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 최양업 필리핀 피난살이
낯선 마닐라 · 롤롬보이 생활에도 교리 공부 게을리하지 않아
1) 필리핀 롤롬보이(Lolomboy)는 성 김대건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 시절 마카오에서 피신해 약 7개월간 머물렀던 곳이다. 두 조선인 신학생이 머물던 롤롬보이에 ‘성 김대건 신부 성지’가 조성 중이다. 사진은 롤롬보이 성 김대건 신부 성지의 전경으로 왼쪽 높은 건물이 피정의 집이고 오른쪽 조금 낮은 건물이 성당이다.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은 1839년 4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7개월여간 필리핀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스승인 칼르리ㆍ데플레슈ㆍ리브와 신부와 코친차이나 출신 신학생 3명과 함께 그해 4월 7일 마카오에서 출항해 13일간의 항해 끝에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마닐라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코친차이나 신학생 필립보가 능력이 부족해 페낭신학교에서 퇴학 처리돼 싱가포르로 떠났다. 최양업과 김대건의 필리핀살이는 마닐라와 롤롬보이 시절로 구분할 수 있다.
2) 마닐라
마닐라에 도착한 최양업 김대건 일행은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머물렀다. 일행은 이곳에서 4월 19일부터 5월 3일까지 14일간 생활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은 마카오의 포르투갈 선교사와 총독과 달리 최양업과 김대건 일행을
환대했다. 총대표 신부와 원장 신부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청하라면서 동행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각각 50대 미사 예물도 줬다. 숙소에는 필요한 것이 다 있었고, 머무는 동안 숙박비도 일절 받지 않았다. 수도자들도 최양업 김대건 일행이 수도원 생활에 방해됐겠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하지만 마닐라 도미니코회 수도원 생활은 그다지 편안하지 않았다.
리브와 신부는 ‘유배 생활’이라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엄격한 수도규칙에 따라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1년 내내 소재를 지키고, 자주 대재를 지켰다. 또 자정에 일어나 두세 번 성무일도를 바치고, 여러 차례 묵상을 했다.
수도 생활에 익숙지 않은 교구 출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수도원 시간표대로 생활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도미니코회보다 덜 엄격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서 묵는 것을 선호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참조) 조선신학교장 칼르리 신부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거주하지 못한 걸 늘 아쉬워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교회법에 따라 교구장 주교에게 거주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마닐라대교구장은 호세 마리아 세귀 대주교였다. 스페인 아우구스티노회 출신인 그는1830년 마닐라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최양업 김대건 일행이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세귀 대주교는 사목 방문 중이어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바로 예방을 하지 못하고, 5월 17일이 되어서야 찾아뵐 수 있었다.
- 호세 마리아 세귀 대주교
세귀 대주교 역시 최양업 김대건 일행을 환대하고 거주를 허락했다.
세귀 대주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0월 조선 입국을 위해 페낭에서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로 갈 때 많은 도움을 줬다. 세귀 대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12일간 마닐라에 머무는 동안 숙식을 제공했고, 마카오까지 가는 뱃삯을 내주었다.
또 브뤼기에르 주교가 기도를 청하자 그는 “얼마 지나면 기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선교지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 이렇게 마닐라대교구장을 통한 보편 교회와의 연대의 끈은 초대 조선대목구장을 시작으로 첫 조선 신학생들로 이어졌다.
최양업과 김대건 일행은 마닐라의 무더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고생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마닐라에 없고 수도원에서 누릴 수 없는 마카오에서의 사소한 안락함과 편의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5월 2일 도미니코회 만사노 신부에게 “우리 신학생들을 위한 산책 장소를 알려줄 수 없느냐”고 핑계를 대며 좀더 로운 곳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사노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의중을 간파하고 곧바로 수도원 참사회에 보고했다. 다음날인 5월 3일 참사회는 최양업 김대건 일행을 마닐라에서 약 12㎞ 떨어진 롤롬보이 수도원 농장에서 생활하도록 허락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신학생들은 이날 정오에 수도원에서 나와 7시간 배를 타고 롤롬보이에 도착했다.
3) 롤롬보이
롤롬보이 수도원 농장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웠다. 농장은 너른 들판과 큰 강이 흐르고 대나무 숲이 있는 목가적인 곳에 있었다. 날씨는 마닐라와 마찬가지로 무더웠지만, 환기가 잘 돼 더위에 많이 시달리지 않았다. 또 숙소는 크고 깨끗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신학생들은 매일 해 질 녘에 농장 근처 초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와 산책을 했다. 마닐라 수도원에선 누릴 수 없는 자유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마닐라에서도 몇 번 외출했다. 하지만 신학생들이 좋은 않은 것들에 많이 노출돼 선교사들은 외출을 자제했다.
- 성 김대건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 시절 머물렀던 필리핀 롤롬보이의 성 김대건 신부 성지. 성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김대건 신부 성상. 가톨릭평화신문 DB.
최양업과 김대건은 롤롬보이에서 원하는 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데플레슈 신부는 매일 최양업과 김대건을 가르쳤고, 리브와 신부는 서늘한 밤에 조선 신학생들에게 교리 수업을 했다. 수도원 농장 건물 안에 소성당이 있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리브와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의 교리 교육의 필요성에 관해 이렇게 썼다. “매일 저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데 그것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아야 할 것 중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도 아직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최양업) 토마스는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성자께서 제1위격인 성부보다 덜 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그들은 소죄라 여겨 죄를 고하지 않는 사람이나 그것을 통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러한 상태에서 사죄를 받으면 독성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제게 주장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대죄만이 엄격히 고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하자 그들은 제가 그들을 놀리는 것이라고 여겨 저를 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리브와 신부가 1839년 6월 23일 롤롬보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건강했으나 김대건은 마카오에서부터 앓아온 가슴 통증과 위통, 두통, 요통으로 고생했다. 약을 먹어도 좀처럼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아팠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변할 정도여서 함께 있던 선교사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8월 초 조선 밀사 유진길(아우구스티노)와 조신철(가롤로)이 1839년 3월 10일(또는 11일) 북경에서 써서 보내온 한 통의 한문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최양업과 김대건 가족이 쓴 편지를 가져왔고, 보내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 북경에서 최방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됐다며 애도를 표했다.
그러면서 북경교구장을 대리하던 남경교구장 피레스 피레이라 주교가 1838년 선종했고, 이후 북경의 남당이 조정에 몰수됐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아울러 3명의 조선 선교사가 모두 건강하다면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무사 입국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에 작은 박해가 있었지만 큰 박해는 없다고 전했다. 편지는 두 신학생에게 자신들뿐 아니라 모든 교우가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격려의 글로 끝맺고 있었다.
최양업 김대건이 이 편지를 받은 지 한 달 후 조선 교회는 기해박해로 풍비박산이 났다. 3명의 조선 선교사는 물론 최양업과 김대건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김제준(이냐시오)이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역시 1840년 1월에 순교한다. 이 애끓는 참사도 모른 채 최양업 김대건일행은 “마카오로 돌아오라”는 마카오 극동대표부 르그레즈와 신부의 편지를 받고 11월 중순 마닐라에서 라파엘라호를 타고, 11월 하순에 마카오로 귀환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8월 8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