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220112 연중1주간 목 – 133위 028° 황석지 베드로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133위 028° ‘하느님의 종’ 황석지 베드로
이름 : 황석지(黃石之) 베드로
출생 : 1767년?, 홍주 당산리(솔뫼성지 인근 당살미)
순교 : 1833년 11월(음), 66-67세, 이후 옥사, 서울
황석지(黃石之)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 당산리(堂山里)[1][1.1][1.2]의 양반 출신으로, 경기도 수원 샘골[2][2.1] 에서 살았으며, ‘사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본디 성격이 점잖고 엄격하였던 그는 모든 친척과 이웃의 존경을 받았으며, 39세 때 이웃에 살던 김취득(金就得, 1816년 순교자)[1.2]의 권유로 천주 교리를 배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였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황석지 베드로는 좋아하던 술을 끊고,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21년에 아내와 네 아이들을 차례로 잃었으나, 그는 조금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처자가 선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천주께서 불러 가신 데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고, 덕을 닦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의지할 데가 없게 된 황석지 베드로는 종종 서울 아현에 사는 조카 황 안드레아의 집에 가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이웃에 사는 김작은아기[金小阿只]를 입교시키는 등 선교 활동을 하였다. 한편 그의 조카 안드레아는 오래전부터 교회를 위해 북경을 왕래하거나 교우들을 돕는 일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33년 10월경에 황 안드레아의 행적을 추적해 오던 좌포도청의 포교들 이 그를 체포하려고 아현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마침 집에 없었고, 그 대신 황석지 베드로가 체포되었다.[3]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황석지 베드로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또 포도대장이 배교하면 살려 주겠다고 제의하자, “천주교를 오랫동안 믿어 왔으므로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 없다.”[4]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고 나서 함께 투옥된 사람들을 구하고자 그들에게 ‘압수당한 책자와 성물은 모두 황석지 베드로의 것’이라고 자백하도록 시켰다.
황석지 베드로는 이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도 “천주 신앙을 독실하게 믿어 왔으므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5]고 하면서 거듭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때 옥중에 있는 한 비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황석지 베드로의 행동에 놀라 그 이유를 묻자, 황석지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섬기는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大君]이시며,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배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만 번 죽기를 원합니다.”[6]
그러자 옥에 있던 죄수들은 황석지 베드로에게 천주 교리에 대해 듣기를 원하였고, 황석지 베드로는 이때부터 그들에게 교리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던 1833년 11월(음력) 이후의 어느 날, 황석지 베드로는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5세 또는 66세였다.[7] 그의 선종 소식을 듣고 친척들이 옥으로 찾아갔을 때, 옥에 있던 한 비신자는 자신이 본 사실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황석지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 옥 전체에 환한 빛이 비쳤습니다. 무슨 일인가 보러 갔더니, 그의 감방에 찬란한 광채가 비치고 있었고, 비둘기 한 마리가 방 안을 돌고 있었습니다. 그 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숨을 거두었습니다.”[8][8.1]
[註]__________
[1] 옛 홍주 지역에는 여러 곳에 당산리가 있었다.
[1.1] 홍주목(홍성군) 당산리(堂山里) : ①내포 신도시 인근 홍북읍 산수리 435-14에 당제(堂祭)를 지내던 52.5m 높이의 ‘당산(堂山)’ 또는 ‘당제산(堂祭山)’이 있다. 당제산(堂祭山) 서북쪽 아래에 자리한 마을을 당미(堂尾)라 부르고 장항선 철도가 지나는 당미 북쪽에 큰 마을이 있다. 또한 ②홍북읍 석택리 417-47에 59.2m ‘소당산(小堂山)이 있다. 소당산 이래 남쪽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 ③그 밖에도 홍성군에는 석당산(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당산제(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당산재(홍북읍 대동리 고개) 등 마을에 있는 동제당(洞祭堂), 산에 있는 산신당(山神堂), 포구에 있는 개당(浦堂), 바닷가에 있는 해신당(海神堂) 따위와 같이 무속적 당집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다.
[1.2] 홍주목(당진시) 당산리(堂山里) : ¶솔뫼성지 서쪽 2km에 우강면 송산리 우강면 송산리 산 125번지 당산(堂山, 당살미)가 있다. ‘달레 교회사’ 中 pp.65-66, “金계원 안드레아 종한(宗漢)”(聖 김대건 신부님 작은할아버지)에 대한 각주 60에 종한(宗漢)은 관명(冠名). (Daveluy, Notes, p.240 참조) 필시 김진후(金震厚, 비오, 聖 김대건 신부님 증조부)의 3남 한현(漢鉉)일 것이다(김해김씨안경공파족보 金海金氏安景恭派族譜 참조). 1833年 순교자 황석지(黃石之)에 의하면, 그(김종한)가 홍주 당산리(洪州 堂山里)에 있을 때 문교(問敎)하였는데, 그(김종한)는 병자년(丙子年, 1816)에 처형되었다고 하였다. 김취득(金就得)이 김종한(金宗漢)인 듯하다. (‘달레 교회사’ 中, p.197 각주 88 참조) ‘일성록’ 순조 을해년 6월 19일.
¶‘당살미’는 의미중복 표현인 ‘당산뫼(堂山+뫼)’다. 합덕 사람들은 ‘-뫼’가 붙는 복합명사, 특히 땅이름을 ‘-뫼’를 ‘-미’로 발음한다. 가령, ‘솔뫼(松山, 소나무가 산을 이루는 산)’→‘솔미’, ‘굴뫼(雲山, 구름이 서쪽에서 산처럼 밀려오는 신합덕 雲山里)’→‘굴미’, ‘당산뫼(堂祭山, 수호신에게 제를 올리는 당산)’→‘당살미’ ··· 등이 있다.
[2] 수원 샘골은 현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기산리의 샘골[泉谷] 또는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신왕리의 샘골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2.1] 교회 기록에 나오는 수원 ‘샘골’(특히 聖 오메트르 신부님이 1864년 9월 이후 사목 → 잠시 내포로 가서 다블뤼 주교님을 도움 → 다시 샘골로 복귀하여 1866년 3월 9일까지 사목한 곳) 또는 ‘새암골’은 조선 시대에 ‘경기도 광주군 성곶면 삼리(새암리·시암리〉샴리〉삼리)’에 속했고, 1906년부터는 ‘안산군 성곶면 삼리’에, 1914년에 안산군이 폐지되고 수원군에 편입되면서 ‘반월면 천곡동(泉谷同)’에 속했다. 현재는 시화호를 품고 있는 안산시 상록구 일원이다.
[3] 『일성록』, 순조 33년(1833년) 11월 8일;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53-354;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69.
[4] 『일성록』, 순조 33년 10월 27일.
[5] 『일성록』, 순조 33년 11월 9일.
[6]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355.
[7]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f. 69-70. 여기에서 다블뤼 주교는 황석지 베드로가 1832년 9월 20일에 체포되어 이듬해 5월(음력) 옥중에서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일성록』,(순조 33년 11월 9일)에는 1833년 12월 19일(음력 11월 9일) 황석지에게 사형 선고와 임금의 재가가 내려진 것으로 나온다.
[8]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356.
[8.1] ‘달레 교회사’ 中, pp. 196-200.
귀양 간 신자들에게 내린 전반적인 특사는 정부에 어느 정도 관용의 정신이 있는 표로 보여 신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조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평화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는 이 책을 들춰 보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1832년 바로 그해 9월 10일 한밤중에 서울 포졸들이 黃 안드레아의 집을 습격하였다. (黃) 안드레아는 열심하고 헌신적인 신자로서, 北京을 여러 번 왕래하고, 또 교우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용감한 일을 한 것으로 인하여 오래전부터 뛰어난 존재가 되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상부 관청에서 지시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포교들이 노략질해 먹으려는 생각이 아니면 하급 관리의 원한 섞인 탐욕이 이 일을 일으킨 유일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때 (黃) 안드레아는 집에 없었으므로 잡히지 않았으나, 그의 삼촌 黃(石之) 베드로와 다른 식구들이 잡혔고, 그 근처에 살던 신자 몇 사람도 체포되었다. 붙잡힌 사람은 모두 10명이었는데, 그중 9명이 형벌을 못 이겨 배교하여 오래지 않아 석방되거나 귀양을 가거나 하였다. 다만 黃(石之) 베드로만이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지방 양반집 후손인 黃「사윤」(石之) 베드로는 水原 고을 샘골(官選 記錄에 의하면 샘골이 아니라 洪州 堂山里. ‘달레 교회사’中, 각주 88, p.197)이라고 하는 고향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성격이 점잖고 엄격한 사람인 黃(石之) 베드로는 모든 일가친척과 이웃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앞에서는 아무도 감히 장난의 말이나 상스러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40세 때에 천주교를 배워 온 집안과 같이 입교하였고, 그때부터 만난을 무릅쓰고 한결같은 열심히 교회 본분을 지켰다. 그는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입교하기 전에는 여러 교우가 순교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적에 그것은 지나친 열광이요 너무 흥분한 상상력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은 아주 버렸다.” 그는 너무도 엄하고 과격한 자기의 성격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다른 결점들도 시정하려고 힘썼다. 전에 그렇게도 잘 마시던 술을 끊기로 결심한 뒤로 그는 다시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黃(石之) 베드로는 네 아이를 차례로 잃고 아내마저 잃었으나, 이러한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지나친 슬픔을 조금도 드러내는 일이 없었고, 신자답지 않은 불평은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식들과 아내가 착하게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동안에 천주께서 모두 불러 가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렸다. 그의 가족들이 이와같이 다 죽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 없어진 뒤에, 黃(石之) 베드로는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였고, 오직 덕을 닦는 데에서 그가 찾던 참다운 위로를 얻었다. 불행을 견디어 나가는 그의 마음의 平靜과 안온하고 솔직한 그의 忍從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黃(石之) 베드로는 얼마 전부터 서울에 와서 조카 (黃) 안드레아의 집에 얹혀살다가 거기서 갑자기 붙잡혔다. 관장은 그의 신앙고백을 닫고 나서 그가 백발이 성성한 것을 보고 동정심이 일었던지,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신앙 증거자는 분명히 거절하였다. 이에 관장은 “네가 대체 누군데 이렇게 왕명을 거역하러 든단 말이냐”고 말하며 즉시 문초를 시켰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黃(石之) 베드로는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옥에 갇혀 무례하고 포악한 간수들에게서 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黃(石之) 베드로가 체포될 때에 아무 성물도 몸에 지닌 것이 없었으므로 그가 풀려나기는 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무서워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기를 원하고, 또 함께 잡힌 교우들을 할 수 있는 대로 곤란한 처지에서 구하여 주고자 하여, 압수당한 물건이 모두 자기의 소유물이라고 말하라고 다른 교우들에게 넌지시 일러 주었다. 사실 이런 경우에 가장 훌륭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성물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런 성물을 가졌던 약한 교우들이 남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를 고발을 못 하게 하려는 생각이나 또는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같이 갇혀 있는 동료들의 짐을 덜어 줄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경우에는 거짓말은 천주의 법으로 절대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의와 애덕으로 인하여 이런 잘못이 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黃(石之) 베드로가 청하는 대로 그가 압수된 성물의 주인으로 행세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는 더 오랜 문초와 더 많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관장은 어떤 속임수가 숨어 있지 않은가 의심하여 그 물건들이 사실은 黃(石之)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으나, 黃(石之) 베드로는 큰소리로 항의하며 처음 말한 것을 끝까지 버티어 나갔다.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당한 후, 黃(石之) 베드로는 뜻을 굽히지 않은 채 형조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신앙을 버리는 대가로 목숨을 보전하기를 강력히 거부하여 다시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혹독한 형벌을 받는 중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아니, 나는 이미 늙어서 얼마 있으면 죽게 되겠고, 또 내가 30년 동안이나 천지를 조성하신 주의 계명을 지켜왔거늘, 부끄러운 말을 해서 대번에 우리 천주의 사랑을 잃어버리란 말입니까.” 이와 비슷한 경우에 聖 요한의 제자가 한 말을 누가 기억하여 내지 않겠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지가 90년이 되었으나 그이는 내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거늘 나더러 어찌 그를 저주하란 말입니까.”(이는 스미르나의 주교 순교자 폴리리카르포가 필로메논 교회에 보낸 보고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두 순교자에게 영감을 주신 것은 똑같은 성령이었으므로 이들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 黃(石之) 베드로는 사형 선고를 듣는 행복을 누렸다. 그는 기꺼이 자기의 결안(結案)에 수결(手決)했다. 그런 다음 목에 큰 칼을 쓰고 따로 떨어진 감방에 갇혔다. 그 옥에는 여러 외교인 죄수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金이라는 선비도 있었는데 黃(石之) 베드로의 거동과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넘쳐흐름을 보고 모두 놀라 말하였다. “누구나 다 갚아야 할 잘못이 있는데 어째서 이 노인은 죽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죽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가.” “선생, 어째서 그렇게 행복스러워 보이십니까.” “내가 섬기는 천주는 천지의 대군이시고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그래서 그분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만 번 죽임을 당하고 싶기 때문이요” 하고 黃(石之) 베드로는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그 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오.”하고 죄수들이 말하였다. 黃(石之) 베드로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날부터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와 천주의 계명을 자주 설명하여 들려주었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는 동안 黃(石之) 베드로는 천주께서 자기의 희생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항상 불안스러워 끊임없이 동정 聖母께 의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며칠 후에 화평하게 세상을 떠나니, 때는 계사(癸巳, 1833)년 5월(6월) 초였다. 그의 나이는 70이 가까웠는데 다른 고문은 말고라도 중죄인 같이 문초를 당한 것이 다섯 번이나 되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일가들이 듣고 시체를 찾으러 가니, 金이라는 외교인 선비가 이렇게 말하였다. “黃(石之)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에 이 옥(獄) 전체에 환한 빛이 비치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 나갔었습니다. 그분의 감방에 불이 비치고 있기에 들어가 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그분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지요. 그 후 몇 분 안 있어 그분은 숨이 넘어갔습니다.” 이와같이 천주께서는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죽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부터 즐겨 복을 내려 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