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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덕무(李德懋)생년1741년(영조 17)몰년1793년(정조 17)자무관(懋官)호청장관(靑莊館), 형암(炯菴), 아정(雅亭), 선귤당(蟬橘堂), 단좌헌(端坐軒), 사이재거사(四以齋居士), 주충어재(注蟲魚齋), 학상촌부(鶴上村夫), 학초목당(學草木堂), 향초원(香草園), 한죽당(寒竹堂)본관전주(全州)초자명숙(明叔)특기사항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
청장관전서 제19권 / 아정유고 11(雅亭遺稿十一) - 서 5 / 김직재(金直齋) 종후(鍾厚) 에게
전번에 두 통의 편지를 연달아 받아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물으신 바의 3대(代)를 추증(追贈)하는 사실은, 다시 《당문수(唐文粹)》 요현(姚絃)이 편찬했다. 의 목록을 상고하니, 3대를 추증하는 제도가 없고,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修))의 문집에도 역시 없으며, 왕임천(王臨川 왕안석(王安石))과 증남풍(曾南豊 증공(曾鞏))의 문집에 비로소 있으니, 생각건대, 3대를 추증하는 제도는 송(宋) 나라 때에 시작된 듯합니다.
다만 구양공은 농강천표(隴岡阡表)의 끝에서 3대를 추봉(追封)하는 일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했을 뿐이고, 자신이 지은 내외(內外)의 제도가 매우 많으나 3대를 추증하는 일에 대해서는 끝내 한 편도 없으니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소자첨(蘇子瞻)이 찬(撰)한 것은 본집(本集)에 실려 있고, 원명선(元明善)이 찬한 것은 원(元)의 《문류(文類)》 소천작(蘇天爵)이 편찬했다. 에 실려 있습니다. 뒤에 《문류》를 상고하였더니, 또한 요 수(姚燧)가 찬한 고려국왕 충선왕 봉증조부모 조모 조부는 참여치 않았다. 부모제(高麗國王封曾祖父母祖母父母制)가 있습니다. 2대를 추증하는 제도는 매우 많습니다. 《구당서(舊唐書)》ㆍ《신당서(新唐書)》 《구당서》는 유후(劉昫)가 찬하고 《신당서》는 송기(宋祁)가 찬했다. 와 《송사(宋史)》 아로도(阿魯圖) 등이 찬했다. 를 자세히 상고한 뒤에야 알 수 있습니다.
연기(緣起)라는 두 글자는 남조(南朝)의 양임방(梁任昉)이 지은 《문장연기(文章緣起)》인데, 대개 기(記)ㆍ시(詩)ㆍ부(賦)ㆍ표(表)ㆍ전(牋)과 온갖 글의 시초를 기록한 것입니다. 연기는 원시(原始)의 뜻과 같으니 그 연유한 바를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전번에 저에게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물으신 말씀을 우러러 답하고, 거룩한 글을 망령되이 고쳤건만 인정해 주심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송구스럽고 감명하기 그지없는데 뜻밖에 이제 또 옛사람의
일자사(一字師)를 끌어 비유하심을 입으니, 놀라고 외축되어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기년아람(紀年兒覽)》두 책은 어떤 사람이 등사하려고 가져갔었는데, 이제 찾아왔으므로 삼가 싸서 올립니다.
물으신바 기년의 체제는, 한(漢) 나라는 동한(東漢)과 촉한(蜀漢)으로 나누고, 진(晉) 나라 또한 동진(東晉)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으며, 그 중흥지(中興地)로서 각각 명호(名號)를 세웠으니, 정통(正統)에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육조(六朝)ㆍ오대(五代) 와 같은 것은 정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북조(北朝)에 비교하면 본래 이적(夷狄)입니다. 남당(南唐) 등 여러 나라는 각기 명호를 도둑질한 자들입니다. 오히려 이가 저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글자 내려서 쓰지 않고 마치 정통인 것처럼 하였으나, 그 조(殂)라고 쓰고 붕(崩)이라고 쓰지 않은 것에서 그 필법을 볼 수 있습니다.
서문(序文) 가운데의 애체(靉靆) 두 글자는 자서(字書)를 상고하였더니, ‘구름이 성한 모양이다.’ 하고, 또 ‘애희(靉霼)는 곧 애히(僾俙)다.’ 이등(李登)의 《성류(聲類)》에 애(僾)는 음이 의(倚)이니, 애히는 방불(彷彿)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동천청록(洞天淸錄)》 송(宋)의 조희곡(趙希鵠)이 지었다. 에는 ‘애달(靉
) 장자열(張自烈)은 ‘체(靆)가 그릇 달(
)로 되었다.’ 하였다 은 노인이 잔 글자를 분변하지 못할 때 이것을 눈에 걸면 밝게 보인다.’ 하였고, 또 원(元) 나라 사람의 소설(小說)에는 ‘애체는 서역(西域)에서 나왔다.’ 《방여승략(方與勝畧)》에 ‘만랄가국(滿剌加國)에서 애체가 나온다.’ 하였다. 하였고, 또 《방주잡지(方洲雜志)》 명(明) 나라 장영(張寧)이 지었는데, 장영은 일찍이 조사(詔使)로 우리나라에 왔었다. 에는 ‘일찍이 지휘(指揮) 호농(胡豅)이 우거한 처소에서 선묘(宣廟)가 하사한 물건을 보았더니, 크기가 돈짝만한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흡사 운모(雲母)와 같고 금으로 테를 둘렀으며 자루가 달렸다. 오므리면 하나가 되고 펴면 둘이 되었는데, 노인이 두 눈에 걸면 글자가 배나 크게 보인다. 또 손경장(孫景章)의 처소에서 두 번 보았는데, 손경장이 이르기를 「좋은 말[馬]로써 서역(西域)의 장사치 만랄(滿剌)에게서 무역해 얻었는데 그 이름이 애체(僾逮) 상고하건대 이것은 애체(靉靆)의 잘못이다. 라고 들은 것 같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상 여러 설들을 상고하면, 구름[雲]의 애히(僾俙)한 것을 빌어서 안경(眼鏡)의 이름을 삼은 것인데, 송(宋)ㆍ원(元) 때부터 이미 있었으며 다만 성행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명 선종(明宣宗) 때에는 좋은 말로써 무역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사용합니다.
물으신바 《오잡조(五雜俎)》에 ‘소하(蕭何)가 전자(篆字)를 잘 썼다.’ 한 것은, 상고하건대 한(漢) 나라 허신(許愼)의 《설문(說文)》서문에 ‘《진서(秦書)》에 8체(體)가 있는데, 여섯 번째가 서서(署書)다.’ 했고, 그 주(註)에 ‘소자량(蕭子良)이 말하기를, 서서는 한 고조(漢高祖) 6년에 소하가 정한 것인데, 그것으로 창룡궐(蒼龍闕)ㆍ백호궐(白虎闕)에 썼다고 했다.’ 하였고, 또 진(晉) 나라 양흔(羊欣)의 《필진도(筆陳圖)》에 ‘소하는 글씨를 매우 좋아하였다. 일찍이 장자방(張子房)ㆍ진은(陳隱) 등과 함께 붓을 사용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소하가 창룡궐과 백호궐에 글씨를 쓰기 위하여 석 달 동안 깊이 생각한 끝에 그 편액(扁額)을 쓰니, 구경군들이 흐르는 물처럼 모여들었다. 소하는 몽당붓을 사용하였다.’ 《금호기(金壺記)》에 이르기를 ‘소하가 전주(篆籒)를 전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주(蕭籒)’라고 칭했다.’ 하였다. 하였고, 또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소하가 율법(律法)을 창작하며 말하기를 ‘태사(太史)가 학동(學童)을 시험하여 능히 9천 자 이상을 외어 쓰면 곧 사(史)로 삼고, 또 육체(六體)로 시험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상서어사사서영사(尙書御史史書令史)로 삼으며, 이민(吏民)이 상서(上書)할 때에 글자가 혹 바르지 못하면 탄핵하라 했다.’ 하였습니다.
여러 설들을 살피건대, 소하는 한(漢) 나라 초기 서가(書家)의 영수가 되었던 것이고, 또 법을 세워서 사람을 시험하여 서학(書學)으로 초사(初仕)의 길을 삼았으니, 참으로 경세유자(經世儒者)가 됨에 해롭지 않으며 일을 만든 것이 구차스럽지 않으니, 도필리(刀筆吏)라는 이유로 그 장점을 덮어버릴 수 없는데, 다만 수적(手蹟)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에서 알지 못할 뿐입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 이름은 양(亮))의 부자와 사안(謝安)ㆍ사마온공(司馬溫公 이름은 광(光))ㆍ왕개보(王介甫 이름은 안석(安石))ㆍ주 문공(朱文公 이름은 희(熹)) 같은 분들도 모두 서화를 잘하였으나 공업(工業)과 문학(文學)에 가리워져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연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저 세간에 이 일과 같은 것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물으심을 외람되이 받고 이처럼 듣고 본 바를 다 말씀드리매 스스로 그 말이 많은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옛사람의 ‘완물상지(玩物喪志) 라는 경계를 범하였으니, 더욱 두렵고 죄송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난 달에 처음 창설된 벼슬을 얻어서 숙수(菽水)의 공급을 돕게 되었으니, 매우 영광스럽고 기쁩니다.
근일에
규장각 팔경시(奎章閣八景詩)를 어명으로 짓게 되어 악전(幄殿)에 입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자 《명의록(明義錄)》을 하사하시고, 또
靑莊館全書卷之二十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雅亭遺穚[十二]○應旨各體 奎章閣八景。七言律詩。八首 *정조 3 1779 기해 乾隆 44 39 6월, 外閣 檢書官이 되다. ○ 7월, 「奎章韻瑞」를 編校하다. 御命으로 〈奎章閣八景七言律詩〉, 〈登瀛洲二十韻排律〉을 製進하여 居首하다. ○ 10월, 承文院 吏文學官을 겸하다. 「資治通鑑綱目」을 懸吐校正하다.* 己亥孟秋臣德懋,臣得恭,臣齊家,臣理修。待罪檢書官。一日上命製奎章閣八景詩。臣德懋等震越感激。謹百拜製進。上召閣臣硃批。以臣德懋詩。置第一。因命臣等進前。天語丁寧。錫賫有差。於戱盛哉。螻蟻微臣。何以得此。隆天厚地。沒齒啚報。臣德懋恭紀。 奉謨雲漢 森羅寶帙誕垂昆。盛德千秋不可諼。聖祖神孫心法授。天經地緯典刑存。休光每護昭回字。元氣長留灝噩言。雲際巋然高閣出。皇宬舊事大朝援。 書香荷月 田田荷葉月蒼茫。書閣微風五夜凉。素影流空通御氣。朱華冐水散天香。金貂班襯𤫩瓏艶。白獸尊翻瀲灧光。不是宸心懷燕樂。靈臺靈沼慕周王。 奎章試士 奎躔新閣欝嵯峨。卽看文章濟濟多。吉士來歸思樹樸。英材振作咏菁莪。漢庭親發賢良策。唐殿時開博學科。誰是鸞鳳珍彩備。煕朝近日禮爲羅。 拂雲觀德 分曹秩秩降登時。匣皷聲傳颺錦旗。蒼檜雲晴遙辨鵠。金莎塵宿正翻麋。明之已審虞臣戒。爭也須思魯聖儀。昭代修文非貫革。心平軆直把弓宜。 皆有梅雪 樓坮極望皓無垠。梅是瑗瑤雪是銀。閶闔光搖元不夜。睘罳香護已先春。黃扇早得調羹手。白屋方推挾纊仁。佇待花時新雨露。恩覃物物與人人。 弄薰楓菊 風物蕭辰霽景澄。禁園楓菊映觚稜。乾坤霜露繁華最。草樹池坮點染能。豹尾中間錢箇箇。螭頭上下錦層層。詞臣不撰悲秋賦。法酒宣來氣色增。 喜雨韶光 岹嶢鳳闕霱雲籠。人在唐天舜日中。藹蔚群生霑化澤。昭蘇萬種扇仁風。星回蒼陸祥光遍。春到靑丘淑氣融。花暖宮城膏雨洽。萬年枝上是先紅。 觀豊秋事 觀豊閣下水田寬。王業先知稼穡難。禹貢篇留香案讀。豳風圖入御屛看。初收白雨鋤謠歇。遍滿黃雲銍響乹。惻怛宸情民事軫。每當玉食未甘餐。 [주-C001] 穚 : 稿[주-D001] 瀲 : 瀲[주-D002] 樹 : 棫[주-D003] 扇 : 扉[주-D004] 辰 : 晨 |
등영주 이십운배율(登瀛洲二十韻排律)을 짓게 하시므로 또한 장원을 차지하였더니, 백면지(白綿紙) 5권(卷)을 하사하셨습니다.
靑莊館全書卷之二十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雅亭遺穚[十二]○應旨各體 登瀛洲七言排律 二十韻○奎章閣八景詩製進日。復命製進。又居首。 丹梯平步上瓊樓。高出秋烟九點州。縹緲神翁劉向閣。逍遙仙侶李膺舟。元知別鏡人間在。却訝靈踪海上遊。中國以東環海澨。三山之一屹瀛洲。珠宮銀闕云誰到。漢士秦童昔未求。掛帆遲回空萬里。褰裳延佇杳千秋。黃河消息開休運。蒼壁精神降勝流。仙李數文鳴大雅。群英接武煥皇猷。靑雲噓送名初藉。白日飛昇境最幽。擲地新聲虞薜輩。掞天逸氣陸顔儔。爭傳視草金鑾直。共羡揮毫畵省留。試看詞臣趨豹尾。還同仙子上鰲頭。晠時儒化於斯盡。前代官名有此不。太液瑗波同碧海。上林珠樹卽丹丘。靑霄漠漠齊騎鶴。紫氣紛紛盡駕牛。化羽東瀛朝玉案。拍肩西掖侍珠旒。三千仙路聯高步。十八淸銜拭衆眸。上界樓坮元不遠。下風冠珮定應羞。人材一代傾山斗。聖曆千年祝海籌。盛事仍令留繪素。閻君玉陛彩毫抽。 [주-C001] 穚 : 稿[주-D001] 鏡 : 境[주-D002] 薜 : 薛 |
누의(螻螘)처럼 천한 신하가 분에 넘친 은총을 받았음을 돌아보매 매우 황감(惶感)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생각 않고 오직 조심하고 공경하고 소심해야 할 처지인데, 문하(門下)께서는 어떠한 훈계를 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기다릴 뿐입니다.
근일의 업무는 《어정규장운서(御定奎章韻瑞)》를 편집 교정하는 것으로 점차 정리는 되어가나 자못 심력(心力)만 허비할 뿐입니다.
물으신바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기자가 중국 땅을 피해 와서 그대로 봉(封)해지게 되었다는 것은 불역지론(不易之論)으로 여기나, 정전(井田)의 구적(舊蹟)이 끝내 의안(疑案)으로 남습니다. 그것은 정전에 대한 기록이 중국 서적에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무(李茂)와 이맹지(李孟智)의 일은 연동(蓮衕)의 이자(李子)에게 물었더니,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상 모든 일은 별지에 적어서 올리겠습니다.
중국 서적 중에 약간 희귀한 것은 문사(文士)가 연경에 들어가서 친히 구입하지 않고서는 원래 구득할 방법이 없습니다. 《통아(通雅)》가 오지 못한 것은 사세가 원래 그렇습니다. 심계(心溪) 종인(宗人)은 근자에 만났는데, 몸에 별탈이 없다고 합디다.
생각건대, 서쪽 못에 있는 연꽃이 한창 만발할 터인데, 형을 따라서 꽃 그림자와 향기 사이에서 노닐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주-D001] 일자사(一字師) : 한 글자를 바로잡아 준 스승.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양만리(楊萬里)가 ‘진우보(晉于寶)’라고 말하매 한 이서(吏胥)가 ‘간보(干寶)이지, 우보가 아니다.’ 하니 양만리는 그 이서를 일자사라 했다.” 하는 것과, 《오대사보(五代史補)》에 “제기(齊己)의 조매시(早梅詩)에 ‘앞마을 쌓인 눈 속에[前村深雪裏] 어젯밤에 두어 가지가 피었다.[昨夜數枝開]’ 하는 수(數)자를 정곡(鄭谷)이 일(一)자로 고쳐주니, 제기는 정곡을 일자사라 했다.” 하는 등이 보인다.[주-D002] 육조(六朝)ㆍ오대(五代) : 육조는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오대는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이다.[주-D003] 남당(南唐) 등 여러 나라 : 오대(五代) 때의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오(吳)ㆍ초(楚)ㆍ민(閩)ㆍ오월(吳越)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ㆍ형남(荊南)과 남당(南唐) 등 10국을 말한다.[주-D004] 서문(序文) : 여기서는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서문을 가리킨다.[주-D005] 도필리(刀筆吏) : 문서를 맡는 하급 관리. 소하는 진(秦)의 도필리에서 발탁된 인물이다.[주-D006] 완물상지(玩物喪志) : 무익한 기물(器物)을 완롱(玩弄)하면 뜻을 상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여오(旅獒), 《근사록(近思錄)》 위학(爲學)에 “명도선생(明道先生)은 기송박식(記誦博識)을 완물상지로 여겼다.” 하였다.[주-D007] 처음 창설된 벼슬 : 여기서는 정조(正祖)가 처음 세운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檢書官)을 가리킨다.[주-D008] 《통아(通雅)》 : 명 나라 방이지(方以智)가 지은 책. 《이아(爾雅)》의 체재를 본떠 44문(門)으로 나누고 명물(名物)ㆍ상수(象數)ㆍ훈고(訓詁)ㆍ음운(音韻) 등을 고증한 것인데, 총 52권으로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1979
靑莊舘全書卷之十九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雅亭遺稿[十一]○書[五]
정조 | 3 | 1779 | 기해 | 乾隆 | 44 | 39 | 6월, 外閣 檢書官이 되다. ○ 7월, 「奎章韻瑞」를 編校하다. 御命으로 〈奎章閣八景七言律詩〉, 〈登瀛洲二十韻排律〉을 製進하여 居首하다. ○ 10월, 承文院 吏文學官을 겸하다. 「資治通鑑綱目」을 懸吐校正하다. |
정조 | 4 | 1780 | 경자 | 乾隆 | 45 | 40 | 1월, 어명으로 「圖書集成」의 部目을 抄出하다. ○ 3월, 「宮園儀」를 교정하다. ○ 11월, 「東方人物考」를 교정하다. |
정조 | 5 | 1781 | 신축 | 乾隆 | 46 | 41 | 1월, 奎章閣 檢書官이 되다. ○ 3월, 司䆃寺 主簿가 되다. 兼檢書官이 되다. ○ 5월, 「八子百選」을 校正하다. ○ 12월, 沙斤道 察訪이 되다. |
정조 | 6 | 1782 | 임인 | 乾隆 | 47 | 42 | 1월, 「國朝寶鑑」을 編校 監印하다. ○ 2월, 합천 가야산을 유람하고 〈伽倻山記〉를 짓다. |
정조 | 7 | 1783 | 계묘 | 乾隆 | 48 | 43 | 5월, 「毛詩講義」를 교정하다. 沙斤道 郵民을 위해 公債의 이자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여 혁파하다. ○ 6월, 智異山을 유람하다. 大廟洞으로 이사하다. ○ 11월, 廣興倉 主簿가 되다. |
金直齋 鍾厚
昔者。兩度下書。鱗次奉讀。至今不任下懷。下詢三代。追贈故實。更考唐文粹 姚絃編。 目錄。無三代制。歐陽公集。亦無之。自王臨川,曾南豊諸集。始有之。意者。三代追贈。始於宋時耶。但歐陽公瀧岡阡表末。記其三代追封甚詳。而自家所作內外制最富。終無一篇。可訝。子瞻所撰。載於本集。元明善所撰。載於元文類。蘇天爵編。 後考文類。亦有姚燧撰高麗國王 忠宣王。 封曾祖父母祖母 祖父不與。 父母制。二代追贈之制。甚多。大抵詳考新書唐書 舊唐書劉昫。新唐書宋祁。 及宋史 阿魯圖等。 然後可知耳。緣起二字。南朝梁任昉著文章緣起。葢記詩賦表牋。百文之所始。緣起猶原始之意。詳記其所之緣也。頃者。猥荷不鄙之惠。仰答下詢。妄改盛撰。至蒙頷可。旣悚且感。不意玆者。又被引譬古人
一字之師。驚恧蹙蹙。不知措躬。紀䄵兒賢二冊。有人願謄寫持去。今始索還。謹樸上爾。
垂詢紀䄵書。漢則東蜀。晉又分東。因其中興之地。各立名號。不害於正統。至若六朝五代。匪敢曰正統。較諸北朝。本是夷狄。南唐諸國。各竊名號者。猶可謂此善於彼。故不得低一字。書之若正統。然而其書殂不書崩之類。可見其筆法。序中靉靆二字。案字書。雲盛皃。亦曰靉霼。卽僾俙。李登聲類。僾音倚。僾俙彷佛也。 又洞天淸錄 宋趙希鵠著。 曰。靉
。張自烈曰。靆。譌作靆。 老人不辨細書。以此掩目則明。又元人小說。靉靆出西域。方輿勝畧。滿剌加國。出靉靆。 又方洲雜志 明張寧著。嘗以詔使來本國。 曰。嘗於指揮胡豅寓所見。其宣廟賜物。如錢大者二絶。似雲母以金相輪郭。而衍之爲柄紐。合則爲一。歧則爲二。老人張于雙目。字明大加倍。又於孫景章所再見景章云。以良馬易得于西域。賈胡滿剌。似聞其名爲僾逮。案此。靉靆之譌。 考此諸說。則借雲之僾俙。爲眼鏡之名。而自宋元已有之。但不盛行。故明宣宗時。易以良馬。今則人人用之矣。垂詢五雜組。蕭何工篆。案漢許愼說文序云。秦書有八軆。六曰署書。注蕭子良云。署書。漢高六䄵。蕭何所定。以題蒼龍白虎二闕。又晉羊欣筆陳圖云。蕭何深善筆理。嘗與張子房,陳隱等。論用筆之道。何爲前殿。覃思三月。以題其頟。觀者如流水。何便用禿筆。金壺記云。何業蒃籀時人。謂之蕭籀。 又漢書藝文志曰。何草律著法曰。太史試學童。能諷九千字以上。乃得爲史。又以六軆試之課。最者以爲尙書御史史書令史。吏民上書字。或不正。輒擧劾。歷檢諸說。則何爲漢初書家之領袖。且立法試人。以書學。爲初仕之路。眞不害。爲經世儒者。作事不苟。不可以刀筆掩其長。但手蹟不見。故後世不知耳。如諸葛武矦父子。謝安,司馬溫公,王介甫,朱文公。皆工丹靑。而掩於功業文學。人自不知。大抵世間。如此事者。不知幾何。猥承盛問。畢陳所聞見。自不覺其蕃蕪。亦犯古人玩物之戒。還增惶蹙。不知攸爲。
前月穫叨刱設之官。爰補菽水之供。其爲榮悅至矣。近日應製奎章閣八景詩。入侍幄殿。居魁。御賜明義錄。又命製登瀛洲二十韻排律。亦復居魁。命賜白綿紙五卷。顧以螻螘賤臣。寵渥踰分。惶感之極。不知攸措。第當兢兢翼翼。小心無他。而不識門下有何加勉之規誨耶。恭竢而已。近日職業則編校御定奎章韻瑞。漸就頭緖。頗費心力耳。俯詢箕聖東來之事。愚見斷然以避地而來。因以封之。爲不易之論。而井田舊蹟。終涉疑案。以其不少槩見於中國書籍故也。李茂,李孟智事。問諸蓮衕李子。或知或不知。已上諸般。開列他紙以呈耳。中國書籍之稍稀貴者。除非文士入燕親購。則元無可得之理。通雅之不來。勢固然也。心溪宗人。近又相逢。能得無𧏮云。西池菡萏。想尤發萼。恨不追隨杖屨。以燕以遨於澹影寒馨之間也。
[주-D001] 瀧 : 隴[주-D002] 書 : 舊[주-D003] 靆 :
[주-D004] 畧 : 覽[주-D005] 蒃 : 篆[주-D006] 穫 : 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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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湛軒書) 홍대용(洪大容)생년1731년(영조 7)몰년1783년(정조 7)자덕보(德保)호담헌(湛軒), 홍지(弘之)본관남양(南陽)특기사항김원행(金元行)의 문인.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황윤석(黃胤錫) 등과 교유. 조선 후기 과학사상가(科學思想家)
湛軒書內集卷三 南陽洪大容德保著五代孫榮善編後學洪命憙校 / 書 / 與金直齋鍾厚書
頃因內兄。承聞座下以容之入燕時與杭人輩交歡。大加非責。此實容之見識所未到也。恨不早求敎於行前。爲此成事之勿說也。雖然。反以繹之於心。終不得其說焉。則因此而求敎。得開其蒙蔽可乎。彼杭人輩當衣冠淪喪之世。爲鄕貢計偕之行。其非第一等人則明矣。雖然。君子之與人。亦各有取焉爾。豈曾專在於第一等而其第二等以下一切鄙之不與哉。此陳仲子之不能充其操也。且彼人輩其情實有可哀。其事實有可恕。則愚亦略有說焉。盖其斷髮胡服。降志辱身。泯然爲左袵之俗。則彼肆然挾天子之威。設法以拘之。已百有餘年矣。當今之時。雖有聖賢豪傑之士。亦不必突然行古之道而輕觸時禁以受闔族之禍也。然則其生丁不辰。形格勢禁。忍痛含寃。盖有迫不得已者。仁人君子宜其衋然傷心。若恫在己。寧復因此而擯棄之夷狄之。不少顧惜哉。若其治擧業干仕進。則聖賢豪傑之士。固不應爲此。雖然。聖賢豪傑。豈可人人而責之耶。夫季氏。逐君之亂臣也。衛輒。拒父之賊子也。此二者其諸夏之不如夷狄。亦遠甚矣。乃以德行之仲弓。升堂之子路。皆奔走服事。不以爲耻。亦未聞二子之以此不見容於聖門。豈非以君子之與人。各有取焉。而聖賢豪傑。不可人人而責之耶。且春秋之世。歷聘諸國。進身多門。爲仕者可以擇其君矣。可以量而入矣。然而二子之仕若是之不審。則况今時之中國也。不立於其朝。則草莾而已矣。且康煕以後與民休息。治道簡儉。有足以鎭服一時。其耳目習熟。安若故常。百有餘年。則華人之不能引義自廢。奔馳於車弓之招者。亦不必深責也。若以此直歸之滿旗猳㺚而不齒於周餘故家之裔。則此豈仁人君子之用心耶。若以其不思明朝。爲非忠且義。則天下之革代。自古然矣。君子之澤。亦五世而斬矣。欲其沒世之思。不衰於百年之後。則此人情之必不能而天理之必不然也。至若衣冠之變。則愚夫皆能言之。往往見我輩服着。稱以明朝舊制而頗有愧恨之色。而或提天啓事。只憤惋不平而止。盖由當塲相對而伊髮左袵之爲羞。有甚於熟習已久而殷膚祼將之至痛也。語次問李明睿詹兆恒等事。皆垂頭無語。時勢所拘。首尾有畏。無恠其然矣。且彼忘中華之貴。屈才藝之敏。不憚與海上陋夷如鄙人者。開心見誠。歡然如舊識。則此其器量之弘達。氣味之脫灑。亦有可取焉已。此所以一往一來。傾倒綢繆。不自以爲非也。及聞座下之論。不覺爽然而自失。玆略陳鄙見。仰質高明。幸須詳敎之。其問答書牘。略有記出而過半遺忘。無甚可觀。且座下旣以其交際爲非。則固不敢益露其醜而重得罪於尙論之下。奉呵。
直齋答書
頃與族叔。妄論足下客虜時事。不覺其言之過甚。正用悚息。乃蒙洪度包容而從以牖曉備至。思欲疏破滯塞。偕之大道。甚盛意也。其又何敢自外不盡言以求卒敎耶。僕於前冬病中。奉一書送足下之行。只擧腥穢讐域云云而不復及持己接物之方。則僕有罪焉。然亦惟恃足下之於是行也。必能深存忍痛含怨之意。惟衛父兄廣見聞以外。凡有毫毛干醜虜事者。若無覩耳。且自謂腥穢讐域之語。雖甚寂寥。亦足爲警動足下之心也。及聞其與剃頭擧子結交如兄弟。至無所不與語。則不覺驚歎失圖而未暇究其精微。今因來諭而繹思之。則有可復者。夫所謂第一等人。是何如人也。而足下乃以擬議可否於奔走求事胡虜之徒耶。足下不見朱子所謂第一等人定不應科擧者乎。朱子之論第一等人。在於平常時節不應擧者。而足下之論第一等人。乃在於不應虜擧。夫不應虜擧。固賢矣。然豈得以是而遽爲第一等人哉。第一等人。自有事在正心修身。學爲聖賢。第一等人也。抗志物表。不累私慾。第一等人也。若其只能不應虜擧而心未正身未修慾未祛。則不害爲第二第三等人也。得此等人而與之。亦豈至爲陳仲子而必求其應虜擧者與之然後爲不責人以第一等而合乎中正之道哉。且足下不責彼以第一等人而僕之期足下。則未嘗在第二三等之下。此所以不能無言也。來喩觸禁受禍云云。僕未嘗有此見也。至引仲弓,子路之從季氏衛輒。則何足下之易其言也。仲弓而能諭季氏以尊君。子路而能不與於輒之拒父。則顧何罪哉。二子之失。在於不能喩與不能不與耳。足下與彼人爲知己。是果能喩虜隆以遜避天位求中國人而奉之者乎。不然而欲與仲弓,子路同論。則豈其平哉。且足下非好讀易者乎。坤之六五。程子傳之曰。臣居尊位。猶可言也。婦居尊位。非常之變。不可言也。廢興常也。以陰居尊位。變也。夫以帝后之居尊而謂之甚於臣子之簒逆。惡其陰也。女子人也。猶以其陰也而惡之。而况於夷狄之非人。其爲陰又何如也。今足下乃執仲弓,子路之仕於亂臣賊子而欲以律諸求事胡虜之義。至謂諸夏之不如夷狄。則彼求事胡虜者。非惟不害爲第二等人。且將突過仲弓,子路以上矣。仲弓,子路。大賢也。突過大賢以上。則便不啻第一等矣。何復欿然以爲非第一等人耶。足下之讀易。其亦異於程子矣。且孔孟言語有許多。而足下乃獨拈陳仲子與諸夏不如夷狄二端爲言。而實不知孔子孟子之語非爲資於如足下今日之論者也。亦未可謂善讀論孟也。若彼之不思明朝。僕亦未嘗以爲罪也。來諭欲其沒世之思不衰於百年之後。人情天理之必不能然者。此誠然矣。顧陋意以爲此當以言於三代若漢唐之革易而不可以言於明朝也。豈明朝之獨可思哉。所思者在乎明朝後無中國耳。故僕非責彼之不思明朝而責其不思中國耳。若其愧恨衣冠則亦末也。而聞其輸肝剖膽於足下也。殊無痛傷中國淪亡之意。則亦不可謂有秉彜之心者也。至於來諭忘中華之貴以下數語。僕雖奊詬。誠不欲掛諸齒牙而上下其論也。嗟乎。所貴乎中華者。爲其居耶。爲其世耶。以居則虜隆亦然矣。以世則吳楚蠻戎。鮮有非聖賢之後者矣。足下之高仰彼人以爲貴者。果何在也。如僕者。寧甘爲東夷之賤而不願爲彼之貴也。論彼人則已矣。來書直寫出康煕以後與民休息鎭服一時云云語。則惜乎駟不及筆也。以我之沐浴大明。誦服孝廟尤翁也而其於公私文簿。雖不得已而寫虜號。又何忍筆之書尺。堂堂如萬曆崇禎之類哉。况其稱揚政化。儼然與成康文景同貫而若無靳之之意。若此不已。幾何不爲康煕公也。僕讀之及此。不覺戚戚動心而足下書之甚快。足下之有得於新交之弘達脫灑也。於是驗矣。宜乎非海上陋夷之所能與也。嗟呼痛矣。宇宙以來廢興無常。而夷狄之攘中國。亦多有矣。然未有若今時之久。至使中國聖賢之遺裔。亦皆熟習安恬。不復知有華夷之辨者。此志士仁人所以愈益憤痛。無樂乎生者也。乃足下則以彼之久而安也而爲之游說如此。是果何如也。噫。吾輩去孝廟尤翁之世不可謂甚遠。而時義人心。不啻若天壤之截而乃復以如此言語行乎其間。則漸遠漸久之後。又當作何如摸㨾也。足下盍亦深思之哉。僕性不能有隱。且感足下辱敎之勤。吐露至此而心有所觸激。語必不中。幸以奉質於渼湖丈席。則不敢不安受裁正也。如何如何。所與彼人問答。似聞傳示頗廣。不宜獨秘於僕。然足下若以其妄有指論而不肯示。則僕亦不必固請也。然若足下憂患得平。則終無意一顧荒陋耶。野外秋事日殷。不能不益思高人。况病者多懷耶。餘不備。
내집 3권 / 서(書)
김 직재 종후에게 주는 편지[與金直齋鍾厚書]
먼저번 내형(內兄) 편에 들건대, ‘좌하(座下)가,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항주(杭州 중국지명) 사람들과 더불어 사귄 것을 큰 잘못으로 여긴다.’ 하니, 이것은 나의 식견으로는 참으로 깨닫지 못했소. 내가 연경으로 떠나기 전에,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좌하에게 말하지 말아 주시오.’ 하고 미리 부탁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비록 그러하나 나는 마음에 돌이켜서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좌하의 말씀이 끝내 납득이 되지 않소.
그러므로 이 기회에 가르침을 받아서 나의 어두운 소견을 트게 하는 것이 옳은 줄 생각하오. 저 항주 사람들은 의관 문물이 없어진 세상을 만났는데도 향공(鄕貢 지방 장관이 추천하는 것)으로 행세하려 하니, 그들이 제일등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오. 비록 그러나 군자가 사람을 사귐은 또한 각각 취하는 점이 있는 것이오. 그런데 어찌 오로지 제일등의 사람만 사귀고 그 제이 등 이하의 사람은 모두 더럽게 여기고 사귀지 않겠소. 이것은 진중자(陳仲子)로서도 그 절조를 채울 수 없는 것이오. 또한 그 사람들에게는 정상이 참으로 슬프고, 하는 일이 참으로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는 것도 나는 대강 이야기 하겠소.
대개 그들은 머리를 자르고 호복(胡服)을 입는 등, 뜻을 굽히고 몸을 더럽히면서 오랑캐 풍속을 따르는데, 저들(청 나라)이 제멋대로 천자의 위엄을 가지고 법으로 구박한 지 이미 백여 년이 넘었소, 오늘날을 당해서는 비록 성현과 호걸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또한 갑자기 옛 도(道)를 행하려고 경솔히 법에 저촉되는 짓을 해서 온 집안이 멸망하는 화는 반드시 받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들은 불행한 때에 태어나서 세력으로 강금하는 난국을 당했으므로 슬픔과 억울함을 참아야 함은 대개 어쩔 수 없는 때문이오. 어진 군자로서는 마땅히 그들에 대해 슬피 여기는 마음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런 것을 이유로 하여 배척하고 오랑캐로 여기며 조금도 돌봐 주거나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거업(擧業 과거공부)을 다스려 벼슬을 구하는 일은 성현과 호걸들은 진실로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성현과 호걸이 하는 일도 어찌 사람마다 다 할 수 있겠소?
대저 계씨(季氏)는 임금을 쫓아낸 난신(亂臣)이었고, 위첩(衛輒)은 아비를 거역한 적자(賊子)였으니, 이 두 인물은 중국 사람으로서 오랑캐만도 못했던 것이오. 그러나 덕행이 뛰어난 중궁(仲弓)이나, 학문이 초월했던 자로(子路)로서도 모두 계씨와 위첩 같은 자를 섬기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소. 또한 이 두 사람은 이로써 성문(聖門)에서도 배척함을 받지 않았으니, 군자가 사람을 사귐에는 각각 취하는 점이 있고, 성현과 호걸이 하는 일에는 사람마다 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아니겠소? 또한 춘추 시대(春秋時代)에는 모든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벼슬하게 되었으므로 출세할 길이 많았으니, 벼슬할 자는 임금을 가릴 수도 있었고, 상황을 헤아려서 들어 갈 수도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처럼 벼슬할 길을 살피지 못했던 것인데, 더구나 오늘날의 중국은 그 조정에 서지 않으면 초야(草野)에 묻혀 있을 뿐임에랴?
또 강희(康熙) 이후로는 백성과 더불어 편히 쉬면서 다스리는 도(道)를 간단하게 함으로써 한 시대를 진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었소. 그러므로 듣고 보는 것이 익숙해져서 옛날처럼 편케 여긴 지가 백 년이 넘었으니, 중국 본토 사람으로서 스스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높은 벼슬로 초빙하면 달려갔던 자를 깊이 꾸짖을 필요는 없는 것이오. 만약 이런 까닭으로 하여 곧 만기 가달(滿旗猳㺚)에 귀속시키고 중국 본토 사람으로 인증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찌 어진 군자의 용심(用心)이라 하겠소? 그리고 그들이 명 나라 조정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충성과 의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천하의 세대가 바꿔짐은 옛부터 그러했고, 군자의 은택도 또한 다섯 세대를 지나면 다해지는 것이오. 그러므로 옛 임금의 생각을 세상이 바뀐 후에도 없어지지 않도륵 하는 것은 곧 인정으로도 반드시 할 수 없고 천리로도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이오,
그리고 의관(衣冠)의 변함에 이르러서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모두 화제를 삼을 뿐더러 가끔 우리의 옷차림을 보고 명 나라 옛 제도라 일컬으면서 부끄럽게 여기는 기색이 있었고, 간혹 천계(天啓) 연간의 일을 언급할 때에는 다만 울분과 불평을 털어놓을 뿐이었소. 이것은 내가 직접 상대해 본 결과 그들은 오랑캐가 된 부끄러움을 마치, 은(殷) 나라 신하가 주(周) 나라 종묘에 제사 지내는 것처럼 나라 망한 슬픔보다 더 심하게 여기고 있소. 이야기하든 끝에 이명예(李名睿) 와 첨조항(詹兆恒)의 일을 물었더니, 모두 머리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소. 이것은 그 사실이 시국에 꺼림을 받는 것이므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니, 괴이쩍게 여길 것이 없었소. 또 그들은 중국이 귀하다는 것도 잊었고 재주가 뛰어났다는 것도 굽혀서 나같은 비루한 자와 더불어 흉금을 열어 놓고 마음껏 즐기기를 마치 옛 친구처럼 하였소. 이것만 보아서도 그 넓은 기량(器量)과 시원스러운 기미(氣味)를 또한 취할 점이 있다는 것이었소. 이러므로 한 번 가기도 하고 한 번 오기도 하여 마음을 기울여서 주밀하게 지냈으나 이것을 나는 잘못으로 여기지는 않았소. 그런데 지금 좌하의 의논을 들으니, 멍해서 스스로 맥이 빠짐을 깨닫지 못하겠소. 이상과 같은 나의 소견을 대강 아뢰고 고명한 가르침을 바라오니, 자세히 바로잡아 주시면 다행이겠소.
그들과 문답한 편지는 대강 기록한 것이 있으나 반쯤 잊었으니, 매우 볼 만한 것이 없을 뿐더러 또한 좌하가 이미 그들과 교제한 것은 잘못이라 했으니, 감히 그 더러움을 더욱 드러내서 좌하에게 거듭 죄를 지을 필요는 없지 않소? 우습소.
[주-D001] 진중자(陳仲子) : 《맹자》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전국 시대에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음.[주-D002] 계씨(季氏) : 노(魯) 나라 계손씨(季孫氏)를 말함.[주-D003] 위첩(衛輒) : 위(衛) 나라 출공(出公)의 이름.[주-D004] 중궁(仲弓) : 공자 제자인 염옹(冉雍)의 자.[주-D005] 자로(子路) : 이름은 유(由). 공자의 제자.[주-D006] 강희(康熙) : 청 나라 성조(聖祖)의 연호.[주-D007] 이명예(李名睿)와 첨조항(詹兆恒) : 이명예는 미상의 인물, 첨조항은 명 나라 사람, 자는 월여(月如).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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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예(李名睿)와 첨조항(詹兆恒) : 이명예는 미상의 인물, 첨조항은 명 나라 사람, 자는 월여(月如).->이명예(李名睿)는 李明睿의 오자. 李明睿(1585年-1671年),字太虚,江西南昌人,明末清初著名的诗人、史学家、社会活动家。
万历十三年(1585年)江西南昌出生,天启年间进士,李邦华、吕大器推荐,任“左中允”。崇祯十七年(1644年)正月初三,李明睿劝崇祯放弃北京,尽快南迁,皇帝告诉他:“汝意与朕合,但外边诸臣不从,奈何?”。李明睿说:“天命微密,当内断圣心,勿致噬脐之忧。”并请崇祯勿犹豫,尽快决断。崇祯一直有意迁都,三月初四日,崇祯对众臣说:“李明睿有疏劝朕南迁。国君死于社稷,朕将何往?又功朕教太子先往南京,诸卿以为如何?”陈演反对“南迁”,并示意兵科给事中光时亨,严厉谴责李明睿,扬言:“不杀李明睿,不足以安定民心。不杀李明睿,何以治天下!”明亡后,蓄养多妓,有八面观音和四面观音,后为给事高安所得,以奉吴三桂。康熙十年(1671年),与吴伟业同年去世。
詹兆恒(公元1613年—公元1646年),字月如(《南疆绎史》勘本卷二十九为詹兆恒字仲常,号月如),江西永丰(今上饶广丰)人。明崇祯四年(公元1631年)进士,南京御史。南明福王立,擢大理寺丞、少卿。唐王朱聿键立,拜为兵部左侍郎,协助黄道周防守广信。广信府失守,詹兆恒率部据守怀玉山(在今江西玉山县北)抗清,后又出兵进攻衢州的开化县,明朝叛将李荣迎战,战于马岭,詹兆恒兵败阵亡。后清朝廷有感于他的忠义,特赐谥号“忠烈”。
보충설명하여 각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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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睿(1585年-1671年),字太虚,江西南昌人,明末清初著名的诗人、史学家、社会活动家。
万历十三年(1585年)江西南昌出生,天启年间进士,李邦华、吕大器推荐,任“左中允”。崇祯十七年(1644年)正月初三,李明睿劝崇祯放弃北京,尽快南迁,皇帝告诉他:“汝意与朕合,但外边诸臣不从,奈何?”。李明睿说:“天命微密,当内断圣心,勿致噬脐之忧。”并请崇祯勿犹豫,尽快决断。崇祯一直有意迁都,三月初四日,崇祯对众臣说:“李明睿有疏劝朕南迁。国君死于社稷,朕将何往?又功朕教太子先往南京,诸卿以为如何?”陈演反对“南迁”,并示意兵科给事中光时亨,严厉谴责李明睿,扬言:“不杀李明睿,不足以安定民心。不杀李明睿,何以治天下!”明亡后,蓄养多妓,有八面观音和四面观音,后为给事高安所得,以奉吴三桂。康熙十年(1671年),与吴伟业同年去世。
詹兆恒(公元1613年—公元1646年),字月如(《南疆绎史》勘本卷二十九为詹兆恒字仲常,号月如),江西永丰(今上饶广丰)人。明崇祯四年(公元1631年)进士,南京御史。南明福王立,擢大理寺丞、少卿。唐王朱聿键立,拜为兵部左侍郎,协助黄道周防守广信。广信府失守,詹兆恒率部据守怀玉山(在今江西玉山县北)抗清,后又出兵进攻衢州的开化县,明朝叛将李荣迎战,战于马岭,詹兆恒兵败阵亡。后清朝廷有感于他的忠义,特赐谥号“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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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3권 / 서(書) / 직재의 답서[直齋答書]
먼저번 족숙(族叔)과 더불어 족하(足下)가 연경(燕京)으로 떠날 때의 일을 망령스럽게 논했는데, 부지중에 그 말이 너무 지나쳤으므로 죄송스럽게 여겼더니, 이에 넓은 도량으로 감싸주고, 따라서 깨우쳐 줌으로 나의 막힌 소견을 소통시켜서 큰 도(道)를 함께 하고자 하니, 매우 훌륭한 뜻이었소. 그런데 어찌 감히 스스로 할 말을 다해서 끝내 가르쳐 주심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작년 겨울 병석(病席)에서 족하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는데, 다만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나라 …… ’라는 말을 했을 뿐, 몸을 가짐과 남을 접촉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나의 죄이오. 그러나 나는 일단 족하가 연경에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통분함을 참고 원망스러움을 견디는 뜻을 깊이 간직하고 오직 부형(父兄)을 높이고 문견을 넓히는 이외의 오랑캐의 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못 본 체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소. 또 나는 스스로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나라다.’고 한 것은 비록 부질없는 말이었다 할지라도 역시 족하의 마음을 깨우쳐 줄 수는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였소. 그런데 듣자니, 족하가 머리 깎은 거자(擧子)들과 더불어 형제처럼 사귀고 못할 말 없이 다했다 하므로, 나는 나도 모르게 전일의 잘못 생각을 경탄(驚嘆)하고 그 정미(精微)한 점은 궁구할 겨를조차 없었다오. 이제 보내온 편지를 받고 여러 번 생각하니, 다시 변론할 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제1등인’이란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데, 족하가 저 오랑캐에게 쫓아다니며 섬기기를 구하는 무리에게 가부를 따지려는 것이었소. 족하는 주자(朱子)가 이른바, ‘제1등인’이란 과거(科擧)에 응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지 못하였소. 주자가 논한 ‘제 1등인’이란 평상시에 있어서도 과거에 응하지 않는 자인데, 족하가 논한 ‘제 1등인’이란 오랑캐의 과거에만 응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오. 대저 오랑캐의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어질다 할 수는 있겠으나 어찌 이로써 갑자기 제1등인이 된다고야 할 수 있겠소? 제1등인이란 스스로 등분이 있는 것이니,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서 성현(聖賢)을 배우는 것이 제1등인이고, 사물의 밖에 뜻을 두어서 사사 욕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제1등인이오. 그러므로 오랑캐의 과거에는 능히 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을 바루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사사 욕심도 버리지 못한다면, 제2, 제3등인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 사귄다면 또한 어찌 진중자(陳仲子)일지라도 반드시 오랑캐에게 과거한 자를 구해서 사귄 다음에는 그 사람에게 제1등인으로 여겨서 중정(中正)한 도(道)에 알맞게 함을 책임지우지 아니함에 이르겠소? 그런데 또한 족하는 그들에게 제1등인으로 책임지우지 못하였고, 족하는 일찍이 제2, 제3등 이하에 있지 않음을 기대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겠소.
보내온 편지에, ‘법에 저촉되고 화를 받는다. …… ’ 했으나, 나는 일찍이 이런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오. 그리고 심지어 ‘중궁(仲弓)과 자로(子路)가 계씨(季氏)와 위첩(衛輒)을 섬겼다.’는 것을 인증하는데, 족하는 왜 그렇게 말을 쉽게 하오? 중궁은 계씨에게 임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고, 자로도 위첩이 아비를 거역한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허물이 있었겠소? 이 두 사람의 잘못은, 깨우치지 못함과 참여했던 것에 있을 뿐이오. 지금 족하는 저들과 더불어 친구로 여긴다 하니, 과연 노륭(虜隆)에게, 천자의 위(位)에 물러나서 중국 사람을 받들라고 깨우칠 수 있겠소? 그렇게 못하면서 그들을 중궁ㆍ자로와 더불어 동일하게 논하니, 어찌 그 의논이 공정하겠소? 또한 족하는 주역(周易)을 즐겨 읽던 자가 아니오? 곤괘(坤卦) 육오효(六五爻) 정자(程子)의 전(傳)에, ‘신하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오히려 말할 수 있거니와, 아내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비상한 변고(變故)이므로 말할 수 없다.’ 하였소. 한번 망하고 한번 흥하는 것은 떳떳한 이치일지라도 음(陰)으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변고인 것이오.
대저 ‘왕비[帝后]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신하로서 찬역(簒逆)하는 죄보다 더 심하다.’ 한 것은 그 음(陰)을 밉게 여기는 때문이오. 여자도 사람이건만 오히려 그 음이라는 것으로써 미워하는데, 더구나 이적(夷狄)은 사람답지 못하니, 그 음(陰)을 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소. 이제 족하는 중궁과 자로가 난신(亂臣) 적자(賊子)에게 벼슬했다 하여 오랑캐 섬기는 저들과 더불어 허물을 같이 하고자 하며, 심지어 중국이 이적만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저 오랑캐 섬기는 자는 오직 제2등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중궁과 자로 이상으로 뛰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궁과 자로는 대현(大賢)이었는데, 대현 이상으로 뛰어난다면 제1등인이 되는 것인데, 어찌 다시 부족하게 여겨서 제1등인이 아니라 하오?
족하의 주역 읽은 것도 또한 정자(程子)와 다르게 되었소. 또 공자와 맹자의 말씀이 허다하게 있는데, 족하는 맹자가 말한 진중자(陳仲子)와 또 공자가 말한 중국이 이적만 같지 않다는 두 가지만 끄집어 내어 말하였소. 그러나 실상 공자와 맹자의 말은 족하의 오늘날 의론에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또한 논어(論語)와 맹자도 잘 읽었다 할 수 없겠소. 저들이 명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나도 또한 일찍이 허물하지 않았소.
보내온 편지에, ‘세대가 바뀐 후에도 옛 임금 생각이 가셔지지 않도록 하려 함은 인정(人情)이건 천리(天理)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진실로 그렇소.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이것으로써 삼대(三代)와 한당(漢唐) 때의 혁명(革命)으로 말한다면 당연하다 하거니와, 명 나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오.
어찌 명 나라만 생각하겠소? 명 나라 후에 중국이 없어짐을 생각하는 것이오. 그래서 나는 저들이 명 나라를 생각하지 않음을 꾸짖는 것이 아니요, 중국을 생각하지 않음을 꾸짖을 뿐이오. 그들이 의복 차림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또한 말단에 불과한 일인데, 족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중국이 없어진 것을 슬피 여기는 뜻이 없었다면 타고난 떳떳한 마음이 있다 할 수 없을 것이오. 또한 족하가 말한 ‘저들이 중화(中華)의 귀함은 잊고 서로 이야기하였다.’라는 이하의 몇 귀절 말에 이르러서는 내가 비록 분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의론에 대해서는 진실로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는 것이오. 아아! 중화를 귀히 여기는 것은 그 거지(居地)를 위함인가? 그 세대를 위함인가? 거지로 말한다면 노륭(虜隆)도 또한 마찬가지요, 세대로 말한다면 오초(吳楚)와 만융(蠻戎)도 성현의 후예가 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오. 족하가 저들을 높이 우러러보고 귀히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오? 나 같은 자는 차라리 동이(東夷)의 천함을 달게 여길지언정 저들의 귀함은 원치 않소. 저들에 대한 의논은 그만두겠소.
족하의 편지에 쓰인 ‘강희(康熙) 이후로는 백성과 더불어 편히 쉬면서 한 시대를 진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었다. ……’ 라는 말은 천리마(千里馬)도 혀끝을 따르지 못하겠으므로 애석할 뿐이오.
우리가 명 나라를 위해 복수할 뜻으로 효종을 힘껏 섬긴 분은 우암이었소. 그 당시 공사간 문부(文簿)에는 하는 수 없이 오랑캐의 연호를 썼다 할지라도 어찌 당당한 만력(萬曆)ㆍ숭정(崇禎)의 유와 같이 차마 편지에 쓸 수 있겠소? 더구나 그들의 정치와 교화를 일컫는데 있어서도 엄연히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일과 동일하게 여기고 조금도 부끄러워한 뜻이 없었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얼마 후에는 강희공(康熙公)이 되지 않겠소. 내가 족하의 편지를 읽다가 이 말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슬픈 마음이 격동하였소. 그런데 족하는 이런 말을 아주 유쾌하게 썼으니, 새로 사귄 활달하고 깨끗한 저들에게 족하가 얻음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 징험하겠소. ‘바다 위에 있는 비루한 동이로서는 능히 사귈 수 없다는 말은 당연하겠소.
아아! 우주(宇宙)가 생긴 이후로 망하고 흥함은 일정하지 않으므로 이적이 중국을 혼란시킬 때도 또한 많이 있었으나 오늘날처럼 오랜 적은 있지 않았소. 중국 성현의 후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풍속을 따라 익숙해지고 마음에 편케 여겨, 중화와 이적의 분변이 있는 줄도 다시는 알지 못하게 되었소. 이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으로서는 더욱 통분히 여기고 삶을 낙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그런데 족하는 저들의 오래되고 안정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이와 같은 유세(遊說)를 하니, 이것이 과연 마음에 편안하오?
아아, 우리 무리는 효종ㆍ우암의 시대가 매우 멀다 할 수 없고, 시의(時義)와 인심도 전지처럼 동떨어지지 않았는데, 이같은 말이 그 중간에 행해진다면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오래된 다음에는 또 무슨 모양으로 되겠소? 족하는 이것을 왜 깊이 생각지 않소? 나는 타고난 천성이 말을 참지 못하고, 또 족하의 성실한 가르침에 감동되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이같이 숨김없이 털어놓는 바이오. 분격되어 한 말은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 곳이 있을 것이오. 이 편지를 미호장석(渼湖丈席)에게 올려서 바로잡아 주면 그 재가(裁可)를 안심하고 받겠소. 어떻게 생각하오?
저들과 더불어 문답한 기록은 널리 전해 보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홀로 나에게만 숨긴다는 것은 타당치 않을 것이오. 그러나 족하가 만약 나의 지적이 있을까 꺼려해서 보이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도 또한 굳이 청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족하는 환후(患候)가 쾌히 나은 다음에도 끝내 한번 찾아올 생각이 없겠소? 시골에 가을 일이 거의 되어가매, 족하의 생각이 더욱 간절한데, 하물며 병든 자의 많은 회포에 있어서이겠소. 남은 말은 다 갖추지 못하오.
[주-D001] 연경(燕京) : 중국 북경(北京)의 별칭.[주-D002] 노륭(虜隆) : 청 나라 임금을 칭함.[주-D003] 만력(萬曆) : 명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주-D004] 숭정(崇禎) : 명 나라 의종(懿宗)의 연호.[주-D005] 성왕(成王) : 주 나라 제3대(代)의 임금. 이름은 송(誦).[주-D006] 강왕(康王) : 성왕(成王)의 아들. 이름은 소(釗).[주-D007] 문제(文帝) : 전한(前漢) 제5대의 임금. 이름은 항(恒).[주-D008] 경제(景帝) : 이름은 계(啓). 한 문제(漢文帝)의 아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