강암이 아닌 약간 검은 빛 돌. 석상은 쪽진 머리에 얼굴이 둥글고 코가 우뚝한 40대 연령 신라시대 소박한 어머니들의 인상 같아서 친근감이 들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법계사와 성모사는 밀접한 관계. 고려 때 성모사를 찾는 이들이 법계사에 머문듯 싶다. .......................................................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 동쪽 중턱에 있는 사찰.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544년(신라 진흥왕 5) 조사 연기가 창건 후, 1405년(조선 태종 5) 선사 정심(正心)이 중창 6·25 때 불탄 뒤 토굴 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법당이 준공되었다. 보물 473호 삼층석탑이 있고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찰.
법계사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 보물 제473호. 법계사 아래에는 1978년 10월에 준공된, 60명 수용규모........ 로터리 산장. 법계사에서 천왕봉까지 4㎞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2시간 거리. 법계사와 천왕봉 중간 지점에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개선문, <천왕봉 아래 500m 지점에 천왕샘> <중산리―천왕봉간 총 5~6시간 소요.>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법계사 1박 후.........., 새벽산행이 바람직.
동아시아 불교권 저지대는 모두 침수. 저지대에 살던 민족들은 고지대로 이동. 바다물은 저지대를 쉴사이 없이 삼켜갔다.
하루가 다르게 바다로 변해간., 삶터. 탈출하는 동안 수많은 떼죽음도 목격.
대홍수 망망대해에서 우뚝 솟아오른 천왕봉 저지대민족에게 탈출할 방향을 알려준 희망봉. 높은 산으로 가야만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 뿐.
당시, 저지대민족에게 높은 산은 신앙의 대상. 하여, 천왕봉 인근 순천 고창은 고인돌 군락지 저지대에서 무사히 탈출한 민족이 남겨놓은 흔적.
하여, 신성하게 여긴., 천왕봉의 일출.
결국, 그들을 저지대에서부터 살려낸 천왕봉.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이자 꿈의 성지인 희망봉. 지긋지긋한 장마비를 멈추게 해주던 동쪽의 태양.
........................................................... ........................................................... 저지대민족은 언제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 ..............................................................
2만여년 전 신안군 부근은 바다가 아니었다. 서해(황해) 일대는 물이 비워진 거대한 대륙. 지금의 중국과 한반도,일본 열도는 모두 연결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야생동물들이 살던 곳.
빙하기 해수면은 지금보다 140m나 낮은 곳에 위치 1만년전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며 빙하가 녹기 시작 빙하가 녹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해수면이 상승하자 산과 들이 물속으로 잠겼다. 서해에 살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대홍수를 목격. 노아의 방주 같은 홍수 신화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대홍수가 삼키고 남겨놓은 것들은 높은 봉우리 뿐. 산들이 정상 인근만 수면 위에 내민 것들이 현재 섬 임자도는 그렇게 탄생되었고 처음부터 섬은 아니었다.
임자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섬. 바닷물은 솟아오를 당시 제방을 쌓았다. 수천년 동안 바닷물과 싸워 만들어진 섬.
여섯개 섬을 하나로 이어 만든 임자도.
임자도 대기리 삼막동의 구석기시대 유물들. 마제 돌대패날,돌끌,숫돌도 함께 발굴되었다. B.C 6000년 이전 태양신의 변심을 목격한 인류.
'하루밤 사이에 수십리씩 물에 잠기는 육지.'
물에 쫓겨 중국, 한반도, 일본 고지대로 흩어졌다. 한편, 갈증을 해소할 눈 얼음이 곳곳에 있던 빙하기.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자 사정이 급변했다.
'히말라야 일대 인류 거구지도 비슷한 현상.'
식수 제공원, 눈 얼음이 모두 녹아 저지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을 구하려 하천 따라 내려왔다. 그곳엔 먼저 온 사람도 있었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다.
서로 경계하며 강가에 움집을 짓고 함께 살게되었다. 소수집단의 이동생활이 대규모 집단 정착생활로 대체. 수만년 동안 막대기 돌멩이 정도만 사용해오던 사람들
집단생활을 하며 언어가 발달되고 토기가 만들어졌다. 수렵 채취 만으로는 좁은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없었다. 새로운 생산방식이 모색되어졌으며 농경과 목축이 등장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종교도 등장했다. 태양신이 숭배되었으나 그 권위는 점차 약해져 갔다. 씨족 집단 별로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민간신앙이 성행.
마제석기에 이어 청동기 문화가 일어나며 생활이 급변. 청동기로 만든 검과 방패의 파괴력은 가공할만한 파괴력. 목검이나 돌칼 구석기인들은 청동검 신석기인들에게 참패.
청동거울 모양의 번쩍이는 방패와 청동방울 소리. 태양신이나 조상신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려나갔다. 청동기인들이 서남 해안육지로부터 섬으로 들어왔다.
임자도 청동기인들은 영광 쪽으로부터 건너와 장포만 일대에 거주한 흔적이 지석묘(고인돌). 지석묘군은 임자도 내 4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패총은 구산 염동 마을 뒷산 야산 기슭에 있다. 청동기 시대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사용된 패총. 고인돌은 지배계층 또는 가족 묘지나 공동 묘지.
B.C 300-400년 전 구산리 염동 패총의 발견으로 임자도에 처음 거주한 청동기인은 구산일대 거주 청동기시대 이후 특징으로는 국가 정치권력의 등장
기원 전후로 한반도 남쪽에는 수십 수백개 소국들 개울가 저지대 평야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민족 대이동.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또 군신 칭호도 없었다. 아도간,여도간,차도간,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명. 산과 들에 모여 살았으며 우물을 파고 밭을 갈아 먹었다. ..........................................................
당시의 생활상을 정감있고 단아하게 표현한 글이다. 위 글은 신석기시대 무리의 규모에 대해 대변해준다. 1백호가 7만5000명이었다는 말은 1戶 씨족이 약 750명
10간이 1백호란 1간이 10호 씨족을 지배했다는 뜻. 간은 부족장에 해당하며 1개의 부족은 약 7500명. 이것이 단군신화 이전 한반도 남단 신석기시대 모습
한반도 남단에 더 큰 부족 연맹체가 있었다는 증거.
이중 주목할 만한 경기, 충청, 전라지역 마한. 마한은 여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것이 충청도 지역에 있던 목지국
마한 소국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 제사장인 천군 그리고 신성지역으로 소도(蘇塗)란 별읍을 두었다. 마한 소국의 일반민들은 초가지붕 반움집이나 귀틀집
괭이 낫 도끼 가래 자귀 등 목제 농기구를 이용 벼 오이 참외 박 호두 살구 등 밭농사를 지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마찰을 이용해 불을 피웠다.
가죽 신발을 신었고 해마다 5월 수릿날과 수확기인 10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
이 날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며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흥겨웁게 놀았다.
이 때 급격한 상황변화가 발생한다. 소국 중 하나가 팽창해 소국들을 접수 그 주역은 한강 유역에 자리잡았던 백제.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마한의 소국들은 백제의 팽창앞에 역부족이었다. 청동검 백제에 쫓겨 내려간 마한 마제석검 유민들.
뒤늦게 청동기를 수입하고 힘을 키워 나갔으나 백제는 이미 철기문명까지 이룩한 놀라운 성장 결국, 마한은 백제의 철기문명 앞에 패하고 만다.
.....'임자도에서 발굴된 철기시대 유적들.'....... 반남면 일대 신미제국은 마한과 동일한 생활양식 삼두리와 대기리 패총 옹관묘 조각이 이를 뒷받침 그물을 사용한,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유적. .....................................................
백제는 마한 영역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설치. 마한 서편 섬 지방도 백제의 통치권 내로 편입. 백제는 임자도 주위 섬들을 한 행정단위로 개편.
현(縣)이라 칭하는 말단 행정단위 이름은 고록지현(古祿只縣)이었다.
백제는 오늘날 신안군 지역에 고록지현 뿐만 아니라 아로현, 아차산현, 거지산현이라는 현도 설치하였다. 이러한 행정구역 기본 골격은 백제말까지 지속되었다.
신안군은 백제시대 내내 백제 영역으로 정착.
백제의 개방적인 성풍속을 대변해주는.. 서동요. 백제는 국제무역이 성행했던 동아시아 해상왕국. 당시 백제 성풍속은 활발했던 국제 교류에서 비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