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24)
햇빛
밝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병실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정 할머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고 계셨다. 이불을 조심스레 들고 할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포근히 내려앉았다. 환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할머니, 밤에 잘 잤습니까?”
할머니는 천천히 눈을 돌려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선생님, 할머니에게는 이제 제발 어떤 치료도 하지 마십시오. 단지 아프지 않고 편하게만 해주시고, 링거 수액도 절대로 달지 마십시오.’
환자의 손녀가 와서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손녀는 40대 후반의 중년여성이었다. 할머니의 자녀는 70대여서 거동이 불편해 손녀가 할머니의 주(主) 보호자였던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세끼 식사를 먹여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일주일에 한 번 목욕시켜 주고 치매와 고혈압, 당뇨, 말기신장질환의 약을 주고 있었다.
할머니의 70대 며느리를 만나 상담을 하였다.
“(시)어머님이 신장질환 말기라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결국 투석치료를 하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했습니다. 투석치료도 (시)어머니에게는 힘이 부쳐 일주일에 세 번하다 2년 후엔 두 번 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는 주에 한 번하게 되었지요. 그 다음 해는 아예 투석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투석치료를 하지 않으면 곧 돌아가신다고 했습니다만 투석을 하지 않은지 2년이 다 되어도 지금까지 살아계십니다.”
병실에 가보니 아무 치료도 하지 말아달라던 며느리가 환자에게 죽을 떠먹이고 있었다.
며느리는 효부였다. 말은 아무 치료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치료를 하여 환자를 너무 고통스럽게 끌고 가지 말고 돌아가실 때가 되면 편안하게 돌아가실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요양병원에 어르신을 입원시키고 매달 입원비를 꼬박꼬박 낸다는 말은 자녀들이 효자, 효녀란 의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건이 안 되는 경우 노인들이 방치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치매가 심해 자녀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할머니. 부르면 눈만 겨우 떴다가 곧 감는 할머니. 이런 상태로 몇 년을 끌고 온 것이었다.
자주 오는 60대 딸을 만났다.
“2남 1녀를 낳고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6.25 때 이북에서 내려오신 새어머니가 오셔서 우리를 친자식보다 더 잘 거두어주시고 키워주셨습니다.”
정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새어머니였지만 죽을 때까지 존경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정 할머니는 흥남철수작전 때 이남으로 내려오셨는데 슬하에 소생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곡기를 끊은 지가 벌써 일주일이네요.”
며느리가 말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음식을 거의 못 먹고 미역국 국물만 두세 숟갈 먹었다는 것이다. 이러고도 계속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으니 미역국 국물 두세 숟갈만 먹어도 생존하는 것이다.
하루는 병실에 가보니 가족들이 대여섯 명 와 있었다. 아마도 곧 돌아가시겠다고 느꼈는지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와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 부탁한 대로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만 해주십시오.”
‘거의 먹지도 못하는데 할머니는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사시는 것일까?’ 오후 3시경 병실에 들어가 보니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병실은 남향으로 하루 종일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물, 공기, 햇빛.
‘아! 이 밝은 햇빛! 거의 먹지도 못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이 햇빛 때문이었던가!’
햇빛은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자원인 것은 잘 알 것이다.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동물들이 병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모두 밝은 햇빛 때문이다. 작은 씨앗에서 햇빛과 땅의 힘으로 사과, 배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병원에 있다 보면 햇빛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하얀 목련 꽃에서 봄의 진한 향내가 난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 햇빛을 즐겨보자. 햇빛 속에 숲속을 걸어보자. 햇빛과 땅은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햇빛은 인체의 면역 기증을 강화시켜 암도 치료할 수 있다. 우울증엔 햇빛만큼 효과적인 약이 없다. 숲속을 맨발로 걸어보자. 맨발로 걸으면 땅의 기운까지 흡수할 수 있다. 햇빛 속에서 맨발로 숲속을 30분씩 한 달만 걸으면 위장약 몇 년 먹는 것보다 더 뚜렷한 치료효과가 있다고 한다.
생동하는 봄이다. 하얀 벚꽃과 노란 개나리가 연출하는 색의 축제를 즐겨보자. 숲속을 걸으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보자. 꽃망울을 터뜨리며 생명의 찬가를 노래하는 나무들의 소리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