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파이 미니스트리 팟 캐스트 season 2. 일 Ep
사사들과 열왕들(2) -룻기
지난 시간엔 리더쉽 사사들과 왕의 지도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러면서 사무엘과 관련해서 자비량 사역하는 것과 연결해서 나누었습니다.
이번에는 룻기에 나오는 일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룻기는 사사기 시대에 있었던 일로 (주전1300-1200년경) 모세를 통해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후에 사사들 시대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베들레헴과 모압땅 중간에서 일어나는 룻기의 사건이 펼쳐졌습니다.
룻기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4가지로 첫 번째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가족의 이주에 대한 이야기로 나오미와 남편 그리고 두 아들이 모압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오늘날 요르단에 속한 모압땅은 사해를 건너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압땅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나라 백성회중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몇세대가 지나면 되는 것이 아닌 영원토록 들어오지 못한다고 분명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말은 하나님나라 백성인 이스라엘인은 모압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족은 모압땅으로 이주를 하였고 그곳에서 두 아들이 잘 자라나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는 나오미가 흉년을 피하여 이주간 것이 복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날 나오미 남편과 두 아들이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룻기의 저자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아니면 어떤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한집안에 세 과부요 미망인이 있게 되는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며느리 중 둘 째 며느리가 바로 룻입니다. 나오미는 이런 상황속에서 ‘내가 이제 나의 고향땅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합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는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두 며느리에게는 이제 나를 돌아갈 수 있도록 너희는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 혼자 떠나게 할 수 없다고 하며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세명의 미망인은 같이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가족으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 합니다. 두 번째 권유에 첫 째 며느리는 가족에게 돌아가기로 하고 둘 째인 룻은 거절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어머니가 계신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만약 어머니를 떠나서 내 유익을 찾는다면 나는 어머니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도 상관없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곳에서 나오미와 룻의 언약적 사랑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룻이 나오미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그런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 룻기의 이야기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언약적 사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헷세드’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말에도 끝까지 거부하고 나오미에게 달라붙은 것입니다.(룻기1:14) 이는 창세기의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적 사랑으로 룻과 나오미가 한 몸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충성 이라고 합니다. 룻이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묻히겠습니다(룻기1:16-17)
이것이 바로 헷세드라는 것입니다.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다한 사랑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이 언약적 사랑에 대한 분명한 단어인 것으로 두 사람이 보여준 사랑이였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언약적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하시면서 이 가족을 살리신 일과 결국에는 모든 이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다윗이 그 안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 가문이 베들레헴에 돌아와 살아갈 수 있게 된 이유는 보아스가 집안의 책임을 다하겠다며 구제하는 일이들이 친족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아스가 룻을 사랑하는 마음과 룻이 보아스를 사랑하는 모습들이 펼쳐집니다.
일가친족에 대한 것은 룻기2:20과 욥기19:25에도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위에 우뚝서시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일가친족이라는 말의 개념은 누구로부터 파생되었는가 보면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라고 해야만 합니다. 내 구원자가 살아계셔서 나를 돌보시는 그가 이 땅위에 우뚝서시는 날이 반드시 와서 나를 구제해 줄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침묵하고 계신데, 제발 나에게 돌아 오셔서 답변을 해주세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친구들은 내가 하나님앞에 범죄했기 때문에 이렇다 내가 이런 징계를 받고 있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 나타나시옵소서 라고 얘기 합니다.
그것은 롯과 나오미의 집안과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보아스와 연결됩니다. 보아스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그런분이시기 때문에 보아스가 언약에 신실한 사람으로 집안간에 구제해주고 일가친족의 일에 충성을 다했고 그 충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는 다윗의 일족을 세우시는 일까지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룻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룻기의 중요한 주제가 룻이 나오미와 함께 살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돌와왔고 가문보다는 당장 두 사람이 생활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고 모압여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만이 있는 지역에서 산다는 자체가 어렵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겪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룻은 나오미와 살기 위해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다른사람들과 함께 쫓아다니며 이삭을 줍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서 다른데는 가지말고 우리 밭에서만 이삭을 주울 수 있는 호의를 받았습니다.
그 호의가 바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거리가 정해지지 않은 나날을 이곳 저곳을 헤매야 하는 실정에 롯이 거부하거나 게으르면 이삭을 줍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일거리가 없어서 놀 수밖에 없을 수도 없는 때도 있을 텐데 보아스를 통해서 안정적인 일거리를 제공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일만 제공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이삭을 가져오는 룻을 보고 나오미도 놀라는 모습입니다. 룻을 통하여 보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보아스가 우리 가문을 돌볼 사람이요 일가친족을 구제해줄 사람이니 그 사람에게 가서 누워있어라 합니다. 이는 나오미가 하나님이 분명히 인도하신다는 것을 영적인 분별함으로 알아챈 것입니다.
또한 룻도 나오미의 말이라고 하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살기 위해 나오미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보아스와는 몇 번 만난 사이도 아니요 또 나이도 많은 남성에게 몸을 의탁한다는 것이 내키는 일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싫은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말한 것은 네가 누워있으면 보아스와 사랑이 오가는 성관계가 이루어지고 그럼으로 너를 사랑해주고 우리를 돌봐줄 것이라는 계획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서 보아스는 룻을 하룻밤 성적재미를 느끼고 보내는 것이 아닌 정말 롯을 건드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드는 새벽미명쯤에 떠나면 내가 당신들을 돌보겠다는 따뜻한 인격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환대이신 것입니다. 룻기에 관련해서 나오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에는 성경학자마다 논쟁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굉장히 나쁜 시어머니다 어쩔수 없다고 하지만 좋은 것은 아니다. 보아스에게 하룻밤을 의탁해야 한다고 한 것은 아주 부적절한 것이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방면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나오미가 그렇게 한다면 보아스가 룻을 사랑으로 환대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룻에게 말한 것이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인격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미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대인가 정말 환대받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나오미도 스스로 자신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내 인생에는 쓴물밖에 없다고 말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보아스를 통해 환대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서 나오미는 룻에게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 보아스가 합당하게 대할 것이고, 룻도 어떤 측면에서 단순히 시어머니의 말도 안되는 제안을 받아드렸다기 보다는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얘기 할 정도로 나오미의 인격 성품 모든 것을 좋게 보았고 그분의 하나님을 좋게 본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인격적인 관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보아스도 나오미와 룻을 책임지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기업을 물을 친족이 있음을 알고 마을의 장로들과 친족에게 나오미와 룻을 돌보겠다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이 누구를 향한 것인가 했을 때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일이 제공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향과 우리의 가난한 형제자매를 통하여 만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한다는 것과 일을 제공한다는 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여 구원해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환대를 우리가 순종함으로 뵤여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이문 데스(12세기 중세의 유대인) 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나누어 주는 자선(구제) 라는 개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높은 황금사다리의 정점)것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말합니다.
이런 공급을 받음으로 인해 나오미가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고 룻이 아들을 낳아 줌으로 단순히 보아스나 룻의 아들이 아닌 나오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문이 이어져가는 것이 되고 보아스가 룻을 통하여 그 가문을 살리는 일을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질적(핏줄)으로는 보아스의 아들이 맞지만 가문쪽으로는 한 가문이 끊기지 않게 살리는 일이 보아스를 통해서 이루어졌기에 나오미의 아들로서 그가 바로 하나님의 돌보시는 사랑이 펼쳐진 것입니다.
나오미는 손자인 아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에 주변사람들도 당신은 나오미가 맞습니다 고 화답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베들레헴에 룻을 데리고 돌아온 나오미는 스스로 나는 더 이상 복받은 사람이 아닌 내 인생에는 쓴물밖에 없는 마라입니다. 하였지만 결국에는 주변사람들로부터 당신 인생은 마라가 아니였고 처음부터 항상 하나님이 돌보시는 나오미였다고 얘기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돌보시고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룻기의 이야기는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