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제 탄생지 김가항 성당
상해시 포동신구 대금가항 서조생산대 병북 제66호(上海市 浦東新區 大金家港 西漕生産隊 兵北 第66號).
상해 김가항성당의 주소이다.
김가항성당은 상해공항에서 황포강이 흐르는 남포대교(南浦大橋)를 건너 자동차로 양자로를 약 1시간여 달려야 닿을 만큼 상해 동남쪽 끝단에 위치해 있다.
1백50여 년 전 1845년 8월 17일 바로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첫 사제로 탄생됐다.
이날은 한국 천주교회사 뿐 아니라 세계 교회사 안에서 영원히 기억될 영광되고 감격적인 축복의 날이었다.
사제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15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지 만 9년 만에 꽃피운 결실이었다.
조선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주례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에는 다블뤼 안 신부를 비롯한 서양 신부 4명과 중국 신부 1명이 미사를 공동 집전했고, 성당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했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한 샤를르 달레는 이 때의 광경을 『서품식에 참여하려는 신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고 묘사할 정도로 대단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을 축하하기 위해 수없이 몰려든 신자들의 무리 중에는 조선인 신자 11명도 있었다.
한국인 출신 사제가 배출돼 명실상부한 조선교회의 탄생을 목격하고 김대건 신부의 숭고한 피흘림으로 세상 종말까지 이어질 한국교회의 사제 성소를 증거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안배해주신 목격자들이었다.
이들 조선인 신자 11명 중에는 「기해일기」를 편찬한 성 현석문 가롤로와 한국인 첫 영세자 이승훈의 손자이며 조선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주교의 복사였던 순교자 이재의(李在宜) 토마스, 임치화(任致化), 노원익(盧元益), 임성실(林聖實), 김인원(金仁元) 등이 있었다.
한국인 첫 영세자의 혈육으로 하여금 한국인 첫 사제의 탄생을 목격케 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계신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제대, 엄청난 신자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창미사곡과 그레고리안 성가가 흐르는 가운데 진행된 사제서품식에 처음 참례한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천상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꼈을 것이다.
사제서품식 전 김대건 신부와 함께 김 신부의 통역으로 고뜰랑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본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이날 서품식에서 새사제 김 신부가 직접 축성한 성체와 성혈을 영하면서 목이 잠기는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또 성당을 가득 메운 중국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사제 김 신부로부터 안수와 장엄강복을 받은 11명의 조선인은 『더이상의 은총은 없다』며 감격한 것이 분명하다.
성인 호칭기도가 울려 퍼지는 동안 제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김대건 신부도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교한 아버지 김제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을 축하하러 함께 상해에 온 조선 신자들의 얼굴에서 미쳐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가슴속에 가라앉아 있던 회한의 앙금들을 다 쓸어내기 위해 간간이 터져나오는 억눌린 신음소리와 함께 새 제의에 그 많은 눈물을 적셨는지 모르겠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은 이렇게 해서 다 끝났다. 소팔가자에 있는 동기 최양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지 못해 서운한 것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열렬한 조선 신자들의 축하 속에 정말 오랜만에 목청껏 웃어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상해 김가항성당에 가면 김대건 신부 유해가 1백50여 년 전 사제서품을 받던 그때 세월과 감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한국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금도 또 다른 현석문과 이재의, 노원익을 이곳 김가항성당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역사의 현장인 김가항성당은 비록 1949년 국민당이 불태워 소실됐고, 또 문화혁명 때는 헐려 창고로 쓰였지만 이 곳에 살아 숨쉬는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들의 신앙 혼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10여 년 전 성당이 새로 단장되면서부터 베네딕도회 김상진 신부를 필두로 하나 둘씩 한국인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기 시작했고, 1991년 8월29일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 동창 사제 24명이 김대건 신부 유해 중 척추뼈를 이 곳에 봉안함으로써 역사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또 1990년 11월4일 정주성 신부를 대표로 한 성지연구원 순례단이 김대건 신부 석고상을 이곳에 기증해 김 신부 유해 및 영정과 함께 성당옆 김대건 경당에 지금도 잘 모셔져 있다.
김가항성당의 한 신자가 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순례단이 적고 간 방명록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고(故) 오기선 신부의 필체가 들어있었고, 김대건 신부 전기 자료집 발간을 염원에 담은 고려대 조광 교수의 글도 있었다.
또 얼굴 모를 수많은 한국인 순례자들이 김대건 신부 앞에 토해낸 회개의 글들과 지난해 김 신부 사제서품 1백50주년 기념일에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한 한국 교회사 연구소 역사탐방팀의 수많은 글들도 담겨 있었다.
낡은 공책 한장 한장 마다 눈물에 얼룩지고 퍼져있는 방명록의 글들을 보며 금가항성당은 민족복음화를 위해 일성(一聲)을 외쳤던 김대건 신부가 우리에게 남긴 「통회의 처소-통곡의 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가항성당을 지키고 있는 진빠이샹(金伯祥ㆍ요셉)옹은 기자에게 듣기 좋아라고 하는 소린지 몰라도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 이후 김가항성당은 성소의 온상이 되었다』고 귀뜸했다.
그는 『이곳 출신 신부, 수도자들이 많을 뿐 아니라 상해교구 김노현 주교도 김가항 출신』이라고 자랑했다. 또 그는 『일제시대 김가항 출신 김 신부가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맞아 죽은 일도 있다』고 말했다.
넓은 정원과 잘 단장된 조경이 첫 방문객에게조차 낯설지 않게 아늑함을 주는 금가항성당.
지금은 비록 공소로 전락해 한달에 두번만 미사가 봉헌되고 있지만 김가항성당은 한국 신자들 가슴속에 사제 성소의 못자리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 곳에서 수확한 첫 열매가 썩어 1백50년이 지난 지금 2천1백89명이란 한국인 신부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김가항성당에서 사제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의 보혈(寶血)은 2천2백배의 열매를 맺어 성서 말씀을 그대로 증거한 것이다.
금가항성당을 나오면서 기자는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식을 지켜보던 11명의 조선 신자들이 느꼈던 그 자부심과 행복감을 나눠가지는 은총을 입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