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중흥·청정승단 건설 기치로 통합종단조계종 토대 닦아
1954년 비구승대표회의 참가로
불교정화운동에 본격 뛰어들어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 주도
통합종단 출범 후에도 정화 추진
종정·장로원장 등 주요 요직 맡아
승단정화·종단 재건 강한 의지로
때론 총무원장 등과 갈등 겪기도
1954년 5월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불교정화 촉구’ 유시는 불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교단과 사찰운영은 독신 비구승이 담당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현직 대통령의 발언은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불교계를 불신과 다툼으로 내몰았다. 이후 10여년간 ‘비구․대처 갈등’이 본격화됐고, 전국 사찰은 폭력과 소송으로 몸살을 앓았다. 삼보정재는 대부분 법정다툼으로 소진됐으며, 사회적으로 불교계 위상은 한 없이 추락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스님들이 계율을 어기고 부인을 거느리는 풍토가 만연된 것은 당시 한국불교계가 풀어야 할 당면과제였다. 그렇더라도 현직 대통령이 불교계 내부문제에 간여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을 훼손함은 물론 불교의 자율성을 심각히 침해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불교교단은 조선불교 교정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불교혁신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동화사, 직지사, 보문사, 신륵사, 월정사 등 18개 사찰을 비구승(수좌)에게 맡기는 것도 논의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느닷없는 유시는 불교계 내부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유시를 발표한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대통령이 불교계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내몰면서 기독교 우선 정책을 펼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있고,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불교 내부문제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어찌됐든 1954년 5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총 8회에 걸쳐 발표된 대통령의 유시는 불교정화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소수에 불과하던 비구승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청담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다.
청담 스님은 1954년 8월24~25일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여했다. ‘이청담과 불교정화운동’(김광식)에 따르면 이 대회는 정화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비구승들이 개최한 첫 모임이었고, 이 대회를 통해 비구승들은 전통불교 복원을 위해 교단을 정리하고 승려들의 교육 강화, 종헌제정 등이 결의됐다. 이 대회에서 청담 스님은 종헌제정위원, 실행분과위원, 대책위원 등에 피선되면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기초했고, 같은 해 9월28일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회에서 도총섭에 피선되면서 정화운동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이후 청담 스님을 중심으로 한 비구측은 대처승을 승려로 인정하지 않고 호법대중으로 지칭하면서, 대처승 축출을 위한 행보를 본격화했다. 때문에 대처승이 중심을 이룬 기존 종단 지도층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해 11월5일 비구승들은 하루 전날 발표된 이승만 대통령의 2차 유시를 계기로 종단 지도부로부터 종권을 이양받기로 결의하고, 태고사(현 조계사)에 진입해 태고사 간판을 제거하고 ‘불교조계종’과 조계사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비구‧대처의 갈등은 점차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면서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정부는 중재를 위해 1955년 1월 양측의 대표 5인이 참석하는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청담 스님은 효봉, 인곡, 월하, 경산 스님과 함께 비구측 대표로 참석했다. 대책위원회는 2월4일 양측이 팽팽한 이견차를 보였던 승려자격과 관련해 8대 원칙(독신, 삭발염의, 수도, 20세 이상, 음주와 육식을 금한 자, 4바라이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 비장애인, 3년 이상 수도생활한 자)을 제정했다. 문교부와 내무부가 주관해 이에 해당되는 스님을 조사한 결과 118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담 스님 등은 이를 토대로 새로운 종단구성을 추진했다. 승려자격을 갖춘 스님들이 모여 종단을 대표할 종회의원을 선출하고, 그 종회의원들이 종헌을 제정하며, 종헌에 의거해 종단 집행부와 사찰주지를 선출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대처승들을 사찰 밖으로 내몰고, 비구승에 의한 종권 장악을 의미했다. 대처승측의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처승측은 법적 대응에 나서는 등 비구승 중심의 종단운영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청담 스님을 중심으로 한 비구승 측은 1955년 8월12일 서울 조계사에서 스님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고 종헌제정과 종회의원, 중앙간부, 각 사찰주지 등을 선출했다. 이 대회에서 청담 스님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대처승측의 강한 반발로 사찰마다 송사가 끊이질 않았고, 폭력사태까지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적지 않은 혼란이 계속됐다.
조계종 제7대 총무원장 청담 스님은 1971년 9월4일 종단의 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불교회관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이날 청담 스님을 비롯한 주요 스님들이 참석해 시삽을 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통합종단 40년사’
이런 가운데 비구승의 든든한 배경이 됐던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이후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정화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군사정권은 ‘비구‧대처 갈등’을 불교계 분규로 규정하고, 양측이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앞에 양측은 일체소송을 중단하고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해 갈등해소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양측은 1962년 4월11일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촉발된 ‘비구‧대처 갈등’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종단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정부의 강압에 의해 출범된 통합종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종회의원 선출과정에서 비구측이 32석, 대처측이 18석을 갖게 되면서 양측은 다시 갈등을 이어갔다. 결국 대처측은 통합종단 이전의 상태로 환원을 선언했고, 대처측의 추천으로 선출된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도 사직했다. 이후 대처측이 1970년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할 때까지 양측은 지난한 법정다툼을 이어갔다.
비구승 중심으로 구성된 조계종은 이후 장기간 이어진 비구‧대처 갈등으로 낙후된 종단을 정비했다. ‘역경‧포교‧도제양성’을 종단 3대 목표로 내걸고 새로운 종단 운영의 체계를 잡아갔다. 불교정화운동을 이끌었던 청담 스님은 늘 그 중심에 있었다.
청담 스님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구성된 종회에서 종회의원으로 선출됐고, 1963년 6월 제4회 종회에서 초대 종회의장 벽안 스님에 이어 의장에 선출돼 종단 법체계를 정비했다. 1966년 10월 초대 종정 효봉 스님이 입적하자 청담 스님은 그해 11월30일 제2대 종정으로도 취임했다. 당시 청담 스님은 세납 65세로 종정을 맡기에는 다소 적은 나이였지만, 그를 종정으로 추대하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스님의 지도력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일 수 있다.
청담 스님은 종정에 취임한 이후 새로운 종단 건설이라는 원력을 세웠다. 비록 통합종단 출범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대처승들을 몰아냈지만, 스님들의 계율파괴와 수행부족, 사찰재산 탕진, 문중간 갈등 등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렇기에 청담 스님은 “완전한 불교정화는 스님들의 재교육과 불교내부의 부조리를 해소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제2의 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청담 스님의 불교정화에 대한 강한 의지는 때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권력욕으로 비춰졌고, 많은 스님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총무원장과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첫 갈등은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표출됐다.
‘대한불교’(1967년 7월30일자)에 따르면 청담 스님은 중앙종회에 앞서 7월23일 열린 종단중진회의에서 총무원장 경산 스님의 퇴진을 요구했다.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 사퇴를 요구한 표면적 이유는 경산 스님이 동국대 재단이사장과 총무원장 재직 당시 진 빚 4170만원에 대한 문책이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총무원장 경산 스님이 대처승 측에서 이탈한 화동파를 종단에 유입시키려는 것에 대한 불만표출이라는 시각도 있다.(김광식) 이 문제는 당시 중앙종회에서 큰 논란이 됐고, 종정과 총무원장의 동반퇴진으로 마무리됐다. 청담 스님이 종정에 취임한 지 불과 8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청담 스님은 종정에서 물러났지만, 종단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스님은 한 달 뒤 조계종 장로원장으로 추대됐고, 종단 안팎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청담 스님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1969년 8월15일 장로원장 청담 스님은 돌연 ‘조계종 탈퇴’를 선언했다. 청담 스님의 종단탈퇴는 1969년 7월 제20회 임시중앙종회에서 ‘종단유신재건안’을 제안했지만, 중앙종회가 이를 거부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자신에게 “종단을 맡겨 달라”는 요구가 무산된 것도 배경으로 꼽혔다.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선언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선학원 출신 수좌들은 승려대회 개최를 선언하며 집행부를 압박했다. 결국 영암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나고, 월산 스님이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논란은 마무리됐다. 청담 스님은 다시 장로원장으로 복귀했다. 청담 스님의 종단탈퇴선언은 종단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원로로서 선택할 수 있는 극약처방일 수 있다. 그러나 종단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속사회를 향해 극단적인 탈퇴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당시 ‘큰스님’으로서 적절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청담 스님은 1970년 7월 서울 봉은사 토지매각 논란으로 사직한 월산 스님에 이어 제6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종정까지 역임했던 스님이 다시 총무원장을 맡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많았지만, 청담 스님은 종단 재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청담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교권확립 △청정수행 교단 확립 △정법구현 △불교근대화 등을 핵심과제로 제시하고 불교정화의 취지를 살려 종단 발전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미등록사찰을 정리하고 이에 불응하면 주지인사조치 등을 단행하면서 총무원의 강한 행정력을 보였다. 또 봉은사 토지매각 논란도 조속히 수습해 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발생한 관악산 염불암 토지매각 사건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청담 총무원장 체제는 큰 위기를 맞았다. 염불암 토지매각 논란은 당시 총무부장 경우 스님 등이 총무원장이 외국 순방에 나선 틈을 타 불법으로 토지를 매각하려다 발각된 사건으로 종단 안팎에서 큰 논란이 됐다. 결국 청담 스님은 1971년 7월27일 열린 제26회 임시종회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직원을 제출했다. 중앙종회는 이날 총무원장을 비롯해 총무원 4부장과 감찰원장 등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이날 청담 스님을 다시 총무원장으로 재선출하면서 제7대 총무원장으로 등극됐다.
중앙종회에서 재신임을 받은 청담 스님은 이후 왕성한 행보를 이어갔다. 그해 9월 종단의 숙원이었던 불교회관 기공식을 진행했고, 이화여대 특별강연, 호국성무사 준공법회, 1군사령부 법당 낙성식 등에 참석해 불자들을 대상으로 법문도 진행했다. 그러나 이 같은 광폭 행보는 건강악화로 이어졌다. ‘불교정화의 기수’ ‘통합종단 출범 산파’ 등 숱한 별칭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청담 스님은 11월15일 새벽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연을 마쳤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62호 / 2018년 10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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