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묘 탐방기(2013. 3/28)
이번 <탐방>은 용인에 있는 포은 정몽주의 묘와 그과는 정적관계에 있던 태종 이방원의 헌릉(헌인릉)으로 잡았다. 서울을 벗어나는 코스라 부득이 승용차를 징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당역에 익섭과 건종의 차 2대 그리고 잠실역에는 호경의 차 1대가 대기 대원들을 현장으로 모셨다. 용인 慕賢(현자를 흠모한다 하여 붙인 지명) 포은선생 묘까지 가는 여정은 분당을 거쳐 광주(廣州) 오포리를 지나 약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정몽주 묘 입구 사진-빌려온 것임
현장에 도착하니 잠심팀(장원, 호경,호성, 호정)이 먼저 도착하여 주위 경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당팀들(건종, 광현, 근국, 영우, 원백, 은곤, 익섭)이 도착 서로 수인사를 하고 간단히 준비해온 간식을 나눠먹은 후 본격 <탐방>에 들어갔다. 해설자는 용인시청 소속 자원봉사자로 40대 중반 쯤 보이는 여자였는데 경험(?)상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 인듯 하다. 다음은 해설자의 이야기, 현장에서 입수한 전단지 그리고 인터넷에 나와 있는 내용을 두서없이 짜깁기하여 쓴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태종의 헌릉 답사기는 다음에 별도로 올릴 예정임)

포은 묘에서의 조망(빌려온 사진)
-포은 선생이 개성 선죽교에서 척살 당한후 어찌 여기 용인까지 내려와 묻혔는지가 가장 궁굼한 대목이다. 해설자도 그 부분부터 설명을 했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후 가묘상태에 있다 태종으로 부터 복권되어 고향인 경상도 영천(포은의 외가로 어렸을 적 자란 곳)으로 천묘하게 되었다고..그런데 상여가 이곳에서 가까운 풍덕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일진광풍이 일어 명정(銘旌:상여 맨 앞에 길을 인도하는 붉은 천에 흰색으로 쓴 기)이 하늘높이 날려 현재의 묘자리 부근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이 명당자리라 하여 선생의 유택을 이곳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역성혁명에 반대한 포은이 어찌, 그것도 당사자인 태종 재위시에 복권(영의정으로 추증)되었나가 두번째 의문이었다. 이는 복권의 명분이 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종 이방원의 포용력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우선 포은은 조선의 국시라 할 수있는 유교 성리학의 대가였다는 것이며, 유교의 덕목 중 하나인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그의 지조가 조선 창업기에 필요했던 건 아닐런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절묘한 時點도 작용했을 것이다. 포은이 거사를 계획하고 이것이 새어나가 선죽교에서 척살당한 시점이 조선 건국 몇개월 전 즉 고려시대였으니, 궁색하나마 조선왕에 직접 반기를 든건 아니라 할 수있지 않을까.
-포은 선생 묘가 거의 왕릉 수준으로 조성된 사유 : 처음부터 그리 된 건 아닐듯하다. 우선 태종의 복권으로 큰 틀이 이루워진 후, 고려 삼은(三隱 : 정몽주, 이색, 길재)을 따르던 조선의 많은 선비들의 오랜기간 압력(?)이 있어왔다. 숙종 연간에는 포은을 묘당(廟堂 : 큰 선비를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곳)에 올리고 이곳을 크게 증축 보수하였다 한다. 당대의 석학 송시열이 이곳에 편액(永慕堂)을 써서 헌정하는 등 왕릉 못지않은 대우를 하게 된다.
-포은 암살 당시 먼저 몸으로 막은 수행원(성명 미상)과 그 당시 함께 죽음을 당한 말이 있었는데, 포은의 제사 때에 이 분에게도 술 한잔 올리고 있다고... 또한 그 당시 죽은 말이 여기 포은 묘 부근에 매장되었다는 설이 있음
-포은 묘보다 약간 아래 즉 밑에서 보면 우측에 큰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몽주의 증손녀 남편인 이석현의 묘라고 한다. 증손 사위의 묘가 거의 같은 위치에 조성된 자세한 연유는 모르나 이곳이 명당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송시열 선생이 헌정했다는 편액 글씨

현재 남아있는 영모제 현판

간신히 들여다 본 모현당 편액
첫댓글 토라진 여인처럼 새촘하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순정을 잃지 않은 소년처럼 시종일관 순수하고 진지한 지천명의 열정은
45년 전 역사 수업을 듣는 고교 시절로 타임 머신을 탄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