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성인 순교지(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지)
니시자카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가 국법에 의해 최초로 처형된 순교지이다.
에도시대 초기1603년부터 많은 가톨릭 신자가 처형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6년 토사(고치현)에서 스페인 무역선 산 페리호가 표착하였을 때 선박에 실린 막대한 화물을 몰수하고 1587년 발령한 금교령을 재 발령 하여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활동 중인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들을 공공연히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교토,오사카에서 24명을 체포하여 그리스도 신자가 가장 많은 나가사키 까지 900여km를 연행하였다. 도중에 2명이 더 추가되어 26명이 1597년2월5일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공개 처형 되었으며 이것이 일본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현장이 되었다.
최초로 처형된 26인의 순교자는 1862년에 성인품에 시성되었으며, 1864년 아직 금교령이 풀리지않아 니시자카에 성당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여 거리가 떨어진 외국인 거류지에 니시자카(26성인순교지)를 향해 “오우라 천주당”이 지어 졌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생각은 빗나가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심은 더 높아졌으며,
시성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현재의 니시자카에 기념비와, 기념관 및 성당이 세워졌다.
일본 26성인 순교지(니시자카 순교지) 1
니시자카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가 국법에 의해 최초로 처형된 순교지이다.
에도시대 초기1603년부터 많은 가톨릭 신자가 처형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6년 토사(고치현)에서 스페인 무역선 산 페리호가 표착하였을 때 선박에 실린 막대한 화물을 몰수하고 1587년 발령한 금교령을 재 발령 하여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활동 중인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들을 공공연히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교토,오사카에서 24명을 체포하여 그리스도 신자가 가장 많은 나가사키 까지 900여km를 연행하였다. 도중에 2명이 더 추가되어 26명이 1597년2월5일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공개 처형 되었으며 이것이 일본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현장이 되었다.
최초로 처형된 26인의 순교자는 1862년에 성인품에 시성되었으며, 1864년 아직 금교령이 풀리지않아 니시자카에 성당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여 거리가 떨어진 외국인 거류지에 니시자카(26성인순교지)를 향해 “오우라 천주당”이 지어 졌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생각은 빗나가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심은 더 높아졌으며,
시성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현재의 니시자카에 기념비와, 기념관 및 성당이 세워졌다.
일본천주교회는 유명 순교자만 1만여 명, 무명 순교자를 합하면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쿠레 기리스탄’ 지역은 물론이고 나가사키 현(縣) 전역이 순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외에도 이키츠키 인근 나가에노지마(中江) 섬과 소토메에서 이주한 신자들이 집성촌을 이룬 오도(五島) 등 기막힌 사연들이 전해져오는 작은 순교지들이 산재해 있다.
26성인 순교지 니시자카(西坂) 2
“내가 말하려는 것을 잘 들으시오. 나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죽으며, 죽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단언하고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는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증오도 없고, 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으로 장엄하지 아니한가. 1597년 2월 5일, 사제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에 달린채로 마지막 설교를 한다. 그에 앞서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596년 12월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900km에 이르는 순교의 길, 생명의 길을 걸었다. 12세 소년에서부터 60이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리돌림과 왼쪽 귀를 잘리고 추위와 허기를 견디면서. 12세의 루도비코는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마”라는 말에 “이 세상의 짧은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바꿀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14세의 토마스는 히로시마에서 어머니께 “임종시에 상등통회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열심히 살라”는 편지를 썼으나, 이 편지는 전달되지 못한채 함께 순교한 아버지 미카엘 고자키(小崎)의 저고리 동정 섶에서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