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성 옥
통영, 한산섬 답사기(踏査記)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통영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산 섬으로 향하자 남해바다가 눈앞에서 멈추었다. 동해바다 못지않게 푸른 바닷물이 포말로 하얗게 부서지자 나도 몰래 노산 이은상 선생의 위 노랫말이 절로 흥얼거려졌다.
통영은 유독 문화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문화 예술에 관심이 원만한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다시피, 토지의 박경리 선생, 꽃의 시인 김춘수 선생, 코리아환상곡의 윤이상 선생, 청마 유치환 선생, 극작가 유치진 선생을 배출한 예향이다. 혹시 다른 분들이 있을까 해서 확인해 보았더니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은막의 정점 자리에 있었던 여배우 정윤희씨의 고향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 노랫말을 쓴 이은상 선생은 마산 분이였다. 마산은 통영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 간 만(灣)이다. 그래서 더 잔잔한 바다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어떠랴, 한산 섬으로 들어가는 이곳 통영 바다도 오늘 따라 유난히 푸르고 잔잔하다.
그런데 통영이라는 지명은 아직도 사람들이 낯설어한다. 그 이유는 통영의 바로 전 지명이 충무시였기 때문이다. 1955년 통영읍이 충무시로 격상되면서 주변 면 지역만 통영군으로 남고, 사람들은 이곳을 1994년까지 충무시로 칭하였다. 그러다 1995년에 도농통합으로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어 오늘의 통영시가 되었다.
물론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이 지역 지명이 모두 유래하게 되었다.
선조 37년(1604)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거제현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로 옮겨왔기 때문에 통영(統營)이 되었다. 충무도 마찬가지로 장군의 시호를 바로 도시 지명으로 붙인 것이니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다. 그러한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남해바다를 끼고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 온 이름 없는 민초들이 거제현 소속의 작은 어촌을 오늘 날 남해의 아름답고 명망 있는 도시로 성장시켰을 것이고, 이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윤이상 선생들이 이 남해의 도시 통영의 품격을 한결 더 높이지 않았나 싶다.
한산도 안쪽으로 들어서자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는 호수보다 잔잔하고 맑았다.
여기가 바로 1592년 이른바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라고도 하는 한산도대첩이 이루어 진 곳이다.
필자가 언젠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한산대첩에 대하여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 수군 제독 도고는 전승기념 파티에서 어느 기자가 그를 이순신과 비교하자 자신을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하였다고 한다. 여간한 존경심이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으리라.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력화 시킨 이 해전을 쓰시마해전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도고 제독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을 썼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함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 진법이다.”라고 서술한 사실이 있는데, 당시 필자는 자료에 의하여 글을 썼지만 이곳 지형을 정확히 모르고 쓴 글이라 현실감을 잘 전하지 못한 점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 역사의 현장에 오늘 비로소 와 본 것이다. 바로 이 곳, 통영 앞 바다.
닻을 내리는 선착장 도착하자 관광 차 온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섬 안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오후로 접어들었지만 썰물이 밀려 올 때가 아니라서 검은 개펄이 드러나 있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그 개펄에서 무언가를 채취하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엇을 잡겠다는 기세가 아니고, 밀물에 드러난 검은 개펄을 신기해하며 그냥 노니는 중일 것이다. 연두색 커플 패딩점퍼를 입은 젊은 연인이 조가비 같은 것을 주어 들고 환하게 웃기에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굴’이라고 한다. 그 젊은 연인은 오늘 자연산 통영굴 맛을 본 것이다. 그들의 인연이 소중이 이어져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어 가면 오늘의 추억은 두 사람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될 것이리라. 두 사람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지길 빌어 주며 나도 걸음을 재촉하였다.
섬 자락 두 구비를 넘어서니 이순신 장군 전승 기념 터가 나타났다.
기념관인 제승당(制勝堂) - 충무공께서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 현재의 건물은 1976년 10월에 중건한 것이며, 공의 전적을 그린 다섯 폭의 벽화가 있음-으로 들어서는 마당 우측, 견내량 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바로 그 ‘수루水樓 ’가 있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사실을 확인해 보면, 위 시가 난중일기에 실린 것이 아니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라고 하니 정말 한산대첩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이 수루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저 시를 실제로 읊었을지는 모르지만, 당시 건곤일척 큰 전투를 앞두고 달빛 환한 망루에 올라 이제 곧 눈 앞 저 바다로 몰려 올 수백 척 왜선과, 내륙을 유린하고 있는 왜군들의 만행을 상상만 하여도, 우국시 한 수 정도는 절로 떠올리셨을 것이다. 공께서는 그 긴 전쟁 통에도 7년 간 거의 매일 진중일기를 썼는데, 이 진중일기가 정조 조에 ‘이충무공전서’로 간행되면서 편의 상 난중일기로 칭하였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공께서는 이 진중일기에 전쟁일지만 쓴 것이 아니다. 엄격한 진중생활, 전투 전후의 기록, 수군 통제전술, 아래 장수와 일개 병졸들까지 위무하고 때로는 음참마속으로 수하를 벌하는 뜻을 남긴 전쟁일지이자,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았던 권율과 원균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과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하였고, 특히 홀로 계신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뜻도 많이 적으면서 일기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신변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인간적 번민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일기를 쓰신 것이다. 때문에 단종에게 사약을 바친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저 물도 내안 같아 울어 발길 예놋다”도 민간에 구전되다가 단종 복위 후에 한시로 기록된 것이 정설이니, 충무공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위 시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함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 중 가장 참혹한 7년 전쟁인 - 이제는 조일전쟁이라는 정명 절차를 밟고 있는 이른 바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 중에서도 왜군이 서남해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고,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결국 일본의 조선 침략이 패퇴로 끝나게 되는 계기가 되는 한산대첩, 그 전투가 일어난 지 42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역사의 현장에 와 그 수루에 올라 남쪽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라다보는 남해는 푸르기는 마찬가지지만 내가 늘 보고 접하는, 거칠 것 없이 망망한 동해바다와는 사뭇 다르다. 섬과 섬들이 이어져 호수처럼 잔잔하고 조용하다. 이 고요한 바다가 420년 전 거세게 요동치면서 500년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었고,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幕府)의 종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00년 덕천(德川)막부를 열게 해 주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바로 그 전쟁터였다고 하니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공의 영정을 모신 제승당(制勝堂)에 들려 경배한 후, 천천히 마당 한 바퀴를 돌고 있는데 이름 모를 상록수가 몇 그루 보인다. 선착장 입구에서 본 아왜나무도 수루 뒤편에 울타리로 무리지어 이 겨울에 초록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일행들이 먼저 내려갔지만, 돌아가는 배 시간이 남은 것 같아 오를 때 본 동백나무와 팔손이를 스마트폰에 담으면서 겨울에도 늘 푸른 이 나무와 꽃을 조금 더 감상하기로 하였다. 사실 이 길을 올라 올 때 팔손이나무를 보면서 나는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팔손이는 관상용 식물로 화원(花園)에 가면 화분에 심어 다른 관상식물과 같이 상업용으로 키우는 것으로 알고 있고, 간혹 시설 좋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심어 키우는 식물이다. 그런데, 이곳 남도 섬자락에는 군락을 지어 자생하면서 이 초겨울에 푸른 잎뿐만 아니라 이제 막 흰 꽃을 피워 청백의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보는 관상용 팔손이는 피마자 입처럼 생겼고, 꽃도 피지 않아 관상식물로서는 그렇게 흥미를 끄는 식물이 아니었는데, 12월 겨울 노지에서 사람의 키보다 더 크게 웃자라며 푸른 군락을 이루고 흰 꽃을 가득 피워내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팔손이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었다.
“옛날 인도에 ‘바스바’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공주의 열일곱 생일날 어머니가 예쁜 쌍가락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공주의 한 시녀가 공주방을 청소하다가 반지에 호기심이 생겨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각각 한 개씩 껴 보았다. 그러나 한번 끼워진 반지가 빠지지 않자 겁이 난 시녀는 그 반지 위에 다른 것을 끼워 감추었다. 반지를 잃고 슬퍼하는 공주를 위해 왕이 궁궐의 모든 사람을 조사하자, 시녀는 왕 앞에서 두 엄지를 제외한 여덟 개의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그 시녀는 팔손이나무로 변했다.”
그러니 이 팔손이는 분명 저 먼 남쪽나라에서 건너 온 아열대식물이고, 그 전설은 전하는 사람의 말처럼 단지 전해 내려오는 슬픈 전설이 아니라 자비로움이 없는 힌두신, 그 힌두신을 경배하며 포악한 정치를 거리낌 없이 하였을 그 시대를 일러 주는 것이다. 모든 전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절망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래서 팔손이는 이 겨울에 꽃을 피워내며 인간들에게 꺾이지 않는 희망의 손짓을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동백꽃은 아직 일러, 작은 꽃송이 몇 개 정도만 큰 키의 동백나무가 피워내고 있었다. 미당의 시, 선운사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처럼 진짜 붉디붉은 동백을 보려면 3월 초 고창을 한 번 다녀와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지만, 때가 맞지 않으면 생각은 마음에서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십여 년 전 4월 초, 구례 화엄사에 갔다가 산수유꽃이 온 마을을 노랗게 뒤덮은 광경을 보았지만 화엄사 뒤뜰 동백은 붉은 꽃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다. 양손의 떡을 모두 갖으려는 것은 욕심이 지나친 것이니 마땅히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팔손이나무에 더 눈길을 주다가 일행과 함께 선착장으로 향하였다.
내려가는 길 언덕에는 드문드문 키 작은 동백나무가 서 있고, 길섶에 사철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데 무심결에 지나치다 청미래덩굴 열매보다 작은 주황빛 꽃망울이 맺혔기에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무심결에 지나칠 뻔 한 것은 사철나무야 이곳 남쪽 지방뿐만 아니고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상록수이기에 특별히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조경수든 울타리용이든 사철나무에서 붉은 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옅은 붉은 꽃이 피어 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다가가 좀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은 주황빛 껍질 속에 붉은 열매를 머금고 있는 사철나무의 열매였던 것이다. 역시 나중에 확인하여 보니 사철나무는 여름에 흰 꽃을 피우고, 늦가을 붉은 열매를 맺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무튼 처음 보는 사철나무 열매를 보고 눈이 보배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근접 촬영으로 폰에 담아 보았다.
이제 돌아가는 배 시간에 거의 다다랐다.
그리고 아껴 온 말을 이제 할 것이다. 나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동백나무 외 겨울에도 늘 푸른 상록활엽교목으로는 사철나무 밖에 본 적이 없었는데, 2010년 경 우연히 고향 마을 당저리 골안으로 들어서는 길 가에 2미터가 조금 넘는 상록수를 보았다. 그 상록수는 동백나무와 비슷하였지만 잎이 동백이나 사철나무처럼 둥글지 않고 조금 뾰족한 타원형으로 겨울에도 푸른 잎이 싱싱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지방이 해양성 기후 덕분으로 겨울이 비교적 따뜻한 곳이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그 나무가 너무나도 경이로워 이 상록교목나무 아래서 한 참을 쳐다보다가 진녹색 나뭇잎을 한 잎 따 찢어 보았다. 그 두껍고 반질반질한 나뭇잎은 기름지고 내피에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 모를 나무는 이태 전인 2011년 2월 대폭설에 한쪽 큰 가지가 찢겨져 나가 흡사 외팔이 형상을 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해 내내 나는 그 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마음 한 켠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해 봄, 그 자리에 마을공원이 조성되면서, 시(市)의 위탁을 받은 조경업자는 아예 그 나무를 파버리고 그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말았다. 아, 이 무지한 사람들, 먼 남쪽에서 올라 와 매해 겨울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늘 푸른 잎으로 아열대 식물의 북방한계선을 혼자 온몸으로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이 귀한 나무를 무자비하게 잘라버리다니, 나는 장탄식을 하면서 그 나무에게 한 인간으로서 ‘미안하다’는 조사를 바쳤다. 이후로도 한동안 아쉬운 마음이 내내 떠나지 않다가, 다시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면서 마을공원에 새로 심은 느티나무가 나목(裸木)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그 이름 모를 상록수가 문득 더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오늘 이 한산섬에서 마음에서 떠 내보내지 못한 그 이름 모를 상록수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사실 처음 섬에 들어 설 때, 제승당으로 올라가는 입구부터 어디선가 본 듯한 상록수가 울타리처럼 군락으로 펼쳐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나무의 생김새가 필자가 삼척에서 마지막으로 본 단 한그루의 바로 그 상록수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아니 그 나무가 분명하였다.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으로 다시 배로 돌아가 선장님에게 나무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뭐라드라... 아애나무라던가, 안내표시에 써 있을 낀데요”
“아애나무? 그래 공원에 가면 나무나 식물에 대한 설명을 조그마한 표시판으로 써 놓기도 하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분께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다시 그 상록수 군락지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그 나무가 ‘아왜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제승당 입구, 꽃을 피운 팔손이와 마주친 근방이었다. 그곳에도 섬에 처음 들어섰을 때 만난 그 상록수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 ‘아왜나무’라는 작은 표식이 달려있었다. 아, 드디어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인동과의 상록소교목주로 10미터 정도이며,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이며 두껍고 윤기가 난다. 꽃은 6월에 흰색의 원추로 피며, 열매는 9월에 빨간색의 핵과(核果)가 익는다. 산울타리의 소재로 많이 쓰이며, 한국의 제주ㆍ남해 섬, 일본의 오키나와,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정원수로 심으며, 불에 잘 타지 않고 잎에 윤기가 있기 때문에 방화용수나 생울타리용으로 이용한다.”
섬에서 나와 내륙으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아왜나무’를 검색해 본 내용인데 대만과 우리나라 제주, 남해의 섬에서 자생한다고 하니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나무임이 분명하였다. 그런 나무가 어쩌다 우리 중부지방까지 올라와 자라며 여름에 꽃도, 가을에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면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다가 어느 날 무참히 잘려나갔으니, 그 나무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한 마음을 들었다.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 유적지에 왔다갔다는 것을 인증하기 위하여 유적지를 배경으로, 섬자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겨울에 피는 꽃도, 처음 보는 울창한 상록수에도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모두 포근한 겨울 날씨에, 한잔의 낮술에 몸을 맡기고 뭍으로 나갈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배가 도착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한산섬을 바라보며, 아왜나무와 팔손이 꽃과 작별을 하였다. 우측으로 거제도가 보인다. 이쯤이 견내량인가, 420년 전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세운 그 바다를, 눈이 부시게 맑고 푸른 남해바다를 나는 다시 천천히 응시해보았다. 통영 - 한산도 왕복 유람선이 통영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2시간에 걸친 한산섬 기행이 종착점에 다다른 것이다.
선창의 물 비릿내와 톤 높은 경상남도 아저씨의 호객소리가 나그네의 옷섶을 부여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