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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침에 자고 나니 상처가 더 부어 있었다. 돼지 입처럼 입술이 부어서 그 얼굴로 외출할 수가 없었다. 나이트클럽에도 나가지 못할 것 같아 지배인에게 다른 가수로 대체해 달라고 전화했다. 지배인은 월급에서 깎겠다고 하며 투덜거렸다. 혜옥이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혜옥은 성라나이트클럽의 보배였다. 월급은 짜게 주면서 혜옥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른 업소에 출연하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보수 때문에 윤 매니저와 사장이 자주 싸웠다. 윤 매니저가 혜옥을 다른 업소로 보내겠다고 하면 월급을 조금 더 올려 주곤 했다.
그 가수 생활을 청산하려고 결심하고 나니 시원섭섭했다. 윤 매니저와의 인간적 의리를 어떻게 끊을지 그 문제가 남아 있어서 꺼림칙했다. 혜옥이 가수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윤 매니저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혜옥의 재능을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나 윤 매니저도 이해할 것이다.
돼지처럼 부은 입술에 화장을 해도 가려지지 않고 더 뚜렷이 나타났다. 지배인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묻는 지배인에게 아기가 아파서 그런다고 거짓말을 했다. 할 수 없이 못난이로 대체해야것구만. 나는 그 여자의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질색인디 말이여. 월급을 깎지는 않을 텐깨 내일 밤엔 꼭 나오소 잉. 지배인은 혜옥에게 사정적으로 말하고 곱게 전화를 끊었다.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혜옥은 상처 위에 화장을 두 겹 세 겹으로 칠하면서 오랫동안 화장에 신경을 썼다. 손님들이 노래하는 입만 쳐다볼 텐데 내일 밤도 나이트클럽에 못 나가면 어쩌나?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할 텐데 직장에 결근하는 걸 금기로 삼는 그녀에게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끝마무리를 잘하고 싶었다.
가게 계약을 하고 나서 그날로 나이트클럽을 그만두려던 생각을 바꾸어 일 주일만 더 노래하려고 했다. 갑자기 그만둔다고 말하면 영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일 주일 안에 다른 가수를 구하겠지. 지방에선 실력 있는 가수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실력도 있고 미모도 갖춰야 한다. 혜옥이 그만둔다고 하면 사장은 월급을 올려 준다고 하며 붙잡을지도 모른다. 혜옥은 한번 먹은 결심을 바꾸지 않으려고 가게 계약을 서둘렀던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소매치기단을 검거했단 뉴스와 함께 수갑에 채인 세 명의 범인 얼굴이 비춰젔다. 옷자락으로 가리고 있어서 범인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혜옥은 거울 속으로 소매치기범들의 웅크린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광경은 하도 많이 보아서 아무렇지 않았다. 네 명 중 붙잡지 못한 한 명의 사진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그 수배범의 왼쪽 입가에 붙은 까만 점을 보고 혜옥은 화장하던 손을 멈추었다. 언덕길에서 유아차를 붙잡아 준 그 청년이었다.
혜옥은 놀란 가슴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수배범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리부리한 눈과 갸름한 턱. 입가의 까만 점. 분명히 그 청년이었다. 놀랍기도 하고 실망도 되어 눈을 감았다 떠 보니 그 얼굴이 없어지고 다른 화면이 나왔다.
"세상에 그럴 수가! 그 선량해 보이던 사람이 소매치기라니.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다음에 만나면 꼭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더니 어쩐다지? 어쩌긴, 은혜를 입었으니까 범죄와 은혜를 결부시킬 필요는 없지."
혜옥은 그 청년의 얼굴을 잊으려고 했지만 입가의 까만 점이 자꾸만 생각나서 마음이 울적했다.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다. 인간에 대해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이건 흔한 일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 남자가 범죄와 손을 씻고 개과천선했으면. 혜옥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전세 계약금을 확인해서 핸드백에 담고 셋방에서 나와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오 분쯤 걸어 큰길가에 있는 그 복덕방으로 갔다. 영감은 낡은 소파에 걸터앉아 신문을 읽다가 반갑게 혜옥을 맞이했다. 전세금을 중도 계약 없이 일시불로 지불하겠다고 하니까 영감은 좋아했다. 한 건 성사해서 좋고 시원시원해서 좋다며 혜옥의 성격을 칭찬했다. 혜옥은 영감을 따라 평화아파트 단지 네거리에 있는 그 약국 주인을 찾아가서 임대 계약을 했다. 계악을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좀 사 가지고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핸드폰으로 서울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이 찾아와서 돈을 빼앗고 때렸단 혜옥의 푸념에 언니는 분노했다. 한참 상스런 욕을 퍼붓고 나서 이혼하란 말을 되풀이했다. 혜옥이 전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언니는 혜옥이 짐승 같은 형조와 헤어지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장사하려고? 그래, 잘 생각했다. 진작에 밤업소 가수를 집어치워야 했어. 우리 형제들은 모두 사업 체질이야. 넌 잘할 거라고. 내가 잘 아는 루트가 있으니까 걱정 말고 시작해 봐. 넌 이제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거야. 항상 희망을 갖고 용기 잃지 마."
언니는 손님이 와서 바쁘다며 짧게 전화를 끊었다. 혜옥은 아기 보는 집으로 가서 준희를 찾아 등에 업고 셋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엔 업소에 나가지 않으니 준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 것 같았다. 준희는 엄마를 알아보고 방실거리며 재롱을 피웠다. 몸집은 조그만데 야무져서 여간해선 울지 않고 혼자 잘 논다고 아기 보는 집 여인이 늘 칭찬했다.
7
가게 계약금을 지불하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그 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왔다. 아기와 함께 정오까지 잤다. 점심을 먹고 계획했던 대로 가게 청소를 했다. 간판만 바꾸고 특별히 인테리어를 할 것도 없이 진열대와 옷걸이대만 갖추면 되었다. 비치파라솔도 두 개 필요했다. 진열대는 실내 규격에 맞춰 목수에게 짜 달라고 부탁하고 옷걸이대는 마트에서 샀다.
오후에 혜옥은 아기를 등에 업고 아파트 공원을 산책했다. 평화아파트는 단지가 넓고 공원이 잘 조성된 서민 아파트였다. 임대 아파트 동도 많았다. 혜옥은 돈을 벌어 임대 아파트를 갖는 게 소망이었다. 준희를 키우면서 장사하며 이곳에서 성공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모든 일이 그녀의 소망대로 될지 그 답은 신만이 알 것이다. 신만이 그 답을 갖고 있더라도 준희를 튼튼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혜옥이 가수를 그만둔 것도 준희의 장래를 위해서였다. 엄마가 술집에서 노래하는 가수란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올곧게 성장하도록 그녀의 한 많은 꿈을 포기했다.
그녀는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더 빼앗기지도 않으려고 가슴에 비수를 품고 다녔다. 남편이 나타나서 또 괴롭히면 너 죽고 나 죽자며 대결할 각오였다. 아파트 공원에서 미끄럼틀도 타고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탔다. 아기는 엄마 등에 업혀 밝은 햇빛 속에 나와서 좋은지 옹알이를 했다. 한 남자가 엄마와 아기가 노는 모습이 참 예쁘다며 사진을 찍었다. 혜옥은 그 남자를 위해 웃으며 포즈를 취해 주었다. 남자는 사진사가 아닌 공원 산책객이었다.
혜옥은 목이 말라 공원에서 수도대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공원 입구에서 자동판매기를 봤던 기억이 났다. 혜옥은 자동판매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동판매기 앞 쉼터에 한 청년이 앉아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청년은 네거리에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다가 혜옥을 돌아보았다. 청년의 얼굴을 본 순간 혜옥은 "어머!"하고 고개를 꿉벅했다. 입 가에 까만 점이 있는 청년이었다.
"안녕하세요?"
"누구시더라?"
"어제 우리 아기 유아차를 붙잡아 주셨잖아요?"
"아, 예!"
청년은 그때서야 알았단 듯이 엉덩이를 들썩하고 인사했다. 부리부리한 까만 눈이 웃고 있었다. 문상오. 혜옥은 그 수배범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에겐 오백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청년은 겁도 없이 사람 많은 대로에서 태연히 커피를 마시고 있다. 경찰이 붙잡으면 달아날 자신이 있어서일까? 혜옥은 청년을 신고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혜옥의 은인인 것이다.
"차 한 잔 하시겠어요?"
"방금 마셨소."
청년은 빈 종이컵을 전봇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혜옥은 자동판매기로 걸어가서 동전을 넣고 콜라 캔 두 개를 뽑아 왔다. 청년 옆에 앉으며 콜라 캔 한 개를 청년에게 내밀었다.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전에 점심을 먹어서 더 들어갈 데가 없구만요."
"그럼 갖고 계시다가 배 꺼지면 드세요. 제 성의니까요."
"고맙소."
청년은 캔을 받아 옆 빈 자리에 놓고 혜옥은 캔을 터서 꿀꺽꿀꺽 맛있게 마셨다. 파란 창공으로 흰구름 조각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햇볕은 따가웠다. 혜옥은 손에 든 파라솔로 아기를 가려 주었다.
"날씨가 참 무덥죠?"
"아따, 여름 날씨 같습니다. 힘들 텐디 아기를 의자로 내려 놓으시죠."
"괜찮아요.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미처 감사하단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기가 참 예쁘요 잉. 머시맨가요?"
"가시내 같아요? 다들 가시내같이 생겼다고 해요. 머시매가 맞아요."
혜옥은 청년의 사투리를 흉내내며 웃었다. 청년의 큰 눈이 상대를 삼킬 듯 반짝거렸다. 혜옥은 청년이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정말 소매치기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의심을 확인시키듯 청년은 눈을 반짝거리며 오가는 사람과 차들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그 눈빛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저녁에 시간 있으시면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말씀만 들어도 영광입니다. 얻어먹으나 마찬가지요 허허."
"정말 제 소원 좀 들어 주세요, 아저씨."
"오늘은 지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다음에 얻어먹기로 하지요."
"그럼, 제 가게가 네거리 약국 옆에 곧 차려질 테니까 그때 안에 시간을 내 주셔야 해요. 장사를 하게 되면 바쁠 테니까요."
"그럽시다."
청년은 바쁘다면서 일어서서 네거리 쪽으로 가 버렸다. 혜옥은 청년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청년은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서성거리다가 도심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승차했다. 자기 차가 없는 것 같았다. 소매치기에겐 자가 차가 필요 없을 것이다. 모든 차가 다 자기 차니까. 차를 갖고 있으면 도리어 불편할 거라고 생각되었다. 혜옥의 생각이었다.
(자수를 권해 볼까?)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줄곧 청년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 사람이 국민의 가슴에 못박는 범법자란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가슴 아팠다. 그의 인상이 흉폭하고 못 생겼더라면. 참으로 인물이 아깝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음에 그 청년을 만나면 자수를 권해 볼 생각도 해 보았다. 낯선 남자에게 그럴 용기가 없을 것 같아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그 청년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보답하지 않고는 그녀의 마음에 지고 있는 짐을 버릴 수 없었다.
8
가게의 물건을 진열하는 작업이 끝났다. 서울 언니가 와서 도와 주었다. 물건을 들여 놓으니 가게는 더 밝고 넓어 보였다. 가게 앞엔 비치파라솔을 펴 놓고 값싼 염가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파자마, 슈미즈, 팬티, 메리야스, 브레저, 양말 등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고 싸다며 모여들어 사고 구경했다.
물품은 저가이면서 저질이 아니고 메이커 제품들이었다. 이익을 박하게 받고 파는 것이다. 혜옥은 언니를 통해 유명 브랜드 제품들을 값싸게 구입하는 경로를 알아냈다. 언니가 의류 도매업을 하고 있기에 그 유통 경로를 잘 알고 있었다. 혜옥도 언니처럼 성공하여 큰 도매상의 사장이 되고 싶었다. 가수의 꿈이 사업에 대한 꿈으로 바뀐 게 아니고 준희의 장래를 위해 엄마의 꿈을 덮어 둔 것이었다.
혜옥은 소녀 때부터 꿈꾸어 왔던 가수의 꿈을 접고(꿈은 생명의 실체이기에 영원한 단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곱 해 동안 몸담아 왔던 밤 업소의 생활을 청산했다. 나이트클럽과 아듀했다. 사장은 월급을 더 올려 주겠다며 혜옥을 달랬고, 윤 매니저는 뭘 해먹고 살 거냐고 하면서 걱정했다. 윤 매니저에겐 혜옥의 재능이 아깝게 썩는 것보다도 젊은 여자가 혼자서 아기와 함께 어떻게 세상을 헤쳐나갈지 그게 더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래, 돈 벌어서 음반도 내고 진정으로 가슴의 노래를 부르는 싱어가 돼라."
그러면서 어려울 땐 언제든지 다른 데 가지 말고 자기를 찾아오라고 윤 매니저는 당부했다. 언제든지 찾아오면 혜옥이 노래할 터전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 말이 혜옥에겐 위안이 되었다. 모든 일이 맘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그녀를 기다린다는 것. 그 말은 혜옥에게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윤 매니저는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혜옥은 다시 밤무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다. 노래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건강과 체력이 든든한 밑천으로 그녀 안에 내재하고 있었으니. 그 의지의 원천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혜옥의 삶에 대한 끈질긴 욕망이었다.
밤 열 한 시. 혜옥이 하루 수입금을 계산하고 가게 셔터문을 내리는데 검은 그림자가 쓰윽 다가왔다. 꽃집도 약국도 문을 닫아서 거리는 어두웠다. 차들의 불빛 속에 구레나룻을 기른 남편의 얼굴이 다가왔다. 남편의 입에선 술냄새가 풍겼다. 더럽게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그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혜옥은 놀라지 않고 핸드백을 얼른 등뒤로 감추었다. 남편을 만나면 핸드백을 등뒤로 감추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내놔."
"미친놈!"
"내가 미친놈이냐? 날 버리고 도망친 네가 미쳤지. 도망쳐 봤자 갈 곳도 없으면서 그래?"
품속에서 비수를 꺼낼 틈도 없이 남편의 억센 손이 핸드백을 빼앗았다. 혜옥은 남편의 힘에 떠밀려 보도 위로 쓰러졌다. 쓰러질 때 보도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얼굴 위로 검붉은 피가 흘렀다.
혜옥은 이를 악물고 두 팔로 남편의 다리를 붙잡았다. 남편이 혜옥을 걷어찼다. 비명이 터졌다. 혜옥은 얻어맞으면서도 남편을 놓지 않았다. 혜옥의 품속에서 비수가 떨어져 보도 바닥에 뒹굴었다. 비수를 잡을 힘도 없었다. 혜옥은 남편에게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범벅되었다.
작업복 차림으로 네거리 쪽에서 걸어오던 청년이 비명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무자비하게 혜옥을 때리는 남편을 보고 달려와서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형조는 혜옥에게 퍼붓던 매질을 청년에게 쏟아부었다. 청년은 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하다가 형조의 턱을 갈겼다. 형조는 차도로 넘어져서 하마터면 달려오는 차에 치일 뻔했다. 청년은 계속해서 형조를 구타했다. 형조는 청년의 주먹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만 때려요! 그 사람은 병자예요!"
혜옥의 절규에 청년은 구타를 멈추었다. 왼쪽 입가에 붙은 까만 점이 차의 불빛 속에 더욱 뚜렷이 보였다. 형조는 어슬렁어슬렁 일어나서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핸드백은 보도 위에 떨어져 있었다. 청년은 핸드백을 집어 혜옥에게 주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혜옥의 얼굴에 흐른 피를 닦아 주었다.
9
"병원으로 갈까요?"
"괜찮아요. 조금 다쳤어요."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다친 것 같소. 택시 하나 부를랍니다."
"그럴 필요 없대도요. 집에 가서 약을 바르면 돼요. 그 사람은 제 남편이예요."
"병자니깨 때리지 말라고 할 때 짐작은 했소. 아주머니도 참 운이 없소 잉. 그런 걸 남편이라고……"
"아저씨는 우리 남편보다 더 나쁜 사람이예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제 말이 틀렸나요?"
"맞습니다. 나도 마누라를 버린 놈이요. 오죽 못 났으면 아내와 헤어졌것소?"
"아내와 헤어진 게 당연하죠. 당신은 아내를 가질 자격도 없어요. 제 말이 지나쳤다면 욕해도 좋아요. 내가 당신을 고발하지 않는 건 우리 아기를 살려 준 은인이기 때문이예요."
"뭐라고 해도 좋소."
청년은 보도에 떨어진 비수를 주워 들고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차들의 불빛을 받으며 보도 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차들이 비키라고 클랙슨을 을렸지만 두 사람은 못 들은 척 앉아 있었다. 청년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구두 앞에 놓인 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들이 헤드라잇을 비추고 지나갈 때 비수는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청년은 그 비수가 누구 꺼냐고 묻지 않았다. 혜옥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필요한 무기가 되어 버렸다. 그녀에겐 남편을 찌를 힘도 없었다. 남편을 죽일 만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바보. 핸드백에 있는 돈이나 가져가지. 그걸 왜 빼앗기지 않으려고 내가 그토록 발버둥쳤을까? 돈이 없어 낯선 타관에서 굶주릴 남편을 생각하니 괜히 반항했다 싶었다.
머리에서 손수건을 떼니 피가 멈춰 있었다. 피에 젖은 손수건을 청년에게 돌려줄 수는 없었다. 다음에 하나 사 드려야지. 혜옥은 그 순간에도 그가 수배범이란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파출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혜옥이 청년을 고발하려고 했다면 그때 공원 입구에서 만났을 때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혜옥은 청년에게 자수를 권유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이런 상황에서 만나 또 한 번 그의 도움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청년은 이 근처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청년이 어디에 살건 혜옥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집과 아내를 가질 권리는 모든 남자에게 다 있겠지만 국가를 좀먹는 범죄자에겐 그런 것들이 과분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당신은 아내를 가질 자격도 없다고.
"어서 경찰에 자수하세요, 네? 아저씨."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밀려왔으나 꾹 참았다. 그의 인생은 그가 알아서 할 것이다. 왜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이런 사람들뿐일까? 한심해서 눈물이 나왔다. 혜옥이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청년이 돌아보았다.
"바빠서 가 봐야것습니다. 상처 치료 잘 하십시오."
청년이 일어섰다. 혜옥은 따라 일어서면서,
"모두가 잠잘 시간인데 뭐가 그리 바쁘세요? 부인도 없다면서?"
하고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먹고 살란깨 그라지요. 결혼과 삶은 별개입니다."
"그건 저도 잘 알아요."
혜옥은 어둠 속으로 빨리빨리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게 셔터문을 잠갔다. 가게보다도 집에 가서 상처를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게 안엔 약품도 없었다. 부부가 싸우는 광경을 사람들이 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제발 다시는 찾아오지 말았으면. 이 장사마저 못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가난하더라도 준희를 키우며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 흔하디 흔한 평화가 그녀에겐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희망 하나를 가슴에 안고 살아왔듯이, 흔해빠진 평화는 아니더라도 쇳덩이처럼 단단한 희망 두 글자만은 가슴에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 희망은 준희였다.
10
계절은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혜옥이 란제리 가게를 개업한 지도 두 달이 지나 점포의 기틀이 잡히고 혜옥도 차츰 장사에 익숙해졌다. 점포의 기틀이 잡혔단 말은 단골 고객이 꽤 생겼단 뜻이다. 다른 옷가게는 불경기인데도 혜옥의 란제라 가게엔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다. 좋은 제품을 염가에 팔고 주인이 친절하기 때문이었다.
혜옥은 장사꾼이 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가수에 대한 미련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면 이를 악물고 눌러 버렸다. 이 다음에 준희가 커서 성인이 되었을 때 엄마는 왜 노래를 계속하지 않았느냐고, 더 높은 인간의 길을 포기한 비굴의 이유를 캐묻는다면 나에겐 그때 준희 너밖에 없었다고 그녀는 대답하리라.
꿈은 생명의 실체지만 생명 같은 자식을 위해서 아낌없이 꿈을 버릴 수도 있다. 그게 어머니의 길이었다. 혜옥은 가수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변함없이 노래를 사랑하고 노래 가사처럼 아름답게 살아갈 것이다. 이별과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노래를. 삶과 희망의 노래를.
남편 형조를 생각하면 가슴이 에일 듯 아팠다. 그때 문상오란 청년에게 얻어맞고 달아난 후로 형조는 혜옥의 가게에 찾아오지 않았다. 두 달 동안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서울 집으로 돌아간 듯 싶었다. 서울엔 그의 부모형제가 있었다. 좋은 집과 훌륭한 가문을 두고 형조는 아내만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그는 폐암 말기였다. 남편을 그렇게 만든 게 혜옥에게도 책임이 없는 게 아니다.
형조는 아내가 밤 업소에서 뭇사내들 앞에 반라의 몸으로 흔들고 노래하는 걸 싫어했다. 뭇사내들에겐 눈요기깜이 됐을 그 매력이 남편에겐 질투의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병든 육체는 사랑의 행위를 거부하고 그 분노가 동물적 폭행으로 표출된 게 아니었을까. 혜옥은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마음이 좋고 남의 탓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남편의 비행과 폭행을 아내인 자기 탓으로 돌렸다. 준희가 무럭무럭 크고 귀엽게 재롱 피울 때 남편을 생각하고 마음이 답답했다.
남편에게 남은 길은 말기암 환자들을 치료하는 요양소에 입원하여 여생을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다 죽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돈을 벌면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때까지 남편이 살아 준다면. 하루하루가 혜옥에겐 곡예 같은 나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오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조였는데 아직 죽었단 소식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더라도 더 오래 살아 주기를 기원했다. 돈 벌어서 아내의 도리를 한번 해 보고 싶었다. 남편이 죽어서라도 저승에서 아내를 원망하지 않게.
일요일은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휴업했다. 혜옥은 두 달 동안 휴일도 없이 장사했다. 모처럼 준희를 유아차에 태워 데리고 평화아파트 공원을 산책했다. 산이 가까워서 뻐꾹새 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서울에선 듣지 못했던 새소리였다. 혜옥은 놀이터로 가지 않고 숲이 우거진 아파트 관리소 쪽으로 걸었다. 그쪽은 계단이 없어서 유아차를 끌기에 좋았다. 숲으로 오니 뻐꾹새 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다.
혜옥은 유아차를 멈춰 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햇빛 속에 불타는 듯한 화려한 신록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관리소 안에서 한 남자가 유심히 혜옥을 바라보았다. 혜옥의 눈길이 관리소 안으로 향했을 때 관리소 출입문이 열리며 작업복을 입은 직원이 밖으로 나왔다.
직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무 그늘 밑으로 걸어왔다. 입가에 점이 있는 그 청년이었다. 아직까지 체포되지 않고 잘 버티고 있구나. 청년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혜옥은 그가 자수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씻고 개과천선하기를.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동시에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느티나무에 기대서서 작열하는 신록을 바라보았다. 제트기 한 대가 창공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혜옥은 청년의 이름을 확인하고 싶었다.
"문상오 씨, 맞죠?"
"난 유영근이라고 하는디요."
"거짓말! 가명 쓰면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이제 숨바꼭질 그만하고 진실로 돌아오시죠."
"무슨 말이죠?"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 아저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예요. 내가 미우면 소매치기 면도칼로 이 얼굴을 그어도 좋아요."
"하하하"
영근은 허풍선이 같은 웃음을 웃었다.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고 어이없어 나온 웃음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소매치기범 문상오와 닮았다고 하지요. 오해도 많이 받고 경찰서에도 연행되었어요. 나는 문상오가 아닙니다. 아파트 관리소에 근무하는 전기공 유영근입니다. 관리소에 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영근은 관리소로 들어가더니 신문을 한 장 들고 나왔다. 그는 혜옥에게 신문 한 페이지를 보여 주었는데 거기엔 문상오가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내가 문상오라면 어떻게 여기 있것소? 경찰서 유치장에 있제. 인자 내 말을 이해하시것소?"
혜옥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청년은 소매치기범을 닮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걱정하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비누방울처럼 햇빛 속으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마음의 그림자가 없어졌다. 그러나 영근에겐 미안했다.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았으니. 그녀는 죄를 진 심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은 지가 점심을 살랍니다. 네거리에 냉면 잘하는 집이 있는디, 혹시 냉면 싫어하시오?"
"좋아해요. 제가 사겠어요."
"그럼 란제리 가게 사장님한테 냉면 한번 얻어먹읍시다."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면서 푸른 공원길을 다정히 걸어갔다. 영근이 유아차를 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다정한 부부 같았다. 이 사람이 형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혜옥은 서글픈 생각을 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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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박성배 선생님, 못 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잘 쓰도록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