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조 성 돈
봄빛보다 더 곱게 칠하고
끝없이 내달리는 빛의 바다에
풍덩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지
펼쳐지는 지평선 따라가는 마음
황금 펜으로 줄그어도 좋겠다
제아무리 곱다란 꽃일지라도
환상의 오묘한 빛 발산하는
단풍나무 숲의 화사한 속내
훔치지만 흉내 낼 수 없겠다
절정으로 깊어가는 계절
가을산 닮고픈 수많은 사람들
형형색색 알록이로 갈아입은
긴 허리띠 만들어도 괜찮겠다
설레는 새색시의 봄빛 자라나
인생의 참맛으로 사루는 인고
이글하게 시로 물들인 노을빛이다
완숙미 넘치는 여자의 빛깔이다
대숲이 불가에 들다
절집 담장 너머
섣달도 잊은 듯 늘 푸른 댓잎
신선한 품으로 깃드는 텃새들
숲과 어우러져 봄 동산의 일상처럼
재재거리는 소리 종일 한가롭다
일제히 차렷 공부하는 자세
주지스님의 독경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 맑히는 목탁소리와 친숙하다
청정도량 복 짓는 소리 향기롭고
사부대중의 경 읽는 소리 장엄하여
청량한 음성으로 새살거린다
오직 한 길 향해
고집스럽게 뻗어나가는 곧은 성품
마디마디 그어놓은 세월의 흔적 농익어
매서운 바람의 휘몰이 장단에
미묘한 법문을 굴린다
대숲이 경전을 읽는다
부부
꽃 웃음 피는 맑은 날이면 곱다가도
티격태격 궂은 일 생기면 미워지는
보이면 성가시고 안보이면 그리워지는
곁에 있어주면 내 몰라라 무심하고
빈자리 허전하면 궁금증에 마음 앓는
다른 개성이 얽히고설킨 숙명적 인연
베어내려 해도 베어지지 않는 질긴 끈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소멸하고
모자란 부분 서로서로 메우며 살으리
봄비
새벽이 눈도 뜨기 전
무거운 눈꺼풀 깨우는 이
행여 누군가 들을세라
살살 내 딛는 작은 발자국 소리
벌써
봄이 왔다고 담 너머 시끌한데
아무 걱정도 없이 늑장 부리는
게으르고 메마른 대지 흔들어
촉촉하게 축여 일으켜 세운다
입김 닿은 곳곳 마다
보시락 고개 들어 향연 벌이는
여린 싹들 대견스러운지
춘화도 함초롬히 웃는다
새벽잠 설치게 하는 이
눈 앞 가리는 황사 미세먼지
말끔하게 쓸어내리는 물빗자루
오물로 얼룩진 마음의 창마저
자꾸자꾸 씻어내려 주려무나
낮달맞이
샛노란 웃음 쏟아지는 꽃달맞이 밭
수줍은 벗 하나 간절하게 기다리는
보기 어렵다는 귀한 몸이지만
더러 우연히 만나는 행운도 있다지
서천 비스듬히 걸려있는 은반인가
잘 익은 수박 저며 한 가득 담아
시원하고도 푸지게 내놓으면 좋겠네
고운 얼굴 담겨있던 동그란 손거울인가
달덩이 닮은 울 언니 탐스레 비추던
가슴 울컥하게 아린 그리움이네
황혼녘 단풍들어 어여쁜 맵시 어디가고
윤기 돌던 얼굴마저 퇴색되어 낡아가니
너도 따라 하얗게 빛바랜 듯 싶구나
샛노란 웃음소나기 뿌리면
꽃달맞이 머리 위로 쏘옥 나와
겸연스레 살짝 내려다보는 낯짝
꽃 향 만끽하며 서로 마중 한다지
마당 넓은 집
긴 이력 달려있는 집
사랑하는 가족 떠나보내고
호젓하게 홀로 사는 조선 여인
드넓은 정원
외로움 내려앉을 새 없이
빼곡히 메운 과실수와 꽃들
철철이 찾아오는 벗이 있어
쓸쓸하지 않다는 어르신
능소화 흐드러지는 시절 돌아오면
님 생각에 붉어지는 눈자위
사그러들지 않는 총기
꼿꼿하게 서있는 위엄
고고하게 풍겨 나오는 품격
마음의 문 걸린 마당 깊은 집
꽃이 좋아 꽃밭에 사노라니
꽃 닮아 곱게 피는 안방 마님
겨울바다의 끄트머리
마음 앞선 성급한 봄비
살며시 지나간 어느 겨울 날
속살풀이 하는 바다의 바람기
잠재우고 싶어지는 해무
수평선 지우며 보얗게 올라온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속살거림
때론 거칠다가 부드럽게 읊조리는 시
태초부터 출렁이는 불멸의 춤사위
다시 찾아달라는 몸으로 쓰는 연서
넉넉한 가슴으로 심신 달래준다
꽃비 다녀간 말끔한 뒷자락
푸르른 용트림 솟구치는 봄소식
넉두리 하는 바다의 수다 무서워
갇혔던 해무의 감옥 풀리고
선명하게 수평선 그어놓는다
초록이 온 세상 덮었네
산과 들은
말 한 마디 건네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초록의 포로가 되었다네
주체 못해 이글이글 새파랗게 퍼져나와
밀치는 힘 막지 못 해 통째로 내주었다네
산야 하 많은 초록들이
불 같이 삽시간에 일어나
풋향 연기 싱그럽게 사루는 행렬
푸른 아래 구불 길 닮은 뿌리들은
초록불 일구느라 진이 다 빠지도록
잠시도 쉬지 못해 구슬땀 흘리겠네
숨 막히도록 달리는 초록 세상
젊음의 파도 이는 산허리 가르면
하루의 고단한 몸 개운하게 풀어주는
촉촉하게 태우는 저 불꽃 좀 보아
대국 大菊
지난 겨울 거뜬히 물리치고
파릇하게 올라와 봄뜨락 물들이는
신통방통 대견스러워 지지대 세우니
비바람 가리지 않고 잘도 자란다
따가운 햇살 성성한 시절 돌아오니
모란 작약도 다투어 키 재기 하는
행여 질세라 훌쩍 키다리 되었다만
합세한 개미 뜸물에 시달리는 고난이다
따슨 기운 꺾이고 찬바람 부니
제 물 만난 듯 왕성한 기세 분주한
주먹만한 송이송이 밀어올리는 꽃대궁
가누기도 겨운 몸 무겁고 무거워도
다물지 못하는 기쁨인가 함박웃음이다
동지 가까이 겨울강가 이르렀건만
무슨 미련 그리 많아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고운 자태 잃지 않고 미소 짓는
어쩌자고 이 마음 설레게 흔들어 놓느냐
동치미
오십천 강바람 먹고 자란
미끈하게 빠진 하얀 속살
짭쪼롬 소금에 누워 뒹구는
땅속 질항아리 켜켜이 들어가
속속들이 맛들어 쨍하게 삭는다
겨우내 밥상에 올라가는 감초
군고구마 곁들이면 그저 그만
어디에 내놓아도 잘 맞는 궁합
사라지지 않는 고유의 맛이다
오십천 이는 물결 타고
샘솟는 생각의 옹달샘터엔
길게 풀어놓는 할머니의 보따리
동치미에 묻어온 밤참 어우러지면
왁자하게 익어 이야기도 맛깔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