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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대본
모든 일은 아주 갑작스러웠지만, 예상한 그대로 흘러갔다. 새로 수호자가 된 네 명이 천계를 향해 정식 선전포고를 선언한 뒤 천계의 사병을 말살해 버리고는, 곧바로 본인들의 신궁을 군사적 요새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옥황상제가 잠깐 동안 아미를 짚었다. 저들을 처리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적당히 둘러댄 뒤 마침표를 맺으려 했지만 전대 신수들이 죽기 직전 그들에게 힘을 넘겨주며 자신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을 관심법으로 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지존은 이 정도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상제는 즉시 아내인 서왕모를 천궁의 침소로 불러넀다. 상제는 세간의 반대를 무릎쓰고 혼인했을 때, 그녀와 함께 나누어 낀 옥가락지를 세심하게 매만졌다. 아내를 부르는 다정한 부군의 속삭임이었다.
"내후(內侯). 지금 당장 와 주어야 할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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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서왕모는 반도원에 있는 나무의 잔가시를 한창 쳐내고 있던 중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아름다운 외모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전대 사신수를 죽인 것에 대해 그리 큰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고명딸을 살려야 했으니까.
[내후, 지금 당장 와 주어야 할 것 같소.]
그러나 부군과 나누어 낀 옥가락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왕모의 아미가 그대로 찌푸려졌다. 현녀는 서왕모 본인이 연달아 아들 둘을 낳은 뒤 태어난 그녀의 귀한 고명딸이었다. 본래 어미는 아이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법이다. 나무의 잔가시를 쳐내는 그녀의 표정이 빳빳히 굳어 있었다.
서왕모는 오래지 않아 천궁의 침소로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분노에 파르르 떨고 있는 아름다운 여체를 상제가 끌어안아 토닥여 주었다. 착잡한 표정의 옥황상제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어찌 하면 좋겠소. 지금 당장은 그들을 죽일 수가 없을 거요. 그들은 새로 태어난 수호자인 데다가 무기마저 전부 갖추고 있으니 없애는 게 불가능하오."
부군의 말에 서왕모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녀 자신과 부군인 상제는 이미 손아귀에 피를 묻혔다. 신수의 무기인 주작의 활, 청룡의 언월도, 백호의 창과 발톱, 현무의 방패를 지닌 이상 그들은 아수라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몇억 번을 죽여도 다시 살아나겠지. 지난번은 운이 좋았다. 이번 수호자를 죽이지는 못할 테고. 그러나 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부군, 잔가시는 쳐내면 그만입니다."
"반도나무 내에 있는 가시를 쳐내야 그 과육이 더욱 달큰해지는 것처럼, 사신수를 죽이지 못하되 모두에게 배척당하게 하면 되겠지요."
생각보다 침착한 서왕의 표정은 결의에 차 보였다. 옥황상제는 아내의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죽이지 못한다면, 힘을 잃게 만들어 노예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옥황상제가 말없이 웃으며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는 듯이 답을 이어가 주었다.
"우리의 따님과 아드님을 차례대로 마계와 수계로 보내 사신수를 배척하도록 만들어야겠군요."
그래. 그 둘만 등을 완전히 돌리게 되면 신수들의 입지는 그저 종잇조각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리겠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이내 서왕모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상제에게 아양을 떨며 그에게 안겼다.
"우리 따님이 잘 해결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닮아 총명하고 영명하니 무엇이든 잘 해낼 겁니다."
상제가 서왕모를 쓰다듬자, 두 사람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2주차 대본
그동안 잔챙이들을 전부 처리하고 죽이는 데 성공한 네 명의 신수들은 이제 수장들을 설득하기 위해 각각 둘씩 짝을 지어 용궁으로, 그리고 저승으로 뛰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용왕은 전대 청룡의 부친이자 현 청룡의 외조부였으므로 어느 정도 말이 통했던 덕분에 용왕은 이 상황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다고 백호와 현무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문제는 하백이었다. 하백은 상제의 사생아인 해모수의 외조부였다. 하백의 딸인 유화가 상제의 매혹적인 모습에 반해 해모수를 낳은 뒤 곧바로 죽어버렸던 것이다.
백호와 현무는 하백의 군사들을 모조리 베어 없앤 뒤 하백과 낙빈의 처소로 쳐들어갔다. 하백은 손자의 생사가 달린 이상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라 말하며 그의 무기인 단검을 소환해 휘둘렀다. 그러나 현무가 자신의 방패로 그것을 막았고, 백호가 자신의 발톱으로 하백을 크게 할퀴었다. 백호가 제 창으로 하백을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세 분 모두 그만 두시지요."
그 말은 의외로 세 사람에게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현무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호. 명계로 가자."
"명계에는 왜?"
"가면 알 거야."
안타깝게도 승기는 천궁이 아닌 사신수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백호와 현무의 싸움은 생각보다 시시껄렁하게 끝이 났다.
그러나 청룡과 주작은 상당히 고난의 세월을 겪고 있었다. 상제와 서왕모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명계로 가는 길을 전부 용암 덩어리가 끓고 있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현녀가 더 빨리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겠지. 두 사람은 억지로 화를 참아내며 제 무기를 꽉 쥐었다. 설상가상 빛이 들지 않는 명계에 추위마저 들이닥치자, 청룡이 용암 근처 동굴에 주작을 끌고 들어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주작이 그에게 물었다.
"우린 살겠지?"
청룡은 아무런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들에게 죽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린 죽지 않아. 아수라를 없애게 되면 난 이 곳을 떠날 거야."
"...그럼 나도 갈래."
"신궁을 떠나게?"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는 이제 미련이 없어."
주작이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이는 청룡을 바라보더니, 자신도 함께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불로 몸을 조금 녹이고, 마침내 화염 구덩이가 삽시간에 널려 있는 저승 앞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현녀를 보고 청룡과 주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간신히 저승에 도착한 그들은 마존에게 간청하려 했지만 이미 도착해 있었던 현녀가 네 신수가 천계를 차지하려 한다며 슬피 울며 마존에게 호소한 지 오래였다.
어이가 없어진 청룡과 주작은 극구 그 사실을 부인하며 현녀와 말싸움을 했다. 두 사람은 현녀가 아수라임을 모르고 있었지만, 뻔뻔하기 그지 없는 어린 생각에 절로 눈쌀이 찌푸려졌다.
"역시 와 있었군."
"지금이라도 투항하는 게 좋으실 거예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명계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자비를 베푸셨으니까요."
주작은 잘도 현녀를 도발했다. 도발을 하면 할 수록 이성은 사라지고 틈이 보이는 법이다. 그가 그대로 정곡을 찔렀다.
"아니. 널 봐서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맹랑하기 짝이 없는 애를 난 섬기지 않아."
"…그렇다면 끝장을 보는 수밖에요."
현녀가 쇠로 된 부채를 들어 주작을 찌르기 무섭게 청룡의 언월도가 부채를 막아섰다. 청룡이 노기 띤 눈으로 소리쳤다.
"네 부모가 아수라인 것을 어찌 모르는가!"
주작이 소리를 그저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현녀는 천계는 오로지 천제와 서왕모의 것이니 욕심을 버리라고 경고하며 무기인 부채로 살을 날리며 공격했다. 그러나 그에 질 만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사신수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청룡은 현녀의 부채를 언월도의 칼집 하나로 튕겨내 버렸다. 상상보다 훨씬 강력한 힘에 현녀가 당황했을 무렵, 주작이 그녀에게 활을 쏘았다. 화살이 심장 부근에 제대로 박혔다.
"윽....! 왜, 오...ㅐ.....으윽...무...슨...."
그러나 그 동시에 현녀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냄새를 맡았다. 그동안 자신이 줄곧 맡아왔던 냄새, 지독한 향기. 파괴지왕을 나타나는 이마 위 검은 보석이 비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빨려 들어가듯 기억을 읽었다.
[네가 아수라였구나.]
그리고 두 사람은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부모가 마지막으로 상제와 서왕모에게 죽음을 맞기 직전, 아수라인 현녀의 부채에 자신들의 기억 한 조각을 심어 놓았던 것이다. 현녀가 아수라다. 상제와 서왕모가 아니라, 현녀였던 것이다.
폭주하는 아수라를 보고서 두 사람은 활과 언월도를 바로 고쳐 잡았다. 그러나 청룡과 주작은 어딘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아는 것 같이.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이 바라오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소인도 돕지요."
그는 해모수였다. 결의에 찬 듯한 그는 다행히 백호와 현무, 그리고 친우인 염제와 함께 제때 명계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누구보다 네 사람의 원수가 되어야 할 해모수가 그들을 돕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친딸인 현녀를 저승의 사절단으로 보내기 전날, 서왕모는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반도원으로 해모수를 따로 불러냈다. 마침 용궁의 사절을 준비하던 해모수는 서모인 서왕모의 부름을 받고 묵묵히 처소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해모수의 친우인 염제는 그를 염려했다. 대외적으로 서왕모는 냉혹하고 자비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과 원을 확실히 쳐서 갚는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반도나무를 만 년 동안 잘 다스려 왔던 그녀를 존애하지 않는 자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해모수는 유화의 아들인 상제의 사생아였다. 서왕모는 상제의 앞에서 그에게 잘해주는 척 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겉과 속이 다른 서왕모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염제는 친우인 해모수를 말렸지만, 가지 않으면 부황인 옥황상제에게 힐난을 들을 것을 뻔히 알았던 그는 친우인 염제에게 반도원 근처에 숨어 있으라 말하고는 서왕모를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마마."
해모수는 서모에게 절을 올렸지만, 상대는 반응하기는 커녕 고개조차도 돌리지 않았다. 반도나무의 주인은 크고 작은 가시가 돋고 까슬하거나 조금 물러터진 복숭아들을 보고 날카롭게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해모수가 입술을 떼기 무섭게 차가운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왔느냐."
서왕모는 매우 오만한 눈빛으로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해모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젊은 시절의 상제를 보는 것처럼 똑같이 닮은 얼굴과 수려한 용모,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아니니 없애도 시원치 않다. 서왕모가 그를 불렀다.
"그래. 아가, 그만큼 키워 주었으면 마땅히 보답을 할 줄 알아야지."
이미 서왕모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명계의 절반을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린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이었다.
"하백을 설득해 백호와 현무를 죽여라."
"그리고, 너도 스스로 자결하여 청룡과 주작에게 누명을 씌워야 한다. 그게 네 마지막 임무다."
실로 끔찍한 계획에 해모수는 소름이 끼쳤다.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해모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청룡과 주작에게만 이 끔찍한 계획을 깃털로 만든 연통으로 날려 보냈다. 결국 세 사람의 합작이 성공한 것이었다. 백호는 폭주하고 있는 아수라를 보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는 쏙 빼놓고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어!"
"넌 알면 바로 얼굴에 티가 나잖아."
시시껄렁한 농담조가 오고 가는 것도 잠시, 다섯 사람은 표정을 굳혔다. 이미 아수라의 이마에는 검은 흑요석이 있었다. 침묵하고 있던 현무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며 아수라가 된 현녀를 노려보았다. 아수라를 이길 수 없었던 해모수와 염제는 신력을 발휘하여 불구덩이가 된 명계를 다시 본래대로 회복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네가 아수라로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다. 허나 파괴지왕에게 줄 것이라고는 영원한 자비 뿐이지. 다음 생은 평온하기를."
청룡은 엄숙한 목소리로 비명소리를 내며 명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있는 현녀를 향해 일갈하며 드디어 언월도의 칼집을 뽑았다. 이제 불안정한 상태는 전부 끝이 났다. 아수라의 이마 위 흑요석 안에 자리잡았던 기억의 한 조각이 다시 네 사람에게 돌아왔으니, 이제 충분히 아수라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주작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저 애를 봉인하는 게 최우선이야. 그리고 이게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 되겠지."
그러나 청룡은 수긍하지 않은 채 언월도를 그대로 아수라에게 휘두르며 주작의 뒷말을 이었다.
"아니. 가장 악질적인 인물들이 남았잖아. 아직은 아니야."
"누구?"
"그들."
아, 그랬지. 천제와 서왕모가 남아 있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수라가 현무의 방패를 꿰뚫자 주작의 활, 청룡의 언월도, 백호의 창이 동시에 아수라의 목을 노렸다. 아수라는 검은 기운을 쏟아내며 해모수와 염제를 죽기 직전까지 기절시켰다.
현무의 뺨에 독이 스며드는 순간, 방패로 간신히 공격을 방어하며 신음을 흘렸다. 휘청이는 현무를 백호가 감쌌다. 주작은 현무의 방패를 지지대 삼아 지탱하면서, 간신히 한 팔로 활을 쏘아 아수라의 어깻죽지에 맞추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뺨을 맞추려던 계획에서 빗나갔지만, 다행히 청룡이 그를 단단히 지탱했다. 청룡의 두 눈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드디어 마지막에 가까이 닿은 전쟁의 시작이었다. 흘러가는 말 뿐이 아닌, 이제 그들은 진정한 세계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곧이어, 청룡은 형형한 두 눈을 한 채 그대로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그가 언월도의 날로 눈앞의 아수라를 그대로 갈랐다.
진정한 봉인이었다.
3주차 대본
청룡의 도에 목을 꿰뚫린 아수라는 한동안 끊임없이 발버둥쳤다. 날이 바짝 선 도로 목을 정통으로 꿰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자리잡은 검은 흑요석이 빛을 내며 주위를 온통 짙은 검정으로 물들였다. 그러나 청룡은 힘겨루기를 하던 와중에서도 결코 제 언월도를 놓지 않았다. 놓는다면 또 다시 무용지물이 되겠지. 핏발이 선 두 눈을 한 청룡을 본 주작이 힘겹게 활시위를 당겼다. 한쪽 팔이 온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작의 활을 당기려 하는 그를 본 청룡이 붙잡으며 염려했다.
"일단 팔부터...!"
"됐어. 나 괜찮아. 너 있잖아."
애써 고개를 저은 주작이 이를 악물고 활시위를 당기자, 그대로 그의 본신을 닮은 불과 같은 화살이 아수라의 이마에 꽂혔다. 끄윽, 끅! 끼익...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는 육신 사이로 검은 기운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것들이 명계의 땅을 폐허로 만들고, 온 세상을 모조리 다 검게 물들이더니 결국에는 새까맣게 만들었다. 현무가 방패로 쏟아지는 독들을 막아내며 생각했다. 천제와 서왕모는 이렇게 될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방관했다는 말인가. 모성애가 얼마나 위대한가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부모들 역시 자신들을 위해 희생했을 테니까.
그러나 자식을 살리겠다는 이유로 양아들인 해모수마저 이용하고 죽이려 했던 서왕모는 과연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것인가? 역겨움에 질린 듯한 현무는 평소답지 않게 방패를 쥔 채 아수라에게 달려들었다. 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목을 찌른 언월도가 더욱 깊이 박혔다. 그리고 마침내 백호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자신의 창을 소환해 흑요석이 반짝이는 이마를 향해 내려찍으니, 종래에는 발작하던 육신이 천천히 굳어가며 팔 다리를 꿈틀거렸다. 청룡이 마치 도살하듯 목에 꽂힌 도를 쫘아아악 아래로 내려 찢었다.
"없어진다. 저거."
"그러게."
마침내 아수라의 이마에 자리잡은 흑요석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네 사람은 드디어 완전한 끝이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던 아수라의 이마 위 흑요석은 조각 조각 갈라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흑요석이 가라앉을 수록 아수라의 외양이 현녀의 본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조각이 바닥으로 추락하자, 온통 새카맣던 명계가 그제서야 빛을 띄웠다. 현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현녀의 목에 손을 올렸다. 과연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때?"
"숨이 끊어졌어. 다시 못 살아날 것 같아."
청룡의 물음에 현무가 고개를 저었다. 흑요석이 깨져버린 이상 확연히 숨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더욱이 그만큼 많은 피를 흘렸으니 더더욱 소생의 가망이 없다는 뜻이었다. 너는 과연 아수라가 되고 싶어서 되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죄가 없다고 말을 할 수도 없겠지. 백호가 축 늘어진 현녀를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어린 백호는 가끔씩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환생 여부는?"
"잘 모르겠어. 아마 향후 오천 년은 불가능하겠지."
"다행이네."
"왜?"
어리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자 그것을 눈치챈 현무가 백호에게 물었다. 백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잃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해 평온한 삶을 전부 잃었으니 당한 것 치고는 너무 편하게 죽은 셈이다.
"살아났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테니까."
섬찟한 그 한 마디를 들은 현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서 기절해 있는 해모수와 염제를 챙겼다. 이제 단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꾸민 장본인.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짓고도 여즉까지 천궁에 군림하고 있는 두 사람. 그러나 정이 많은 현무는 못내 심란한 얼굴로 현녀를 보았다. 그런 그를 일깨운 것은 해모수와 주작을 나란히 등에 걸치고 있는 청룡이었다.
"결국 선택은 자기가 한 거야. 싫다고 생각만 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어."
"빨리 천궁으로 가자. 아직 남았잖아."
청룡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서 주작을 이끌고 본신인 용으로 변신해 모든 이들을 제 등에 태웠다. 용이 천궁으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괴물의 시체는 그대로 남겨둬 놓고서.
"감히 나를 이런 곳에 가둬 놓느냐!!!!!"
예상대로 서왕모는 발악했다. 반도나무에 딸린 별저에 갇힌 꼴은 제법 볼 만 했다. 서왕모는 해모수를 저주했다. 현녀를 찾았으며 현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결국에는 미쳐 버렸다. 해모수와 사신수들은 천제를 직접 반도원에 데려다 주었다. 미친 아내를 평생토록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죄일 것이 분명했다. 천제는 자신의 이기심과 무지함에 결국 이기지 못한 채 텅 비어있는 동공을 한 채 희뿌연 허공만 보았다. 해모수가 그동안 줄곧 살아오며 질기게 목숨을 연명해 왔던 것. 그것을 부황인 천제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 사신수와 옥황상제의 계승식은 이루어졌다. 면류관을 쓰고 상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해모수의 모습은 썩 괜찮아 보였다.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주작이 청룡을 비롯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그에게 물었다.
"이제 우린 전부 떠날 거야. 넌 어쩔 건데?"
천제의 자리를 이어 받은 해모수가 궁금한 듯 네 사람에게 되물었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인간 세상에 갈 거야. 가서, 많은 모습을 겪고 지켜볼 생각이야. 인간 세상에 나라를 세우면 더욱 좋겠지."
해모수는 내심 네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면류관의 무게를, 천궁과 천제의 무게를 짊어져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을 테지. 해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으로 청룡이 무표정하게 말한 그 한 마디를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너도 이제 네 인생을 살아. 세상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어. 네게도 하나 정도는 있겠지. 그 중 하나를 골라서 택하면 돼."
해모수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청룡은 주작을 비롯한 세 사람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다. 그는 끝까지 지독히 건조했다. 그러나 그랬기에 그가 성전의 승리자였고, 그랬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사신수들이 진정한 수호자일지도 몰랐다.
계승식이 끝나자마자 사신수들은 인간계에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성전국(星戰國)이라 낙점 지었다.
신이 세운 제국이 지극히 위대하고 고결한 역사를 써내려 갔다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마친다.
가장 잔혹하고도 성스러운 혈전을 펼쳐 보기 좋게 승리한 뒤,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끝맺음으로.
멋쪄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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