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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봄, 꿈 발전소 외 2편
강 수
거대한 꿈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얼음 덩어리들은
발전소에서 꿈으로 재생된다
저 꿈의 빛깔들로 인해
우리들의 겨울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목도리로 칼바람을 가리고 입김으로 언 손을 녹이면서도
가슴속에 꿈 발전소 하나 지을 땅은 남겨뒀었거니
귀 기울여 보라
가슴 속에서 쿵쿵 발전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리니
그 소리 들리는 한,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은 없는 것이다
저기, 녹색 꽃망울에서 붉게 솟구치는 꿈의 화염을 보라
봄의 환(幻)
마약같은 봄이 왔고
사람들은 흘러간 유행가처럼 또다시 봄을 노래했다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이뤄졌다
기막힌 각본에 맞춰 꽃망울은 피어났고
적절한 시간에 꽃잎을 날리며 떨어졌다
고장난 CCTV는 순식간에 교체되었고
질서를 깨뜨리는 오류는 바로바로 수정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자기 배역을 거부한 사람들을 솎아내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봄의 중독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는 형태로
스스로 자신의 배역을 내려놓았다
해마다 좀 더 완벽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태어나면서 처음 정해진 배역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봄이라는 꿈은,
내일이라는 희망은,
치료할 수 없는 바이러스가 되어서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겨울에 지친 사람들이 진짜 꽃의 혁명을 일으킬까 두려워
크고 무서운 손이,
나프탈렌으로 빚은 꽃송이들을 세상에 매달고 있었다.
마약처럼,
우리는 나프탈렌 향기 나는 봄에 취하여
봄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태풍이 온다 -아버지 1
1
바다가,
밧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풀면서 아버지의 삶을 조율했다.
2
아버지들이 항구로 몰려들었고
자신의 지위와 신분에 맞는 위치에 정박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항구 외곽에 매달려 있던 아버지들부터 하나씩 가라앉고 있었다.
항구 안쪽으로 들어올 능력이 없는 아버지들부터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들은, 서로의 몸에 의지한 채, 어금니를 앙다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삶의 외곽에서 항구의 안쪽을 꿈꾸던 아버지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우리의 슈퍼맨들이 너무 힘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3
방송에서는 대피 요령을 계속 외쳐댔지만, 그건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배의 이물에 밧줄을 옭아매고 힘껏 당겼다.
절망적인 배의 모가지에서 꾸르륵꾸르륵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이승의 끈을 끊고 싶은 아버지가 검푸른 바닷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팽팽한 밧줄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 걸렸다.
우리가 저승으로 갈 수도 있고 아버지가 이승으로 올 수도 있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뜬 무지개가 비바람에 펄럭였다.
공부, 열심히, 해서, 항구의, 안 쪽,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어머니는 흠뻑 젖어 산발한 머리인 채로 말했다.
옷이 찢어지고 젖가슴이 다 드러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을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들이 겨우 겨우 지나가고 있었다.
배들이 하나둘씩 가라앉고 있었다.
바닷속으로, 아버지를 따라, 끌려, 들어가는, 아이들의, 눈망울에는
차라리, 행복한 공포가 흘러나왔다.
4
아버지라는 이름은,
가느다랗고 긴 모가지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하얘서 아름다운 빛깔....
그 모가지를 조이고 있는 밧줄의 끝에는
푸르딩딩하게 멍든 바다가 산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퉁퉁 불어 떠다니는 바다....
<신작시>
위대한 밥 외 2편
강 수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세상은 살만할 것이다
밥을 먹기 위해 버려지는 시간이 아껴지고
설거지하는 시간도 절약되고
물은 오염되지 않은 채 맑게 흘러갈 것이다
가축은 자유로운 생명을 누릴 것이며
초원은 푸른 생명으로 가득할 것이다
밥그릇 싸움이 사라질 것이며
돈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사람들은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밥을 같이 먹어주는 패거리에 들어가기 위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며
밥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게 힘들고 짜증이 나서
삶은 늘 고통스럽다
아, 먹는다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쾌락과 고통이여
오늘도 기쁘게 울면서
나는 밥을 먹는다
구멍
살기 위해서는 막혀 있다가도
뚫려 있어야 하지
뚫려 있다가 막히기도 해야지
어떤 삶은 막혀 있어서 죽고
어떤 삶은 막혀 있어서 산다
어떤 삶은 뚫려 있어서 죽고
어떤 삶은 뚫려 있어서 산다
구멍이 보이지 않아
햇살이 비치지 않아
슬픈 어둠 속에서 구멍을 찾는다
뚫려 있으면 막혀 있는 곳이 있고
막혀 있으면 뚫려 있는 곳이 있다
막아야 할 구멍은 막고
뚫어야 할 구멍은 뚫고
죽어야 할 생명은 죽게 하고
살아야 할 생명은 살게 하고
구멍 하나로
구멍의 크기에 맞춰서
삶과 죽음을 조율하는 일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는데
늘 남 탓만 하는 모순
피리를 꺼내서 분다
막을 구멍은 막고
열어야 하는 구멍은 열고
세상에 울려 퍼지는 구멍들의 연주
세상의 구멍이라고
버려진 구멍들이 모여서 피리소리가 된다
구멍을 채우는 소리가 된다
걸레
저 걸레는 내가 아끼던 수건이었다
이제는 방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기 위해,
가끔 정체를 드러내는 신세가 되었다
내 삶에서 잊혀진 지 이미 오랜데
나는 이미 새 수건에 맛들인 지 오랜데,
저 걸레는,
한때 내 몸을 닦아주는 수건이었던, 저 걸레는,
이제는 이리저리 찢기고 뜯기어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나
내가 품어온 사랑의 흔적이
꼭 걸레 같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더러운 걸레라도
아름다운 이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된다는 것은 절망이다.
‘걸레는 수건이었다.’라는 진리 앞에서
나는 더욱 슬퍼지다가도
수건이라는 이름이 걸레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결국, 내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느니
나는, 한 번이라도 걸레 앞에 진실했던 적이 있던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헤어질 때 걸레가 된다.
걸레가 된 만남, 걸레가 된 사랑
심지어 이별조차도 걸레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게 사랑이라고, 사랑일 것이라고,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사랑에 빠져 더럽혀진 삶을 닦아내기 위해서는 걸레가 필요하다는 진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걸레가 된다
사랑을 위해 걸레가 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웃는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은 내가 흘린 오물을 닦아주기 위해 기꺼이 걸레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걸레가 되어야 하는 시간, 그러나
내가 살아온 만큼의 내공으로는 부족해
그 누구의 오물도 닦아주질 못한다
오늘도 걸레가 되기 위해 면벽하는 시간,
걸레를 빨아내는 손의 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에스프리>
시의 힘, 시의 가치, 시의 미래
강 수
1
한동안 나는 서사시에 몰두해 있었다. 몇몇 시인들과 함께 ‘서사시문학회’를 결성하고, 역사 공부를 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대시의 미래가 서사시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서사시는 죽어 있는 장르다. ‘죽어있다’는 것은 그 유용성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왜 서사시라는 장르를 현대에 되살리려고 하는가.
현대는 방송과 인터넷 등을 통한 전자매체의 시대이다. 이 전자매체는 문자매체가 잃어버렸던 구술매체의 장점을 되살려냈다. 그것은 ‘현장성’이다. 구술매체의 시대에는 구연자와 향유자가 동일 시간 동일 공간에 있었다. 그리하여 향유자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었고, 구연자는 그 반응에 따라 다양한 구연 행위를 시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장성’을 현대의 전자매체는 그대로 구현해낸다. 그리고 문자매체가 잃어버렸던 ‘음악성’을 그대로 되살려낼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예술장르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비중 있는 장르인 뮤지컬을 보자. 뮤지컬은 그야말로 ‘노래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 안에 다양한 퍼포먼스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뼈대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운율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서사시의 맥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서사시의 전통은 현대 전자매체 시대에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내가 서사시를 공부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서사시 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할수록 서사시야말로 현대시를 쓰는 시인들이 새롭게 개척해야할 분야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이 현재 향유되고 있는 문화 예술 장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서사시와 함께 나의 관심을 끈 분야는 대중가요였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문자매체 중심의 시적 소통에 천착해 있는 동안, 일부 시작품들은 음악이라는 장르와 융합하며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최근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대두된 다양한 소통 매체들, 이를테면 블로그, 전자책, 인터넷 방송, 스마트기기 등은 기존의 전통적 소통방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혁신시키고 있다. 문자 중심의 기존 소통방식을 벗어나 사진이나 동영상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소통 방식으로 대중과의 소통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현대시의 외형과 내용 역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문자없이 영상만으로 이뤄진 ‘시’가 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제작되고 있으며, 사진이나 일러스트 등과 문자의 융합으로 이뤄진 시와 시집도 등장했다. 그에 따라 시의 문법은 기존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낭송이라는 음악적 요소로부터 탈출했던 시가 다시 음악이라는 외피를 입게 된 현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곤란하다. 수많은 시집이 만들어져 유통되지만 대부분이 사라지고 마는 반면,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은 ‘시’는 언제 어디서나 즐겨 찾고 소통하면서 감동을 준다.
물론 노래로 만들어진 시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자로만 된 시의 경우는 일부러 시를 찾아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반면, 노래로 만들어진 시는 대중의 마음 속에 살면서 언제 어디서나 흥얼흥얼 거릴 수 있을 정도로 암기가 된 채로 독자의 삶을 함께 살아간다. 거기다가 즉각적이고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래’는 시인들이 새롭게 도전해야 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노래와 결합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렇게 하여 현대시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낼 수 있다.
3
노래방에 가면 우리가 사랑하는 현대시를 만날 수 있다. 독자들은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주옥같은 현대시가 노래방 기기를 통해 소통된다. 현대시의 문화콘텐츠적 가치와 새로운 형태의 시적 소통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노래방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해서, ‘노래방에서 만나게 되는 현대시’라는 소재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현대시를 노래방에서 만나고 있다. 현대시는 고상하고 대중가요는 저급하다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인들이 ‘노래’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혀야 한다.
둘째, ‘노래’는 시인에게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가져다 준다. 이를테면, 전국에 3만개 이상의 노래방이 있는데, 각각의 노래방에 ‘노래를 하는 방’이 10개 정도 있다고 가정한다면, 30만 개의 ‘노래를 하는 방’이 있는 셈이다. 30만 개의 노래방 중 10%인 3만개의 노래방에서 특정 시인의 노래가 1번씩만 불려진다고 해도 3만 번이 불려진 것이고, 저작권료로 1회당 10원씩만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30만원의 수익이 생기는 셈이다.
어떤 시인들은 대중가요의 가사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시적 수준을 낮춰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는 ‘가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옳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똑같은 시인데도 어떤 형식의 ‘노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소통’의 양상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소통’이 중요하다면 독자들이 좋아하는 음악 형식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명희에 의하면 ‘노래’는 크게 4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노래는 문자텍스트인 시에 비해 감정전달이 직접적이고 즉자적이라는 점, 둘째는 노래는 현장감을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는 점, 셋째는 노래가 현대인의 개인적인 감정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쉽다는 점, 넷째는 노래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포획하여 대중과 역동적 소통을 강화하고 향유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면 ‘노래’는 문자텍스트인 시보다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추가할 수 있다. 시가 노래로 전환되는 순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향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워진다.
대중들은 김소월, 박인환, 서정주 시인과 같은 작고 시인에서부터 류근, 류시화와 같은 최근 시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시인들을 노래방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김소월과 같은 민요시인에서부터 김광규와 같은 이미지즘 시인, 그리고 김남주와 같은 민중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의 시인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문자로만 향유되고 소통되는 시의 시대는 가고, 독자들이 직접 체험하고 향유하는 시의 시대가 오고 있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를 활용하여 제2, 제3의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4
시가 노래로 만들어지는 예는 대중가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새롭게 부상한 뮤지컬, 오페라, 창극과 같은 공연 장르에서도 시의 위력이 느껴진다. 이러한 공연극은 모두 노래로 불려지며, 그 중에서도 등장인물의 마음을 노래로 부르는 ‘아리아’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이다. 가령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나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 등 유명한 아리아들은 수도 없이 연주되고 노래되며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들이다.
우리나라에도 뮤지컬의 경우에는 고정 관객층이 형성되어 있어서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오페라나 창극의 경우는 소수 마니아층만 존재하고 있어서 시장이 침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 유명 오페라 내한 공연 같은 경우에는 수많은 관객이 몰린다. 이런 것을 보면 작품의 수준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대중들은 좋은 공연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작품에 목말라 있는 것이지, 오페라나 창극 그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필자의 리브레토 [운영전]의 작곡을 맡았던 이근형 작곡가는 우리나라에 좋은 오페라 대본이 없어서 오페라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좋은 대본만 있으면 작곡을 하려고 달려드는 작곡가가 한둘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오페라나 창극의 대본을 누가 쓰는 게 맞느냐 하는 것이다. 리브레토 작가는 기본적으로 ‘아리아’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리아’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써야 한다. 실제로 수많은 리브레토가 쓰여지지만 오페라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의 수준을 확보하지 못해 살아남지 못하는 오페라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시인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5
독자와 관객들의 감수성과 수준은 각종 매체의 발달과 함께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그것을 수용하고 소화해내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과 같이 문자중심의 소통과 시각적 이미지 중심의 시적 실험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시의 소통도구로 수용하고 시의 위상과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써 ‘음악’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강 수
1968년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사시 대백제 외,
오페라 리브레토 <오페라 운영> 외, 2008년 바움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