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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東誌續修
河東誌續修卷之下
[誌]
亭臺
鶩島江亭遺址在郡南十里鶩島里文獻公鄭汝昌盤旋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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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일고(孤潭逸稿) 이순인(李純仁)생년1533년(중종 28)몰년1592년(선조 25)자춘경(春卿), 백생(伯生)호고담(孤潭)본관전의(全義)봉호전릉군(全陵君)특기사항조식(曺植), 이황(李滉)의 문인
孤潭逸稿卷之一 / 詩○七言絶句 百三十九首 / 八詠樓
八詠樓中酒一巵。碧欄吹笛夜遲遲。慇懃更奏出山曲。應爲明朝有別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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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査先生文集卷之二 / 詩○七言律詩 / 雙溪寺八詠樓感舊吟 丙辰
明月雙磎新梵宇。淸風八詠舊仙樓。興亡百轉雲南下。世代千回水北流。晝靜楓林雙蠟屐。夜闌松榻一茶甌。誰知十載廬山客。重到岳陽雪滿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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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집(秋江集) 남효온(南孝溫)생년1454년(단종 2)몰년1492년(성종 23)자백공(伯恭)호추강거사(秋江居士), 행우(杏雨)본관의령(宜寧)시호문청(文淸)특기사항김종직(金宗直)의 문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 등과 교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秋江先生文集卷之二 / 詩 五言古詩○七言古詩○五言律詩○七言律詩 / 讀雙溪寺碑
凍雨成雪空山寒。摩挲石刻孤雲手。孤雲去後六百年。幼婦好辭鬼物守。十二負笈入大唐。崑山片玉郤侁後。黃巢一檄誦天下。翰林高名動九有。黃熊聲中紫府高。末路願從劉家狗。鼎中日月已同宮。神闈下楗事不苟。胡爲再奉鷄林敎。疏錄人間 一作禪林 一庸叟。祝上念佛妄庸事。慇懃讚嘆不容口。慧昭事跡不欲觀。但驚細筋龍蛇走。文如李白差鍛鍊。書得伯英醉中趣。此邦文字自公始。靑丘學士公爲首。八詠樓平長竹竿。中庭落葉一膝厚。靑鶴高飛故淵空。雙溪夕風抄林莽。吾家文章非長才。讚人工巧拙鳩婦。僧云公德不可默。強爲刻畫無鹽醜。
[주-D001] 侁 : 詵
추강집 제2권 / 시(詩)○칠언고시(七言古詩) / 쌍계사(雙溪寺) 비문을 읽고
싸늘한 비가 눈이 되어 빈 산이 차가운데 / 凍雨成雪空山寒
비석에 새겨진 고운의 솜씨를 어루만지네 / 摩挲石刻孤雲手
고운 선생 떠난 뒤로 육백 년이 흘렀건만 / 孤雲去後六百年
절묘하고 좋은 문장을 귀신이 지켜주네 / 幼婦好辭鬼物守
열두 살에 책을 지고 당나라 들어가서 / 十二負笈入大唐
곤륜산 편옥이라던 극선의 뒤를 이었네 / 崑山片玉郤詵後
황소에게 보낸 격문 온 천하에 암송되고 / 黃巢一檄誦天下
한림학사 높은 명성 중국 천지 진동했네 / 翰林高名動九有
황웅의 울음 속에 신선 세계 높이 있으니 / 黃熊聲中紫府高
말년에는 유가의 계견이 되기를 원했고 / 末路願從劉家狗
단약 달이며 보내는 세월 선궁과 같으니 / 鼎中日月已同宮
신선 궁궐 빗장 걸어 일이 구차하지 않거늘 / 神闈下楗事不苟
무엇 하러 신라 조정의 하교 다시 받들어 / 胡爲再奉鷄林敎
인간 세상 평범한 노승의 사적 기술했던가 / 疏錄人間一庸叟
‘人間’이 어떤 본에는 ‘禪林’으로 되어 있다.
축원하고 염불함은 어리석은 일이거늘 / 祝上念佛妄庸事
은근히 찬탄한 말 입에 넘쳐흘렀어라 / 慇懃讚嘆不容口
혜소의 사실과 행적은 보고 싶지 않고 / 慧昭事迹不欲觀
용사처럼 치닫는 가는 글씨를 경탄할 뿐 / 但驚細筋龍蛇走
문장은 이태백처럼 다소 단련이 필요하나 / 文如李白差鍛鍊
글씨는 백영처럼 취중의 정취를 얻었네 / 書得伯英醉中趣
이 나라 문장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 此邦文字自公始
우리나라 학사 중에 공이 첫머리라네 / 靑丘學士公爲首
팔영루는 평평한데 대나무 가지 길고 / 八詠樓平長竹竿
뜰 가운데 낙엽은 무릎까지 쌓였구나 / 中庭落葉一膝厚
푸른 학 높이 날아가 옛 못 비었는데 / 靑鶴高飛故淵空
쌍계의 저녁 바람 나무숲을 스쳐 가네 / 雙溪夕風抄林莽
나의 문장 솜씨는 훌륭한 재능 아니라 / 吾家文章非長才
남의 재주 칭찬하기엔 서툴기 그지없네 / 讚人工巧拙鳩婦
공의 덕 묵힐 수 없노라 스님이 말하며 / 僧云公德不可默
더없이 못난 글귀를 억지로 새기누나 / 强爲刻畫無鹽醜
[주-D001] 쌍계사(雙溪寺) 비문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쓴 하동(河東) 쌍계사의 혜소(慧昭)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이다.[주-D002] 절묘하고〔幼婦〕 :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이므로, 묘(妙) 자의 파자(破字)가 된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이 조아비(曹娥碑)에다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고 써 두었다. 삼국 시대 양수(楊修)가 이를 파자하여 “황견은 색이 있는 실〔色絲〕이므로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이므로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딸의 아들〔女子〕이므로 호(好) 자가 되고, 제구〔절구〕는 매운 것을 받아들이는〔受辛〕 것이므로 사(辭)가 된다. 따라서 ‘절묘호사(絶妙好辭)’, 즉 절묘하고 좋은 글이란 뜻이 된다.”고 풀이하였다. 《世說新語 捷悟》[주-D003] 극선(郤詵) : ‘詵’이 번역 대본에는 ‘侁’으로 되어 있으나, 《진서(晉書)》 권52〈극선열전(郤詵列傳)〉을 바탕으로 바로잡았다.[주-D004] 곤륜산……이었네 : 최치원이 진(晉)나라 극선처럼 뛰어난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는 말이다. 진 무제(晉武帝)가 극선에게 묻기를, “경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극선이 대답하기를, “신이 현량과에 응시하여 올린 대책문이 천하에 제일가는 것은 마치 계림의 한 가지나 곤산의 한 조각 옥과 같은 것입니다.〔臣擧賢良對策 爲天下第一 猶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 하였다. 《晉書 卷52 郤詵列傳》[주-D005] 황웅(黃熊)의……원했고 : 최치원이 만년에 신선술을 배워서 신선 세계에 오르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황웅은 요 임금 때의 곤(鯀)이 죽어 화했다는 짐승 이름이고, 원문의 자부(紫府)는 신선이 산다는 구궁(九宮) 중의 하나이다. 유가(劉家)의 계견(鷄犬)은 유씨 집안의 닭과 개이다. 한나라 회남왕 유안(劉安)이 팔로단경(八老丹經) 36장을 받아 단약(丹藥)을 연단하여 이를 먹고 대낮에 승천하니 개와 닭이 솥 속에 남은 약을 핥아먹고 또 승천하여 닭은 천상에서 울고 개는 구름 속에서 짖었다고 한다. 《神仙傳》[주-D006] 무엇……기술했던가 : 신라 조정의 명을 받아 진감국사의 비문을 지은 것을 말한다.[주-D007] 백영(伯英) : 후한(後漢) 장지(張芝)의 자(字)이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므로 사람들이 초성(草聖)으로 일컬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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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竹軒遺稿(매죽헌유고)成鑮(1571 ~ 1618)梅筠兩世稿卷之一梅竹軒遺稿○詩 過陶灘有懷
過陶灘有懷
鞭驢一入此山水 梅竹遺墟日欲西 灌圃淸詩誰解識 至今雲物帶凄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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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磎先生文集(단계선생문집)金麟燮(1827 ~ 1903)端磎先生文集卷之二詩
過陶灘
120 面
過陶灘
121 面
文獻故居此地尋遺黎指點水之潯我道固然自有樂彼讒罔極亦 何心風雨烟雲朝變夕山河人物古猶今斜陽立馬偏多感四月花 開草樹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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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窩詩稿(죽와시고)河一浩(1717 ~ 1796)[竹窩詩稿][詩]鄭先生一蠹遺墟 陶灘
韓錄事遺墟 鍤巖
山勢崢嶸鎭海陬先賢遺址擅東丘巖色澟然擎落日江聲愁 殺送殘秋勝槪非徒方丈最遺莊能得主人幽始知賢者宜棲 此駐我歸鞭立少留
鄭先生一蠹遺墟 陶灘
歸馬徘徊立暮灘淡煙疏雨夕陽琖寒松特立風霜老孤鶴高 飛飮啄閒往事秪今傳父老空山何處覓衣冠古來明哲猶難 保一曲長歌又一嘆
吹笛臺
老石盤陀立路周風煙瀟灑使人留輕帆歷歷迷津岸斑竹疏 疏壓暮洲子晉何年遊此地笛聲千古怨殘秋白頭詞客還多 感恨未吹笙少日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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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집 제5권 / 잡저(雜著) / 방장산 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이때 술잔을 돌리며 시를 읊조린 지 얼마 안 되어, 옛 화개현(花開縣)을 나와 악양현(岳陽縣)을 지나서 평사역(平沙驛)을 거쳐 군산(君山)으로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멀리 바라볼 때는 누군지 몰랐는데,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눠보니 바로 이근지(李謹之)였다. 이근지의 이름은 중훈(重訓)인데, 고 상국(相國) 이준민(李俊民)의 조카이다. 집이 한양에 있으나 현달을 지향하지 않고, 푸른 산 속에 들어와 살고자 하였다. 일찍이 계동(桂洞)에서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신 뒤, 도탄(陶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정여창(鄭汝昌) 선생은 연산군 때 도탄 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뒤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은 “이곳은 삽암(鍤巖)과 10리 거리이다. 명철(明哲)의 행(幸)ㆍ불행(不幸)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관포(魚灌圃)의 시에 “대 숲이 정공의 집을 가렸으니, 당시에 길이 살 곳으로 정했음을 알 수 있네. 중년에 연좌되니 원숭이와 학이 원망했고, 늙어서는 이 강의 고기도 먹지 못하였네.〔竹林半掩鄭公廬 想得當時卜永居 正坐中年猿鶴怨 老來不食此江魚〕”라고 하였다. - 나는 도탄을 지날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 선생은 유림의 종장이신데 / 鄭先生是儒林匠
만년에 시내 서쪽에서 은거해 살았네 / 晩卜幽貞溪水西
석양에 말 세우고 지난 일에 상심하니 / 落日停驂傷往事
구름도 물빛도 온통 처량하구나 / 雲容水色共悽悽
도탄을 출발하여 가정(柯亭)에 이르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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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菴先生文集卷之三十 / 墓碣 / 河東郡守姜君墓碣銘 幷序
余於壬寅之歲。
고종 | 38 | 1901 | 신축 | 光武 | 5 | 69 | 3월, 기정진의 신도비명을 짓다. ○ 4월, 臨陂의 樂英堂 講會에 참석하여 淵齋 宋秉璿을 만나다. ○ 9월, 公州 麻谷寺를 유람하다. ○ 11월, 기정진의 신도비명을 改撰하다. |
고종 | 39 | 1902 | 임인 | 光武 | 6 | 70 | 3월, 宮內府 特進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다. ○ 4월, 正憲大夫로 陞資되다. 頭流山을 유람하고 8월 초에 돌아오다. |
過河東岳陽亭。土人曰。此一蠧鄭先生講道之所。而鞠爲茂草數百年。今乃重建。姜侯永吉之力也。余心識而嘉之。旣而侯之從父兄永㪷致德。以書來曰。從弟永吉。屢典郡縣。皆有聲績而不幸早歿。今將伐石表墓。丐公一言。以圖不朽。仍念侯岳 陽亭一事。已可以得銘。致德。又吾十年舊要也。必不以杜撰託我。乃按狀。狀曰。君字敬三。其先曰以式。以隋兵馬都元帥。東征高句麗。仍留不返。後世入晉州。子孫因籍焉。代有聞人。曰淮伯。曰碩德。曰希孟。曰龜孫。曰克誠。言行事業。俱在國史。是君八世以上。贈戶曹參判柱東。同知中樞泰煥。正言在勉。副護軍益會。高曾祖考也。妣安東權氏。延日鄭氏。坡平尹氏。尹氏以己酉十二月擧君。生而格局秀拔。旣冠。豁達好施。有濟人之量。屢試未中。遂投筆登武科。歷効力副尉,虎賁衛右部將。以承訓郞。拜河東郡。郡距本第八十里。將之任。謂諸族知舊曰。如聞吾過失。寄聲䂓戒。無輒至公廨也。旣涖職。退奸吏。除民瘼。或有持府牒。斂雜稅之類。輒驅逐越境。人或危之而不顧也。秩未滿。移富平。又遷昌寧。尋知熊川。君之爲政。每以戢吏卹民爲務。故所至。吏民聞風畏伏。其遞熊川也。郡民以謹賦稅。效孝悌。興學校。防酒技。戢盜賊。五件事。詣府願留。某年。陞通政。遂還田廬。不復有仕進意。每風和日暖。朋酒逍遙於泉石之間。欣然忘世。以甲辰四月五日。卒于寢。得年五十六。塟于本郡夫火谷漕倉村亥原。君性質剛方。氣味醇厚。居家不務蓄積。而賙窮恤貧。居官不事威武。而令行禁止。蓋其洞豁之懷。英邁之才。僅見郡紱而未克究所蘊。惜哉。君娶晉陽河氏。生四男三女。男長甲秀。議官。次冕秀。主事。縉秀,暉秀。女鄭寬永,朴在興,曺在瑬。銘曰。
宅心之仁。在家而急人乎而。用智之明。在官而績成乎而。夫火谷封睾然。余述其跡銘于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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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査先生文集卷之一 / 詩○七言絶句 / 敬次灌圃魚先生雙溪寺八詠樓韻 幷序
丁巳冬。余在浮査第。河上舍子平 憕 過之。袖出一素紙同裹一詩帖以示之曰。此乃吾外曾祖魚灌圃手迹。子其移書之以與我。我欲刻之板。懸於雙溪寺邀鶴樓。使後人知八詠樓之所由作也。余於是。披而閱之。乃魚先生雙溪寺八詠樓所題記及詩。和之者有金克成,黃㻶,閔壽千,黃汝獻,朴世煦諸賢之作。亦皆先生之手自書者也。噫。先生。余所景慕。而與余有連派之分。又先生少肄業於吾曾王父校理公。故手撰校理公碑銘。余每以未及摳衣爲恨。今者何幸得見先生咳唾之珠璣。心畫之鐵索。當日精神之所凝聚。筆跡之逼眞竗。玆可想矣。爲子孫者。桑梓尙恭。况此神會處乎。宜子平之愛而寶之。欲傳於來世者也。余亦尤有所感焉。昔余弱冠。讀書雙溪寺。身登八詠樓。仰見楣間。有先生記及詩洎諸賢作。愛而詠之。謄而藏之。及其年久而旋失之。常以不續舊遊爲嘆。丙辰秋。丁巳春。再入雙溪。樓爲兵燹所焚。月戶風軒。銀鉤鐵索。幷爲灰燼。余於是有感舊之懷。勸寺僧謀所以重建則寺僧無有應之者。於是。益嘉仲暹創立之壯志。益敬先生物外之風致也。今子所求。適出於余所慨嘆欽慕之餘。嗟余年過八九。筆路荒拙。安能副君望。然不忍孤索而負初志也。故首書先生之記。次書先生之詩。靑蘿,橡亭,及庵,柳村諸賢之作。次次書之。余又步其韻叙其事。嗚呼。自正德丁丑。至萬曆戊午。首尾百有二年。其間天道之變換。人事之遷易。不知幾更興廢。獨先生遺筆。不見失於兵火中。使後人復見先生之眞筆。所謂善藏者藏於天者也。如使山僧之好善如仲暹者出焉。則安知子平之爲此擧。亦如灌圃之勸仲暹也哉。先生諱得江。字子游。咸從人。晩居鐵城之混沌村。自號混沌,詠潭,泉石居士,灌溪,抱甕丈人。其平生出處。退溪先生所撰詩集跋詳之。萬曆戊午正月旣望。浮査主人,伴鷗閒翁。昌山後學進士成汝信。謹識。
千疊雲山五派溪。碧桃深洞紫霞迷。行隨錦浪偶然到。地與武陵同品題。溪出自雪峯,鶴洞,寺前,七佛洞,紅流洞等處而合流。故云五溪。
○右洞合五溪
何年星隕矗荒原。四字雙刊萬古存。天爲儒仙留勝迹。至今雲物護嵓門。距寺數里許。兩石雙峙。西刻曰雙溪。東刻曰石門。○右門刻四字
儒家筆跡釋家詞。鐫入貞珉閱幾時。仙李乾坤羅日月。千年舊物獨斯碑。故眞鑑禪師碑。唐僖宗光啓年間。崔文昌所撰書。○右龜戴古碑
少時爲客任逍遙。慣見橫溪卧斷條。五十年來重到此。陵遷無處覔仙橋。自八詠樓向邀鶴樓。其間有一小溪。老木模卧其上。今到不見。故嘆之。○右澗橫老木
雞峯高竝鶴峯蒼。月出雲來灝氣長。日夕悠然無限趣。憑欄幾許入瓊章。白雞。山名。與靑鶴洞毗盧峯。相對而峙。○右白雞當戶
曾聞洞裏可耕田。避世幽栖問幾年。欲扣巖扉塵夢罷。牽牛無乃種桃仙。余甞夢入靑鶴洞。逢牽牛一丈夫。問答未了。忽驚寤。故云塵夢罷。○右靑鶴尋仙
天王峯下發初源。奔放西南過石門。流入碧江成一帶。兩三茅店是漁村。右橫洞蟾江
甘辛世味飽曾諳。自放林泉分所甘。看盡頭流山盡處。橫分一水界湖南。右對岸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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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시집(灌圃詩集) 어득강(魚得江)생년 1470년(성종 1)몰년 1550년(명종 5)자 자유(子游)호 관포당(灌圃堂), 혼돈산인(渾沌山人)본관 함종(咸從)특기사항 김극성(金克成), 박세창(朴世昌) 등과 교유
灌圃先生詩集 / [詩] / 雙溪八詠 幷序
余牒至多沙。遂遊雙溪。時値廢朝。國家多事。㢢及山僧。寺爲之空。列郡皆然。雙溪名刹也。崔孤雲所甞遊。世稱神仙之區。而今乃消歇。只見殿宇巋然。石門四字。龜背碑文。無人守之。尋恐磨滅也。自後見僧之自山而過我者。則必問寺之興廢。今年春。余以病在鉄城村墅。有湖南舊知僧仲暹來曰。雙溪寺自己巳年。僧徒復舊。今且重新。貧道實幹之。又有餘財。人勸我作八詠樓者曰。古有明月雙溪水。淸風八詠樓之句。是雖中國之事。名與此寺偶同。盍起樓以倣之。貧道又力之。起樓於碑前。又構小院於後。居數僧使護其碑。遂傳晉之貳車金侯之意。令我作樓記。余喜曰中國雙溪。旣有八景。東國之雙溪。豈獨無乎。寺當湖海之衝。患無作者。不患無景也。自今作八詠以名之可乎。師旣勤矣。又金侯與牧伯韓公助費以成之。使崔仙遺迹。不滅於世。其眞好古君子歟。岳陽縣之鈒岩。吾所欲老者也。與師往來有日矣。姑書此。幷錄八絶以付之。師善書。能左右手。其書于板。不必倩人也。牧伯名士价。通判良範也。
十年前此泝流溪。滿水桃花客興迷。我似漁郞還失道。至今猶未訪前題。右洞合五溪
曾磨楯墨檄中原。筆大如椽四字存。磅礴當時偶然戱。至今奇寶屬山門。右門刻四字
試讀崔侯黃絹詞。銜頭曾是仕唐時。文章不獨鳴天下。筆蹟今猶有此碑。右龜戴古碑
黃落鷄林千載遙。當時種木尙枝條。不材可見千年壽。擁腫還堪踏作橋。右澗橫老木
鷄峯南聳屹蒼蒼。從事曾經山路長。追憶詵師碑在洞。王程恨不訪銘章。右白鷄當戶
山有玉龍寺。新羅僧道詵所創。有高麗崔惟淸所撰碑。
叢林北洞是靑田。靑鶴來棲不記年。咫尺一溪還弱水。昔人猶未見眞仙。右靑鶴尋仙
湖南萬壑我窮源。千里爭奔謁寺門。檣似鄧林人似市。菟裘正好縣西村。右橫洞蟾江
頭流勝處備相諳。此地來尋水更甘。誰識異鄕山亦好。隔江茅店是湖南。右對岸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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郤诜折桂
典故故事 2013-05-02 发送到微信
郤诜是西晋时济阴单父(今山东单县)人,他熟读经书,博学多才,在家乡很有些名气。
晋武帝司马炎当了皇帝后,下令各地推举有才能的贤士入朝应选,郤诜便被州郡推荐来到京城参加了朝廷举行的考试。结果,郤诜独占鳌头,名列第一。晋武帝很赏识他的才能,拜他为议郎。
当时的吏部尚书崔洪,为人十分正直。他选拔人才,贤明公正,从来不徇私情。他看到郤诜确实很有才能,便提拔郤诜做了吏部左丞。
郤诜到任后不久,有一次崔洪无意中犯了错误,郤诜就向晋武帝上书弹劾。崔洪知道后很不高兴,说:
“郤诜是我提拔他到吏部的,可他现在竟弹劾我,他真是忘恩负义。我很懊悔,竟搬起石头砸了自己的脚。”
郤诜听说后,就前去拜见崔洪,说:
“春秋时,晋国的赵宣子任命韩厥为司马。有一次,宣子的仆人违反了军法,韩厥便毫不留情地把那个仆人抓了起来,判了他死刑。但是,赵宣子并没有因此而怨恨韩厥,相反,他对手下的大夫 们说:‘你们应该向我表示祝贺,我提拔的那个韩厥是个很称职的官员呀!’”
崔洪听了,明白了郤诜话中的意思,不禁红了脸。从此,他更看重郤诜了。
不久,晋武帝任命郤诜为雍州刺史,晋武帝在接见他时问:“你自己认为自己怎么样?”
郤诜回答说:“我在应试时得了第一名,好比是桂花林中一枝芬芳的仙桂,昆仑山上的一块美玉!”
武帝看到他对自己这么自信,比喻得也很得体,便高兴地笑了。这时,有一位平时和郤诜不很合得来的大臣启奏说:
“陛下,郤诜口出狂言,应当罢免他的官职。”
晋武帝瞪了那大臣一眼说:“我和郤诜说说笑话,何必大惊小怪?”
郤诜到任以后,把雍州治理得很好,受到晋武帝的称赞。
后来,“郤诜折桂”这一典故,用来指考试时夺得第一名,或者表示科举及第。(杉石)
《晋书·郤诜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