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간략해제≫
≪李忠武公全書≫는 이순신(李舜臣)이 세상을 떠난 지 194년 만인 1792년(정조 16)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발간이 시작되었다. 규장각(奎章閣)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이 이순신(李舜臣)의 시문(詩文)과 관계기록을 수집하는 편찬 실무를 맡았다. 예문관(藝文館) 검서(檢書)인 유득공(柳得恭)이 교정을 담당하여 14권을 완성하고 1795년(정조 19)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초간본이 본 해설의 대본이다. 그후 1934년 유득공(柳得恭)로 속편(續編) 2卷을 추가한 16권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奎 457> 이하는 같은 판본이다.
≪저자개요≫
1545-1598 (인종1-선조31) 자(字): 여해(汝諧)‚ 시호(諡號): 충무(忠武)‚ 본관(本貫): 덕수(德水)‚ 부(父): 정(貞)‚ 모(母): 초계변씨(草溪卞氏)
≪저자내용≫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한성(漢城) 건천동(乾川洞)의 집에서 태어났다. 1566년(명종 21) 22세에 무예를 연습하기 시작하여 28세 가을에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 시험을 보았으나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1576년(선조 9) 32세 봄에 식년(式年)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이후 함경도(咸鏡道) 동구비(童仇非) 보권관(堡權管)‚ 충청병사(忠淸兵使) 군관(軍官)‚ 발포만호(鉢浦萬戶)‚ 함경도(咸鏡道) 건원보(乾原堡) 권관(權管) 등의 자리를 거쳤다. 42세 때 아버지의 상(喪)을 마치고 사복사(司僕寺) 주부(主簿)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었다.
이 때 녹둔도(鹿屯島) 둔전(屯田)의 임무를 겸하여 맡았다. 그후 정읍현감을 거쳐 47세 되던 15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되어 여수로 부임하였다. 여기에서 포구(浦口)의 무기를 보수(補修)하고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왜적(倭賊)이 침입하여 부산을 함락시키고 북상하자 5월 1일 전선(戰船) 24척으로 출동하여 옥포에서 첫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사천(泗川)‚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한산도(閑山島)‚ 부산(釜山) 등지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593년 본영(本營)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겨 해상 지휘를 원활하게 하였고‚ 이해 8월 조정에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1594년 병에 걸려 몹시 병세가 위중하였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사무를 보아 12일 만에 이겨냈다. 1597년 정월(正月) 원균(元均)의 모함과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의 계책에 빠진 조정에서 적장을 놓쳤다는 명목으로 죄를 주고 국문(鞠問)하였다. 4월 초에 정탁(鄭琢)의 상소에 힘입어 특사(特赦)를 입어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8월 3일 원균이 한산(閑山)에서 패하자 다시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9월 12척의 전선(戰船)으로 왜선 330척을 명량(鳴梁)에서 격파하였다. 1598년 고금도(古今島)로 진(陣)을 옮겼고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왜적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막고‚ 11월 18일 노량(露梁)에서 적선 500여척과 격전을 벌이다가 19일 새벽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듬해 아산(牙山) 금성산(錦城山)에 묘지를 만들었다가 1614년 어라산(於羅山)으로 옮겼다.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좌의정(左議政)으로 추증되었고‚ 1643년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아들 셋과 딸 하나‚ 그리고 서자(庶子) 둘을 두었다. 저술로는 본 전서(全書)에 수록되어 있는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필사본인 ≪임진장초(壬辰狀草)≫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