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마음공부 왜 하는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제까지 종/체/단 마음공부를 함께 하면서 원불교 마음공부 하는 법을 종합하고 체계를 세우며 단계를 설정한 가르침을 소개하는 서론에 해당하는 기초적인 이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실제로 마음공부를 하는 본론에 들어가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마음공부 왜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마음공부 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 하였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마음공부를 시작 하였으나 원불교 마음공부를 하려면 상시일기를 기재해야 한다 하여 일기를 기재하는 방법은 배웠다. 그리고 날마다 저녁이면 꼭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있고 일기를 기재해도 재미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일기 기재는 왜 해야 하는가? 오늘은 여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세상에 마음공부 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 많아지고 있고 나처럼 마음공부 유튜브를 만들어 올리는 사람도 많아서 사람마다 마음공부에 대하여 서로 다른 개인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먼저 마음공부가 무엇이라 설명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유튜브에서는 마음공부를 명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고 또 영성공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자기를 성찰하고 뒤돌아보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자기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이나 감사하고 좋은 마음먹는 일이라 하기도 한다. 내 마음에 제일 와 닿기는 마음공부는 모든 마음을 다루는 능력을 개발하는 공부라 설명한 것이다.
지금 세상에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세상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경우 일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어 시간을 내고 관심을 기우릴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은 환경이나 여건에서는 쉬울까? 눈앞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즐기기 위하여 시간과 돈을 쓰고 놀기 바빠서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마음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누가 마음공부를 할까? 그래도 전생에 수도했던 일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생에 마음공부에 관심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이 문제를 그의 단편소설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허락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하는 세 가지 질문도 하고 있다. 누구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한번쯤 고민하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가치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되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사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나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음공부를 해 봄직하다.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면 그 다음에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텐데 하나는 진정한 행복 깨달음 해탈을 갈구하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하나는 더 많은 부와 귀 나아가 더 많은 명예를 구하기에 급급해하는 부류가 있음을 본다. 나는 원광대학 원불교학과 기숙사 생활 하면서 혼자일 때면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지?’ 하는 생각을 자주 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당시 소태산 대종사의 장남이었던 숭산 학장님이 말해 주었던 ‘길가에 꽃 한 송이 피어있다. 지금 최선을 다해 피어 있다. 최선을 다해 피어 있다’고 두 번씩 강조한 말씀을 떠올리며 ‘그래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사람 사는 것을 보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요사이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는 아동 학대가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보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하였지?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악한 일을 하는가? 원래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악한 사람이었을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일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성품 즉 인성(人性)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마음공부를 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하여 중국에서 공자에 이어 아성(亞聖)으로 불린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는 선악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맹자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는데 성(性)은 곧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도덕적 인간 존재의 근거이며 실현의 이유라고 했다. 맹자는 성품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성향이 있으며 이를 적절히 조절하지 않으면 악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맹자는 성선설에 바탕하여 사회를 덕치로서 고르게 하고자 하였으며 그의 철학 교육 정치사상 등은 전반적으로 성선설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맹자의 성선설에 반하여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순자이다. 그는 ‘성악설(性惡說)’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사람의 성(性)은 악하나, 그에게 선(善)이 있는 것은 위(僞) 즉 거짓 때문이다” 했다. 순자는 인간의 선천적으로 악한 성품은 후천적 작위를 통해 선하게 될 수 있다 하였다.
맹자와 순자의 입장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맹자가 도덕성을 인성이라고 보았다면 순자는 인간의 정감과 욕구 같은 자연성을 인성이라고 보았다. 맹자가 천인합일의 입장에서 천부의 성선을 강조하고 성품에 있는 선의 끝인 선단(善端)을 확충하기를 주장했다면 순자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천인상분(天人相分)의 입장에서 인성은 변화되어야하고 도덕은 후천적으로 학습, 배양되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맹자가 윤리도덕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했다면 순자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성삼품설이라 하여 인간의 본성이 상·중·하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본 유교의 인성론(人性論)도 있다. 이는 한(漢)나라 동중서의 주장으로 인성을 상·중·하(善中惡)의 셋으로 나누어 '성인의 본성', '보통 사람의 본성', '열등한 사람의 본성'으로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본성이라 이름 한 것은 높은 수준도 낮은 수준도 아닌 중간을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의 본성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될 수 있는데 가르침과 훈계를 거친 뒤에야 선하게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의 성품은 원래 선악이 없어 무선무악(無善無惡)하나 일을 따라서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할 수 있는 능선능악(能善能惡)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본성이 태어날 때 본래 선하다는 성선(性善)이나 본래 악하다는 성악(性惡)이나 상중하 세 등급이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무선무악이 중요 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교육에 의하여 인간이 변하고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어난 이후 어떻게 양육되고 학습하고 훈련하여 양성하는가 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다. 여기에 마음공부를 왜 하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괴롭고 즐거운 고락(苦樂)에 기인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70억 명이 넘는 세계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락의 문제는 마음에 근거하여 마음먹기에 따라 일어나고 달라지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마음에 답이 있다. 마음이 좋은 일만 좋게 생각하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나 마음이 나쁜 일인 착취와 갈등과 분쟁과 투쟁과 전쟁을 생각하면 괴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나의 생각을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생각에 끌려 다닐까. 감정도 마찬가지로 컨트롤이 안 되어 매우 위험 할 수 있다. 현실은 내 내면인 마음의 반영이고 내 마음은 현실의 거울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인성에 관계없이 마음을 잘 사용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인류는 교육에 의하여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마음공부 잘 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