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조영관문학창작기금
보수동 골목
박은영
절판된 길을 읽습니다.
읽다가 접어놓은 흔적으로 두툼한 한권
로맨스소설이고 싶었으나
그의 생은 고딕체
딱딱한 문장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최초의 독자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죠
한 단락 안에서 줄거리 없이 살다
장문의 봄,
별이 되어 각주로 매달렸다죠
겉장의 시대를 지우고 수명을 다한 날들이
좁은 장지에 몸을 뉩니다
변하지 않는 자세로 바닥에 깔린 역사서
구겨진 가슴이 기운 세계를 받치고 있습니다.
부록 같은 자식은 곁을 떠나고 없지만
책장 어디쯤 민들레 피어 있을
저 두꺼운 몸을 빼내면
지구 한귀퉁이가 무너져버릴지도
양장의 날개를 펼친 책들이 페이지를 벗어나
어느 문맹의 별을 반짝일지도 모릅니다
어깨 접힌 골목에 밑줄을 긋는
저녁의 행간
늙은 개척자의 목차에서 길을 찾던 바람이
한장, 보수동을 넘깁니다.
수혜소감 / 박은영
얼큰한 라면이 당기는 날이다. 스프를 손바닥에 덜어 핥아먹어도 맵지 않을 것 같다. 종일 글을 쓰고 기진맥진 쓰러진 저녁, 당선 연락을 받았다.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무릎을 꿇고 꺽꺽 울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혼자, 캄캄한 굴을 걷던 중이었다. 까맣게 탄 철판을 닦거나 시간제 보육 일을 하며 받은 최저임금으로 성냥을 사곤 했는데, 횃불을 건네받은 기분이다. 상상하지도 못한 밝은 빛이라 눈이 시큰거릴 정도다.
나는 태생이 흙이다. 그래서 두더지처럼 생을 파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만큼이면 다 왔겠지, 손톱에 낀 흙을 빼내고 고개를 들면 여전히 막장이라 막막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질투도 했고 공연히 연필을 부러뜨리기도 하였다. 십 년 넘게 반 지하와 옥탑을 오가며 출구 없는 길을 걸었다. 지금은 구멍가게 없는 시골 골짜기에서 흙투성이 시를 쓰고 있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나는 시가 황소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믿는다.’ 이 문장을 습작시절부터 기도문처럼 되뇐 까닭이다.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운영위원회, 노동자시인 조영관추모사업회 관계자분들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한 마음 전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흙 묻은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또한 ‘시를 겁나게 잘 아는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남긴다. 정직한 땀으로 종이를 적시는 시인이 되겠다. 훗날, 내 이름 석 자를 내건 시집이 나온다면 책장 어딘가에서 곰장어 타는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