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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년 전, 조선의 강토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국토를 황폐화시켰고 수많은 조선 백성을 살육했다. 왜군의 칼에 잘린 조선인들의 코는 일본으로 건너가 ‘전리품’으로 전시됐다. 약탈과 강간, 노예사냥 등 있을 수 없는 잔혹한 행위가 이 땅에서 벌어졌다. 1597년 정유년에 발발한 이 전쟁을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
1592년 ‘정명가도’를 구실로 일으킨 ‘임진왜란’에 도요토미는 끝내 손을 들었다. 동인, 서인, 싸우며 지새우느라,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이 아니었다면 일본 땅이 되었을 것이다. 왜군은 의병을 계산에 넣지 않아서였다. 이 책 167쪽에 이런 글이 있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강화 협상기에 의병장들을 역모 혐의로 처형 또는 제거해 의병 운동을 위축시켰다. 특히 정유재란 발발 직전인 1596년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뒤여서, 조선의 선비들은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어도 의병을 일으키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구하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오해를 사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인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나라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조선이 되었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못 만난 결과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왜군이 부산 다대포에 상륙한 1597년 1월부터 이듬해 1598년 12월까지 2년간 이어진 전쟁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피해는 임진왜란 때보다 몇 곱절 컸다. (…) 일본의 1차 침략이 ’정명가도‘의 명분이었다면, 2차 침략은 ’조선 점령‘이 주목적이었다. |
일본을 평정한 칼잡이들의 칼날에 코가 날아가고, 조선 백성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 되어 삼천리강산이 피로 물들었다. 백성이 죽어 나자빠져도 임금 자리는 지키고 싶고, 참으로 무능하고 어처구니없는 선조였다.
도요토미는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남부 4개 도, 특히 호남을 우선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조선 남부 지역에 사는 조선인의 씨를 말려버리고 대신 일본인을 이주시켜 살게 하겠다는 야욕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
이런 야욕 때문에 순진무구한 조선인들은 무참히 살육되었고 수많은 백성이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가 언제 죽었을까? 내심 참 궁금했다. 조사를 해보니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 ‘정유재란’ 중에 죽었다. 이때 죽었기에 망정이지, 살아있었다면 더 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과 조선 수군과 명 수군이 최초로 연합 해전을 펼쳐 승리한 ‘노량해전’ 역시 모두 정유재란 때 벌어진 일이다. 정유재란은 동아시아 3국이 싸운 16세기 최대 규모의 국제 대전이었다. 포르투갈 계 용병과 타타르 출신 거인, 몽골의 기마병, 마오족 등 동남아시아 소수민족들도 대거 참전했다. |
일본 정치인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성격을 구분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분로쿠文祿의 역役’ 이라고 해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대외 전쟁으로 보고, ‘정유재란’은 ‘게이초慶長 의 역役’ 이라고 해서 조선 정벌의 전쟁으로 구별했다. 은혜를 모르는 왜인들이었다. 백제, 신라, 조선의 문화가 일본을 꽃피게 해준 것을 깡그리 잊고 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섬나라 근성은 ‘독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위정자들은 진실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유재란’에 참전한 ‘규슈’지역의 ‘다이묘’들은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무수한 도공을 납치해갔다. 또한 국보급 도자기를 거의 다 빼앗아 갔다. 그래서 혹자는 ‘도자기 전쟁’ 이라고 했다.
끝으로 이렇게 말한다.
(…) 정유재란의 역사 현장은 ‘잊혀진 전쟁’임을 확인시키듯 철저히 파괴되고 왜곡돼 있었다. 왜군들이 주둔했던 왜성들은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피땀 흘려 지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왜색이라는 이유로 방치되거나 엉터리로 복원된 경우가 적잖았다.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수군 주둔지였던 순천의 ‘장도 섬’은 개발의 삽질로 무참히 파손돼버렸다. 이런 현장을 목격하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 |
저자 「안영배」 는 멸실될지 모를 정유재란의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후손들이 보고 깨닫게, 국난의 유적 유물은 원형 그대로 남겼어야 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분별없는 짓을 했는지 반성도 해야 한다. 우리는 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처럼 고스란히 보전하지 못하는지도 반문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잊은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끝. 2020.8.2.일.
2020.8.7. 금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