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이규황 시인의 묘소에는 절기에 맞게 제비꽃과 양지꽃이 봄바람에 살랑이며 햇살을 받고 있었다. 묘소 봉분 옆에는 그의 대표 시 ‘두 몸 강물 되어 하나로 흘러라’ 가 새겨진 이규황 시비가 서 있고 시비 뒷면에는 시비를 세운 지인들이 남긴 글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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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길장 오산문인협회 회원. ⓒ오산문인협회 | <시비를 세우며 >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지지만 이규황은 치열한 시대정신을 갖고 온 몸으로 시를 쓴 시인이자 교육에 앞장선 교육자로서 우리들 가슴 속 깊이 뜨거운 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하여 시인 이규황의 아름다웠던 삶을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이의 마음에 길이길이 새기고자 작은 정성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을 여기에 세웁니다. - 2004년 11월 27일 이규황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
詩碑 내용처럼 시인 이규황의 삶은 치열했다. 그리하여 그는 짧지만 굵게 자신의 신념에 의해 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당대 사회적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삶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귀천했다.
사)한국문인협회 오산시지부(이하, 오산문인협회, 회장 윤민희)는 오산문학의 시원이 되는 문인을 찾아서 작품을 연구하고 널리 알려 홍보함으로써 오산문학의 정체성을 찾는데 목적을 두고 정기적인 답사를 계획했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이나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하여 좋은 먹거리는 어디 있는지, 유원지는 어디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내 고장에 어떤 문인이 살았으며 어떤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곳인지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문학만큼 자기 고장을 빛내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이런 점을 깊이 간파한 오산문인협회 제11대 지부장 윤민희 회장은 취임사에서 밝혔듯이 오산문학의 원형이 되는 작가들을 찾아가기 위해 2013년 4월 28일, 그 첫발을 내딛었다.
오산문인협회 회원들이 4월 28일, 오산시 수청동 수청근린공원에 모였다. 회원들은 수청근린공원에 미리 준비한 시화전시 작업을 마치고 11시가 다 되어 양감면 정문리로 출발했다. 답사하기에는 좀 늦은 시각이지만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계획했던 일정대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으니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4월이 주는 주변의 경치에 취해 마음이 들떠있었다.
오산에서 발안 방향으로 길을 나서 이규황 시인의 고향인 내천리를 지나 황구지천을 넘으면 바로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발안 방향이고 우회전을 하면 향남IC며 좌회전을 하면 양감면 소재지로 가는 길이다. 가는 길에 시인의 고향 마을의 위치와 그의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황구지천, 내천리 뜰, 멀리 바라보이는 오산미군기지의 긴 활주로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고 바로 부처내 고개에 올라서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좌회전을 하여 약 3km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정문리에 다다른다. 길은 굽이굽이 시골길이지만 이젠 모두 포장이 되어 있어 찾아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가끔 봄 농사철임을 알게 하는 트랙터의 분주함만이 시골의 정적을 깰 뿐이다.
정문리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바로 동네 안길로 들어서 약 이백 미터 쯤 언덕을 오르면 이규황 시인 묘소가 있는 야산이 나온다. 야트막한 산세가 남북으로 이어지는 등성에는 작은 길이 나 있고 길가 아래쪽으로 가족 묘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묘소 가장 아래쪽에 시인의 묘소가 있는데 봄 햇살을 받아 묘소 주변에 풀들이 돋아나고 있다. 봉분에는 잔디 뿐 아니라 쑥들이 군데군데 자라나 찾아간 일행이 잡풀들을 뽑아 주기도 했다. 우리는 준비해간 술과 포와 과일을 차려 놓고 찾아 온 인사를 하고 자리에 둘러 앉아 준비한 자료를 보며 이규황의 삶의 궤적을 다시 한 번 밟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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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황 시인에게 잔을 올리고 있다. ⓒ오산문인협회 | 이규황은 1961년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 전형적인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육 남매 중 넷째로 위로 두 누님과 형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학창시절 그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평소 책을 많이 보는 편이었으며,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선후배 간에 규율이 엄격하다는 밴드부 활동을 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숭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가정형편으로 입학 후 바로 휴학을 하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곧바로 고향마을 농공단지 작은 공장에 취업한다. 이때 그는 절박한 농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그의 문학적 토대를 단단히 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대학시절 1985년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대전과 천안에서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면서 1987년 ‘삶의 문학’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한다. 1990년 ‘더 큰 사랑으로 굽이치며’ 공동시집을 발간하게 된다.
1991년 오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오산과 인연을 맺었고, 현재는 유가족인 부인과 두 자녀가 오산에 살고 있다. 1991년 모교인 오산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문학의 불모지인 오산지역의 문예운동에 남다른 정열을 쏟는다. 오산문학동우회 결성에 참가하여 [오산문학] 문예지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1992년 2월 경기민족문학협의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게 된다. 1992년 2월 경기민족문학 제 1호인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다’를 발간하면서 이후 5호인 ‘경기민족문학’을 1994년까지 발간한다.
1994년 이후 전교조 오산ㆍ화성지회 사무국장과 전교조 오산ㆍ화성지회 7-8대 지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당시 서울 사당동 전교조 경기지부 사무실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근하며 이 땅의 교육현실에 대한 막막함과 아이들 눈빛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뇌를 그의 詩 ‘나는 다시 일어선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1994년 이후 1997년 간경화가 악화되어 절명하기까지 참 교육운동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시대정신을 놓치지 않고 있다.
시인이 전교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던 시기는 민주노총이 결성되는 시기로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가 최고조로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다. 비합법 시절은 전교조도 5.31 교육개혁안의 발표와 상문고로 촉발된 사립학교 재단 비리, 학교운영위원회 도입, 두밀리 두밀분교 폐교에 따른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 등 현장중심의 제2기 전교조 선언을 통한 조직정비와 투쟁의 시기였다.
1994년에서 1996년까지 전교조 오산ㆍ화성지회 사무국장과 지회장으로서 투쟁의 선봉에 서서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치며 싸워나가는 시기였다. 노동자집회일 경우에는 작업복을 입고, 넥타이부대 집회는 넥타이를 매고 서울로 올라가던 시인의 뒷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직까지 내게 노동, 민중, 참교육 등이 생소한 말들이었을 때 그는 내 손을 이끌어 전교조 사무실이 있는 사당행 버스에 올랐다. 늦게까지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하고 늦은 시간 수원행 막차를 놓쳐 남태령 고개 아래서 막막하게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하고 있을 때도 그는 늘 여유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들은 살을 에는 만주, 시베리아에서 악전고투했다는 것이다. 비틀어진 교육현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길이 아닌가! 이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법단체로서 전교조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셌고 1500여명의 해직된 교사들은 아직도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때 그는 과로로 인해 서서히 몸이 망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사망한 이후 전교조는 합법노조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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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황 시인의 묘비앞에서. ⓒ오산문인협회 | 그의 유고 시집 [두 몸 강물 되어 하나로 흘러라] 발문을 쓴 이은봉 시인은 [ 이규황의 詩 세계를 통해 본 詩人으로서의 이규황]에서 다음과 같이 조명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참다운 진실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드러나 있기도 하고, 분단 조국의 현실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아가 드러나며, 오늘의 농촌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농부 아들로서의 자아가 표현되어 있다.
물론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자아는 자기 시대에 지식인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자아에 익히 닿아 있다. 당대에 많은 지식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순결하고 무구한 자아를 직접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적 자아이다. 이규황의 시는 심미적인 자아의 지적 유희를 노래하고 있기보다는 구도자적 자아의 진실한 고뇌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시의 자아는 기본적으로 불안하게 떠도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그의 시의 자아가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정직성, 곧, 나날의 일상과 함께 하는 정직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 [벌초]에서 “10대조 조상에서 5대조에 이르기까지 나의 조상은 탐관오리였다”고백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자아의 현존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정직성의 추구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당대의 삶을 불투명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지와 달리 도리어 “앞을 전혀 볼 수 없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의 시에서 이는 구체적으로 안개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일단 그가 자기 시대의 삶을 이미지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일행은 묘소에 자리를 만들어 놓고 오랫동안 시인을 이야기 하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또 다른 문인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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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극의 생가앞에서. ⓒ오산문인협회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사회주의 청년 운동가이며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알려진 박승극의 고향인 정문리 생가를 찾아 그의 삶과 문학적 의의를 살펴보고 이규황 시인과의 만남을 나름대로 정의해 봤다. 이규황 시인의 묘소와 박승극 소설가의 생가가 불과 백여 미터 거리인 정문리에 있다. 이들은 살아서 자신의 신념에 의해 당대 사회적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이다. 박승극과 이규황의 조우는 극적이며 필연인 듯 싶다.
일행은 박승극의 생가 앞에서 준비해간 펼침막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아쉬운 마음으로 양감면 소재지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이곳에서 점심은 고정현 회원님과의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오산문인협회의 인연이 더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다시 초록산 산림욕장으로 자리를 옮겨 박승극 문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눴다. 잘 만들어진 정자에서 싸가지고 간 떡과 음료, 과일을 건네며 그동안 바쁘게 활동하느라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 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질 때 쯤 자리에서 일어나니 오산으로 나오는 길은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 잎이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평소 이 말을 가슴 속에 새겨본다. 공자 말씀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이 또한 반갑지 아니한가?”라고 해서 여기서 친구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먼 과거의 사람과 지리적으로 정말 멀리 있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답사를 통한 이 두 문인과의 만남으로 반갑고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두 몸 江물되어 하나로 흘러라 이규황
신새벽 산맥 밟고 와 첩첩한 산맥 안개 자욱히 끌고 와 어디에 있었는가 새벽강에 머리를 헹궈내며 하얗게 웃고 있는 아침 햇살 그 눈빛으로 만나 사랑을 이루었나니 길이 흘러 江물이 노랠 하는구나 모든 산맥은 江을 따라 흐르고 모든 길은 江을 따라 들판으로 걸어가나니 이렇게 두 몸이 江물 되어 하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으로도 좋은 날 따뜻한 입맞춤으로 그렇게 흐르다가 척박하고 버림받은 땅 지날 때면 자운영 꽃잎이라도 들판 가득 뿌려주고 흐르거라 굽이쳐서 흘러 넘치는 넉넉함으로 풀뿌리 잡목 틈에서도 깊은 잠 깨어 헹가래치며 날아오르는 들새들의 힘찬 날개 짓으로 우리가 모두 될 수 있도록 모두가 江물로 흐를 수 있을 때까지 두 어깨 단단히 걸고 당당한 걸음으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두 몸 江물 되어 하나로 흐르거라.
烏山驛 이규황
기차소리 들린다 늦은 밤 희미한 불빛을 달고 南(남)行(행)으로 치닫는 열차 둥근 달은 누군가 반쯤 베어 먹었다 누군가 반쯤 잠든 밤에 화들짝 놀라 주섬주섬 기억 챙기는 驛舍 안 그러나 아무도 잠에서 깨어나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驛에 내리는 사람도 없다 수신호에 길들여진 기적소리에 찢어지는 밤의 정물화
* 이규황 시인 약력 *
1961년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 출생 1968-1973 내수초등학교 1974-1979 오산ㆍ중고등학교 1980년 숭전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85년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 문단활동 시작 1987년 ‘삶의 문학’ 동인 활동 1990년 『더 큰 사랑으로 굽이치며』공동시집 발간 1991년 오산으로 이사 ~현재는 유가족이 살고 있다 1991년 모교인 오산고등학교 부임. 전교조 조합원 가입 1991년 ‘큰시’ 동인 활동 1992년 경기민족문학협의회 사무국장 1994년 전교조 오산ㆍ화성지회 사무국장 1995-1996년 전교조 오산ㆍ화성지회 제7. 8대 지회장 1997년 6월25일 입원했던 아주대학병원에서 투병 중 간경화로 37세의 짧은 삶을 마감 유가족 부인과 1남, 솔. 1녀, 소담. < 저작권자 © 물향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첫댓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를 하셔서 읽기가 편합니다.
목적과 과정 내용까지 좋습니다.
귀한 자료가 되겠네요.
술잔과 친하셔서 그런가 ?
잔을 받으시는 모습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우세요. ^^*
좋은 자료와 생생한 정보로 문학기행을 알차게 다녀왔습니다.
회원님들의 좋은 글이 언론으로 자주 나오기를 희망하면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 좋고~~
오산문협을 이끌고 가시는 칠용, 난 기껏해야 재용 ㅎㅎㅎ
오산문협이 쭉쭉~~~ 빛나고 있어요 , 빛나리 몇분이 계셔 그런가 ?
ㅎㅎㅎ 모자 써야겠다. 그러나~~
멋져요,,,
^^
좋은 글이고 훌륭한 기사입니다.
감축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