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베네제 다리에서 바라 본 아비뇽 교황청)
<어두운 굴욕의 역사,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의 다리위에 우리 모두 원을 그리며 춤을 추네 멋진 신사들이 그렇게 하지. 아름다운 부인들도 그렇게 해. ……그리곤 다시 이렇게 해” <프랑스 민요. ‘아비뇽의 다리위에’ 가운데서> 프랑스에서 우리 민요 아리랑에 비견될 수 있는 곡이 바로 이 ‘ 아비뇽의 다리위에’ 이다. 합창의 대가 로저 와그너에 의해 절묘하게 컨트럴되어 흥겨운 춤곡으로 멋지게 리메이킹된 이 프랑스 민요를 이젠 세계인들이 함께 부른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차에서 내려 아비뇽의 역사를 빠져나온 순간, 우리를 온몸으로 안아준 것은 프로방스의 특산물같은 오렌지빛 풍성한 햇살이다. 겨울의 찬공기가 폐부를 파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렬한, 년중 삼백여일 계속된다는 프로방스의 충만한 햇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중세의 성벽안에 오밀조밀 조성된 마을로 들어 갈수록 엄마품에 안기듯 아늑한 분위기다. 아비뇽은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리옹을 지나 프로방스 남부도시 아를을 거쳐 지중해로 빠져 나가는 론강에 면한 작은 도시다. 11세기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잇는 상업의 요충지로서 지금도 중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하에는 남유다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그 후 유대인들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는다. 구약의 텍스트를 통해 전해진 이 사건은 무려 1900년의 아득한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바로 이곳 프로방스의 아비뇽에서 재현된다. “아비뇽의 유수”란 교회사의 용어가 여기서 나왔던 것이다.이는 프랑스왕의 권력이 중세 카톨릭의 교황권을 접수하여 교황을 70년간 꼭두각시로 세우고 통제한 교회역사의 어두운 굴욕의 시대요 세계사의 스캔달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당시 유럽의 강자 파리 황실의 정치적 카리스마가 유럽 기독교의 상징 바티칸의 성전 기둥을 송두리째 뽑아서 이곳 아비뇽에다 70년간 이식시킨것과 다름이 아닌 셈이다. 이 사건은 훗날 유럽의 커다란 지각변동과 함께 세계역사의 중심축을 이동시킬만큼의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된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관찰해 보니 화려한 천장 프레스코화나 벽면의 정교한 디테일이 아름답게 정렬되어 있었으나 거룩함이나 경건함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교황청 침실 곳곳에 금은보화가 저장되었다던 금고방을 확인하는 순간 탐욕으로 물든 당시 교회의 자화상이 비추어져 기분이 우울해진다. 중세 교회의 어두운 굴욕의 현장 아비뇽의 교황청을 빠져 나와 모던한 분위기의 아비뇽의 거리를 지날 때 시청사와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들을 통해 아비뇽의 또 다른 현대적 모습을 만나게 된다. 성과 속의 완벽한 분리와 일치, 그리고 중세의 그로테스크한 그늘진 역사의 흔적을 남겨놓고 화사한 모더니티의 칼라로 덧씌운 모습이 오늘날의 아비뇽이다. 프로방스의 강렬한 햇살이 이 중세 도시 구석 구석에 뿌려지는 한 낮에 어디선가 교회의 종소리가 장엄하게 울린다. 우리는 과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제 막 현실의 빛속으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