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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헌 1735~1762)
정조 이산(祘)의 아버지이자 영조의 둘째 아들. 본명은 이선(李煊). 태어난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0살 때 동갑내기인 홍봉한의 女息 혜경궁 홍씨와 혼인하였다. 15세가 되던 날, 아버지 영조의 명을 받고 대리청정을 하였지만 그것이 자신의 명줄을 재촉하는 길이 되어버렸다. 노론세력들의 공격의 대상이 된 사도세자. 결국 그는 나경언의 고변으로 폐세자가 되어버리고 자결을 하라는 영조의 명을 거부. 뒤주속에 갇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8일만에 28세 라는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훗날 죽음을 애도한다는 사도라는 칭호가 내려지고 아들인 정조가 왕위의 즉위되면서 장헌이라는 시호로 추헌되다가 고종대에 장조라는 시호로 추헌된다. 정조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듯이 영조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자신의 이복형이자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의 독살설이다. 경종의 병이 심해지자 연잉군 시절 영조는 대비 김씨(숙종의 셋째 정비)와 함께게장과 생감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의학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상극이라고 한다. 여러 반대에 불구하고 그는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그것을 먹고 경종의 몸은 심하게 악화되었고 한다. 더불어 그 뒤에 영조는 인삼차를 올렸는데 결국 이 음식들이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족쇄의 고리가 되고 말았다. (출처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사도세자를 음해했던 노론 벽파세력들과 그들의 수장인 정순왕후 그들은... 소자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랬기에.... 더욱 더 소자를 살려둘 수 없었겠지요.
* 정조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듯이 영조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복형이자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의 독살설이다. 경종의 병이 심해지자 연잉군 시절 영조는 대비 김씨(숙종의 셋째 정비)와 함께 게장과 생감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의학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상극이라고 한다. 여러 반대에 불구하고 그는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그것을 먹고 경종의 몸은 심하게 악화되었고 한다. 더불어 그 뒤에 영조는 인삼차를 올렸는데 결국 이 음식들이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족쇄의 고리가 되고 말았다. (출처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 영조를 왕위로 추대하려는 세력들은 노론세력들이었다. 경종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소론세력들이었는데 이는 원래 한 뿌리었다. 이들을 이야기 하자면 숙종때로 넘어가는데 숙종때는 유명한 여인 장희빈과 인현왕후 민씨가 있다. 장희빈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남인세력이었고, 인현왕후 민씨를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 세력이었다. 훗날 인현왕후가 폐서인 되고 장희빈이 중전에 자리에 오르면서 남인들이 실권을 잡지만 6년 뒤 상황은 역전이 되고 중전자리에 쫓겨난 장희빈은 궁에 무당을 끌어 들이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서인 세력이 둘로 나누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론과 노론이었다. 소론 세력들은 지금의 세자 즉 경종의 어머니이니 살려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노론들은 죄가 명백히 밝혀진 이상 살려둘 수 없다고 주장을 펼쳤다. 결국 숙종은 노론의 손을 들어주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게 된 것이다. 더불어 숙종은 경종보다 연잉군을 더 총애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신들에게는 연잉군,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까지 남겼다고 한다.
* 영조는 왕위에 오르고 훗날 탕평책을 실시하였지만 결국 그 탕평책은 나주 벽서 사건으로 완전히 철회하게 된다. 나주 벽서 사건은 영조를 비난하는 벽서가 붙이면서 일어난 사건인데 경종의 독살설에 트라우마가 있던 영조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사건이었다. 이로서 영조는 완전히 노론의 선을 타게 되고 자연스레 소론 성향인 아들과 정반대 노선을 타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사도세자의 아내와 장인, 심지어는 친누이인 화완옹주와 어머니인 영빈 이씨까지도 노론세력이었다. 특히나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노론골수 집안이였기 때문에 이들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아주 지대한 공헌을 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정조가 세손 시절, 즉 11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두 눈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공헌을 한 노론세력들로서는 절대 정조를 살려둘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연산군 시절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금삼의 피.... 폐비 윤씨가 사약 마시고 토한 핏자국을 보며 연산군을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 공헌을 한 세력들을 죽이고 대궐에는 때 아닌 피바람이 불게 되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죽었을 때는 연산군은 세자 시절이었고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 두살 때 친 어미와 헤어졌으니 어찌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어미의 복수로 조정에 엄청난 피바람을 몰아치게 했다. 이들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직접 두 눈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겼했으니 그 여파가 실로 엄청날 것이라는 알기에 이들은 정조를 죽이려고 했다.
특히 드라마상에서 나왔듯이 정조 대신 은전군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했는데그 이유는 간단하다. 은전군은 사도세자의 후궁인 박씨에게 난 아들로 박씨는 사도세자에게 직접 죽임을 당했다. 그러기에 은전군은 사도세자에 대한 깊은 원망감을 자리잡고 있었다. 사도세자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왕위로 추대해도 별 무리가 없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지만...... 결국 은전군의 목숨줄을 재촉하는 결과만 남게 되었다. 정조 재위 1776∼1800.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錦衫의 피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복위시키고자 일으킨 갑자사화를 1935년 박종화가 작품화한 역사 소설. 『금삼의 피』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1901~1981]가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생모인 윤씨를 복위시키고자 일으킨 갑자사화를 작품화하여 1935년 『매일 신보』에 연재한 장편 역사 소설이다. 박종화는 『금삼의 피』에서 연산군의 상식을 초월한 횡포는 모두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설정하였다. 『금삼의 피』는 연산군의 광적인 행위와 난폭성의 이면에 인간적인 오뇌와 고독을 담으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비록 정사(正史)에서는 폭군 연산군의 행적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되어 있지만, 『금삼의 피』에서는 연산군의 인간상을 낭만적인 문장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승화시켰다. 『금삼의 피』의 주인공인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위치해 있다. 『금삼의 피』는 총 6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 장한편, 사모편, 필화편, 척한편, 실국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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