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3월 태평천국이 난징에 입성한 시점, 난징성에 30분 거리인 샤오릴웨이 요새에 흠차대신 향영이 1만여 관군을 이끌오 입성(향영은 1851년 초 태평천국 봉기 초기 금전촌을 토벌하러 왔던 제독 가운데 한명, 금전촌에서 2년여 태평천국을 쫓아 난징까지 오다)
- 향영이 난징성 위성 요새 샤오링웨이로 들어가 군사기지 강남대영을 출범
- 이어서 흠차대신 기선(아편전쟁때 활약)이 양저우에 강북대영 건설
- 난징과 강남대영 모두 서로 무시하며 대치
* 1853.5월 북벌, 서정의 시작은 강남대영, 강북대영을 그대로 둔 채 시작
- 증천양, 뢰한영 등이 1만여 병력을 지휘하며 서정 시작(난징에서 호남방향, 우창, 창사쪽, 장강을 따라 난창으로)
- 목표는 강서성 (물산과 인구가 풍부, 강서를 점할 경우 절강, 복건, 광동을 손에 넣게 되고 중국 남부 전체를 차지할 포석
* 6월 말 강서성 성도 난창에 도착
- 난창성엔 태평천국 서왕, 남왕을 죽인 전투를 이끈 강충원이 지키고 있었다
- 서정군이 3달 동안 난창성 공격 후 실패하고 진로를 변경
- 9월말 주장 점령, 10월 호북성 성도 우창을 포위
- 조정에서 강충원의 공을 치하하며 안휘성(서정군의 바로 앞) 순무(도지사) 벼슬을 내림
* 11월 강충원이 병력 3천으로 안휘성 허페이(합비성)로 가다
- 곧바로 태평군 주력부대 수만이 허페이 포위 공격
- 두달 후인 1854.1.14 허페이 함락 (강충원 자결)
- 호남에서 호남 단련-상군을 계속 증강 3만여 병력과 수백척 함선을 갖춘 증국번과 동생 증국전이 참전
* 1854.2월 호북성 우창을 포위하고 있던 서정군에서 주력부대가 갈라져 호남성 창사 방면으로 남하
- 1854.2.~3월 창사에서 상군과 서정군이 일진일퇴 싸움 반복
- 4월 증국번이 장강의 태평군 진지로 총공격 감행 (태평천국의 덫에 걸려 대패하다)
- 증국번의 함대를 물리친후 상국 기지 격파를 노리며 상탄까지 들어온 태평군을 만주족 상군 장수 탑제포가 역습하여 1만여 피해를 내며 서정군 전멸. 지휘관 증천양도 전사
- 1854.6월 태평군이 우창성 함락
- 10월 창사 전역에서 승리한 상군이 우창으로 진격,(서정군은 우창을 버리고 철수)
- 창사 전역 승리와 우창 탈환의 공을 높이 사 조정이 증국번에게 호북 순무의 벼슬을 내리다
(이후 지방군벌에 대한 만주 귀족들의 견제로 병부시랑(국방부 차관급)으로 변경
* 난징에서 서정 전선 붕괴를 막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난징- 강서 난창-호북 우창 방향의 삼거리) 후커우로 급파
- 1854.12~1855.2월까지 후커우 겨울 전투가 계속 이어지다.
* 1855.2.11 후커우 대첩(상군 대패, 함대 전멸)
- 후커우 승리후 석달개는 난징으로 귀환
- 증국번은 난창에서 회복하며 세력 재건에 몰두
* 1855.4월 서정군이 승세를 몰아 우창 점령
- 5월 우창 탈환을 위해 모여든 청 관군과 우한 공방전 계속
* 6월 회복한 증국번이 탑제포, 나택남과 함께 나대강이 지키던 후커우 공략
- 1855.7~9월 후커우 여름 전투
- 8월 태평군 나대강 전사, 이어서 상군의 탑제포도 전사
- 9월 상군 패배
- 나택남은 후커우를 포기하고 10월, 우창 공략을 돕기 위해 우한으로 이동
* 11월 우창 수비군의 도움 요청에 석달개가 다시 3만 병력을 이끌고 오다.
- 나택남 격파 송양 점령, 우창을 압박하던 청군이 멀찍이 밀려남
(나택남 총상 후 이듬해 사망)
* 1855년 말부터 1856년 초 겨울 동안 강서성의 마을을 교화하며 백성들을 배상제회에 입교시키다
- 난창의 증국번이 1,2만 병력으로 석달개군 요격
* 1856년 2월 와산에서 패한 석달개가 한장으로 물러나고 증국번이 이를 추격
- 3.20 란장에서 석달개의 역습으로 증국번 상군 1만여명 궤멸
(증국번 구사일생 난창으로 후퇴, 3천여 병력 남다)
- 난창에 고립된 증국번의 패잔병 3천, 석달개군 2만이 공격 예정이었으나
* 1856.3월 양수청이 석달개에게 난징 귀환 명령.
-4월 석달개군 난징으로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