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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점정리(重點整理) a. 야율아보기(耶律牙保機)가 916년 건국하여 발전함. 2. 글안의 고려침입 : 글안 전후 3회 침입함(1차 서희 외교, 2차 강조의 변으로 일어남. 3차 구주대첩)
3. 전후 4대 시책 : a. 나성축성. b. 천리장성의 축소. c. 대장경의 조판. d. 국사의 편찬 |
가. 글안의 부흥기와 고려와의 대립
(1) 글안의 부흥기 :
나말 글안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국동북부의 제 부족을 통일하고
임황(臨黃 : 東上流)을 서울로 정하고 황제라 칭하였다.(916)
그후 발해를 멸하고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글안 太宗 때 大遼라 개칭함.>
(2) 고려와의 대립
(가) 고려 : 북진정책으로 글안에 대하여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 송(宋)과는 친선외교를 취하였다.
(나) 글안 : 신흥 송과의 충돌이 생기자 친송관계가 깊은 고려지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 이러한 양국의 북진 및 동진정책은 필연적인 대립을 초대하였다.
나. 글안의 고려침입<993∼ 1018>
(1) 글안의 1차 침입<성종 12년 993>
(가) 원인
1) 고려의 친송 정책과 여진의 대송 교통은 송과 대립하고 있는 글안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여진과 고려를 먼저 눌러 놓을 필요가 있었다.
2) 고려의 북진정책은 글안의 동쪽 발전과 양립할 수 없었다.
(나) 경과
1) 성종 12년(993) 글안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중군사(中軍使) 서희(徐熙)로 하여금 이를 방어케 하였으나
글안군은 이미 봉산군(蓬山郡 : 평안도)에 까지 육박하였다.
2) 서희의 외교 :
이때 서희는 서경이북의 땅을 떼어 주자는 주화파를 물리치고 단신 글안의 진영에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하여
그의 침략을 비난 설파하여 강동 6주(江東6州)을 얻는 반면
글안에 조공할 것을 약속하며, 글안군을 물러가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다) 결과
1) 고려는 서희의 외교의 성공으로 강동 6주를 얻음.
2) 고려는 요의 연호를 쓰고 조공을 함.
3) 이 침입의 계기로 북진정책의 이상을 수행한 셈.
☞ 강동 6주(江東6州) 용주(龍州)<용천(龍川)> 통주(通州)<선천(宣川)> 곽주(郭州)<곽산(郭山)> |
(2) 강조(康兆)의 정변<1009∼ 1010>
(가) 성종(成宗 : 6대) 다음 7대 임금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왕모(王母)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또 그 사이에 사생(私生)한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하였다.
(나) 목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당숙(堂叔) 대량군(大良君)을 후계로 삼으려 하며,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로 하여금 서울에 와서 지킬 것을 명하였다.
☞ (다) 이에 강조는 5,000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중도에서 딴 마음을 먹고
개경에 달려와서 김치양을 몰아내고 목종을 죽인 다음 대량군을 맞이하여 왕을 삼으니 이가 곧 제 8대 현종(顯宗)이다.
(3) 글안의 2차 침입<1010∼ 1011>
(가) 원인 : 계속적인 고려의 친송정책과 때 마침 일어난 강조의 난을 구실로 침입.
(나) 경과
1) 글안 성종(聖宗)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1010. 10월)
통주(通州) 서경을 거쳐 이듬해에 개경에 들어와 성내를 분탕회진(焚湯灰盡)하였다.
2) 이에 강조는 통주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강화케 하여 적은 곧 물러갔다.
이때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楊規)는 곳곳에서 글안군을 추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다) 결과
1) 글안은 여왕(麗王)의 친조(親朝)를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행치 않았다.
2) 글안의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방비를 엄히 하였으며 또한 민족의식이 생기었다.
(4) 글안의 3차 침입<1018>
(가) 원인 : 강동 6주의 환부 및 여왕(麗王)의 친조를 거부한 것을 구실 삼아 침입.
(나) 경과
1) 글안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군으로 침입하였으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은 20만 군으로 영주(寧州)에서 홍뢰진에 이르는 사이에
방어진을 치고 압록강을 건너는 적에게 일격을 가하였다.
2) 구주대첩(龜州大捷 : 1018) :
서경(평양)과 서울(개경) 가까이 온 글안군은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고 부득이 돌아가게 되었을 때
명장 강감찬은 구주(귀성)에서 글안군을 기습하여 거의 전멸시켰으니 이른바 이 명예로운 승전을 구주대첩이라 한다.
(다) 결과 :
구주대첩이후 글안은 전의를 잃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는 등 평화를 이루었으나
90년간에 걸쳐 고려는 많은 물질적 손해를 입었으며 반면 민족의식이 더욱 강하였다.
☞ 강조(康兆)의 항사 : 강조는 군사 30만을 이끌고 통주에서 요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실패하여 사로잡히었다. 이때 요주(遼主)로부터 항복하여 신하되기를 강요받았으나 끝끝내 듣지 아니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 하공진의 항사 : 요의 인질로 잡혀간 하공진은 거기서 상당한 우대를 받았으나 도망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성종의 국문을 받을세 "나는 본국에 대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요를 섬길 수 없다"하였다. 요주는 공진의 말을 의롭게 여기고 일단 용서하였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므로 죽음을 당하였다. |
다. 전후(戰後)의 4대 시책(施策)
(1) 나성(羅城)의 축소 :
글안과의 싸움 후에 국방과 성곽축조의 필요를 느끼어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이가도(李哥道)로 하여금 개경주위에 나성(羅城, 外城)을 축조케 하였다.
현종(顯宗) 즉위 초에 시작하여 동왕 20년(1029)에 완성하였다.
이성은 전부 토축으로 주위가 2,970보(步)나 되며 징발된 인원은 3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2)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 :
고려는 북경(北境)의 방비를 굳게 하기 위하여(즉 글안, 여진) 압록강(鴨綠江) 입구부근에서부터
동으로 영원(寧遠)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 : 定平부근)에 이르는 연장 약 천리의 장성을 쌓았는데
이 공사는 제 9대 덕종(德宗) 2년(1033)에 유소(柳韶)에 명하여 공사를 일으켜
제 10대 정종(靖宗) 10년(1044)에 이르기까지 약 12년간의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3) 대장경(大藏經)의 조판(彫板) :
불력(佛力)에 의하여 외적의 침략을 배제할 목적으로
현종(顯宗) 때부터 착수하여 덕종(德宗), 정종(靖宗)을 거쳐 문종(文宗)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었던 바 몽고침입 때 소실(燒失)되었다.
(4) 국사(國史)의 편찬(編纂) :
글안의 제 2차 침입 때 대묘(大廟) 궁궐(宮闕)과 함께 비고(秘庫)의 서적이 모두 소실되어
현종(顯宗) 4년 9월에 최항(崔沆) 김심언(金審言)등으로 하여금 문사(文士)를 모아 널리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새로 태조(太祖)로부터 목종(穆宗)에 이르기까지 7대의 사적(事蹟, 實錄)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德宗) 3년에 수국사(修國史 : 職名) 황주량(黃周亮)등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다.
▶이 7대의 사적은 모두 35권으로 7대실록(七大實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