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3장 1-4절
1.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면서 그 땅의 모든 주민을 다 내쫓고 그들의 단을 다 허물라고 하셨다. 이 전쟁들은 이스라엘이 막강한 힘이 있어서 정복해가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모든 우상의 근원을 쳐부수는 싸움이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순종하고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은 이 싸움을 계속해 나아갈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즉 타협하기 안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특별 조치를 취하셨다. 그 땅의 거민들을 그대로 남겨 두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겠다고 하셨다.
표면적으로 그 시험은 두 가지 의미였다. 첫째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였더라면 더는 치르지 않아도 될 전쟁을 앞으로 많이 치르게 될 것을 예고한 것인데, 이를 통해 선조들이 치렀던 정복 전쟁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음을 정확히 가르쳐 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두 번째는 순종이다.『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쟁은 바로 영적인 나가 육적인 나라는 존재와 싸우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이전의 “나” 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일곱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엘로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도가 되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이 일곱가지의 악한 모습을 부셔야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고 가신다.
2-4.『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자손이 오직 하나님만 그들의 신으로 삼고 하나님 안에 살며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그를 도왔던 장로들의 세대가 모두 죽고 가나안 전쟁을 전혀 겪어 본 일이 없는 세대가 등장하자, 그들은 윗세대가 치른 전쟁의 의미도, 그 전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우상과 타협하기 시작했고 안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조의 신앙을 되돌아보지 못한 이후 세대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잘 전수하지 못한 이전 세대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신앙은 단지 말로만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하지만, 삶으로 보이지 못한 말은 결코 마음으로 전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이후 세대의 책임을 분명 이전 세대에게도 물을 것이다. 하나님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를 맺어오고 계신 분이고, 이스라엘의 참된 살길은 무엇인지를 깨우쳐 알리는 방편으로 가나안 거민들을 남겨 두셨다. 물론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인해 되어진 일이지만, 이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이킬 길을 내셨던 것이다.
여기에는 네 족속이 등장하는데, 이는 동서남북 전체를 대표하는 족속인 것이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히위 족속이다.
블레셋은 그레데(Crete)에서 가나안 남부 해안 지대로 이주해 온 자들이다. 이들은 인종학상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을 조상으로 하고 있는 가슬루힘 지파(창 10:14)에 속한다. 이들은 사사 시대는 물론, 사울과 다윗 때와 남북 분열 왕조 동안 내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이후 이들은 성경에 예언된(슥 9:5-7)대로 알렉산더 대왕 때에 완전히 멸망당했다(B.C. 332). 다섯 방백은 블레셋의 5대 성읍인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가사의 방백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방백(사레네이)이란 호칭은 헬라어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인 '코이라노스', 또는 '타이라노스'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곧 블레셋인들이 그리이스 지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족속임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준다. 성경에서'사레네이' 또는 이에 준하는 '세렌'이란 호칭은 오직 블레셋 족속에게만 사용되어졌다.
가나안 모든 사람은 여호수아가 미처 다 정복하지 못했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들을 가리킨다.
시돈은 두로의 북쪽 32km, 베이루트의 남쪽 32km 지점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서, B.C. 2750여 년경 함의 아들 가나안이 낳은 장남 시돈(창 10:15)에 의해 건립된 도시라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주로 이웃 도시인 두로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마 11:21 ; 눅 10:13). 이 당시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이후에 이들은 베니게인이라고 불려졌으며, 이들이 거하던 베니게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히위 족속은 가나안의 후손으로서 가나안 후기 원주민으로 분류되어 진다. 이들 히위 족속은 대체적으로 호리족속과 동일시된다. 에서의 아내 오흘리바마가 창36:2에서는 히위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뒤에(창 36:20,25) 호리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들은 아마르나 시대(B.C. 15세기~14세기) 동안에 북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미탄니라는 매우 중요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미탄니 왕국은 당시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대적이 되었고, 레바논 산지와 하맛 어구(수 11:3 ; 삼하 24:7). 그리고 기브온과 그 주변 도성에까지 이주해 살면서 가나안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끼친 영향력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부스인 중 한 지도자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하 24:16에 아라우나'라고 하는 어떤 여부스인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때의 아라우나는 지도자란 뜻을 가진 히위인 들의 호칭이었다.
영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은 곧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육적인 자아에 둘러 쌓인 모습이다. 이게 성도의 모습이고, 현실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항상 성도는 자신이 부활된 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현실적인 육적 자아를 넘어가라는 말씀이다.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여기서 말하는 시험의 뜻은 1절에서 말하는 시험의 뜻과는 다르다. 즉 여기서 시험이란 2:22에서 의미하듯 열국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괴롭혀 그들의 신앙을 재확립케 하는 연단 내지 검증 과정을 가리킨다. 영적으로는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페이라조)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도키마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테 피스테이(τῇ πίστει)는 그 믿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시키신다는 그 믿음이다. 그 믿음을 소유한 자는 영적 자아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육적 자아에 속해 있는 자가 된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나사)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모리야 산에서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 속에서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부활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들려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가 영적 자아가 된다.
마태복음 4장 1절에서『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이는 욥이 시험받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데, 성령에 이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승인 아래 연단을 받는 것이다. 시험을 받는 것은 합격 불합격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영적 자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육적 자아에 있는 존재가 되지만, 참 하나님을 만나면 영적 자아에 속해있게 된다. 교회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고 말을 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여전히 육적 자아에 머무는 것이다. 부활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이 살아있을 때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험을 하는 이유는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는 그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도 일곱 족속이 있는 것은 바로 성전이 세워져도 육적 자아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도록 연단을 주시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합격 불합격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잘 깨달아라는 것이다. 이게 영적 전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