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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지와 순교자
1. 미리내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 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일생은 짧았다. 비록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지만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를 열 성상(星霜).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고국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이라며 안타까워했다.
▲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성당 앞 묘소.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846년 9월 16일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복을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대건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년)는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 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 1907년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이 자연석을 이용해 건립한 성 요셉 성당.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묻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순교자 옆에 묻어달란 주교의 유언대로 김대건 신부 옆자리에 그를 안장했다.
그 무렵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하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선종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896년 5월 20일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에 있는 성 요셉 성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가 본당신자들과 함께 1906년 여름 건축을 시작해 1907년 초 자연석으로 건립하여 성 요셉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그해에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학교 건물을 건립하여 해성학원을 열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신자 자녀들에 대한 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 폐교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1976년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고, 같은 해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면서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정착하고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을 순차적으로 완공했다.
▲ 1991년 건립한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기념 대성당 전경.
1980년대에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 요셉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고,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종아리뼈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2층 전시장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들이 설치되어 박해의 아픔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그 후 103위 시성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었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는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성당 뒤편으로 해서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옮겨 설치되었다.
성지의 제일 위쪽인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9월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경당 내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발 뼈 유해 일부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에 건립된 성모당 내부 모습.
경당 앞마당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는 초대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선종할 때까지 34년간 사목하며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를 단장하고 기념경당을 건립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고, 최문식 신부는 한국교회 열아홉 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냈다. 경당 밖 왼편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가 나란히 누워 있다.
미리내 성 요셉 성당 위 광장 중앙의 대형 십자가 왼편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겟세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다. 여기에는 피땀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와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 등성이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와 성 이윤일 요한 천묘사적비가 있다. 1976년 순교자 현양사업을 진행하며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 17위를 이곳에 이장해 모셨다. 그 중에서 6월 24일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대구대교구로 이장해 이듬해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자 1988년 9월 20일 미리내에 천묘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나머지 16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 중에서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는 2013년 10월 22일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손골 성지로 이장해 현양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묻혀있는 12위는 모두 용인 내사면 대대4리의 목 없는 순교자 줄무덤에서 이장한 유해이다. 그동안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 하단에 자리했던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은 지속적인 이용이 어려워 2019년 5월 31일부터 수원교구 안성추모공원 내에 조성한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을 시작해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에 묘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 상단에 조성된 무명 순교자 합장묘.
2005년 10월 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되었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수고해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갈 의지를 밝혔다. 2015년 4월 7일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23m x 5.5m, 최영철 바오로 작)을 제작 설치하고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7일)]
2. 미리내 성지의 진토
경기도 지역에서 유명한 교우촌으로는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가 있다. 그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하는데, 은이 공소에서 큰 산을 넘으면 닿게 된다.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는 미리내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년 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요한) 성인과 다른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김 신부의 모친 고 우루술라도 이곳에 묻혔다. 또 1853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한 뒤 교회에서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김 신부 곁에 그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 성지 입구 왼편에는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이 건립되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1975년 10월 6일에 창립된 성모 성심 수녀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103위 성인 중에서 두 분의 유해가 있던 곳인 만큼 기념 성당이 건립될 만한 곳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가장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 경당, 입구 오른쪽 위에 있는 이윤일 성인의 무덤 자리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그리고 작고 초라하지만 선조들의 신앙이 담겨 있는 미리내 성당을 둘러보지 않고 되돌아가는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기념 대성당과 성모당 전경.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은 이곳 교우촌 신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오다가 1901년 5월 21일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다시 경남의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기념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이윤일(요한) 성인은 특이하게 미리내 성지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의 위협을 피해 경상도 상주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26일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로 이장되었다. 이중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 옆에 안치된 성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의 묘.
이제 미리내에는 김대건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자리가 빈 무덤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그들의 신앙과 함께 스며 있는 진토(塵土)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순교 신심을 바탕으로 내일의 신앙을 다져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루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김대건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보낸 1846년의 옥중 서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3. 미리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탄생
김대건 신부 시성으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 명칭 변경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에서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수원교구(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10월 22일 미리내 성지 내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의 명칭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으로 변경했다.
수원교구는 “1928년 본 경당이 지어질 당시 명칭은 ‘복자 기념 성당’이었으며, 여기에서 ‘복자’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김대건 사제가 ‘성인’으로 시성됨으로 인해 명칭을 변경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설립 당시부터 일부 특정 신자들을 위한 경당이 아닌 모든 신자들에게 개방된 성당이었으며, ‘순교자의 모후’를 주보 성인을 두고 봉헌식과 교회법적 성당 조건을 충족하는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므로 성당으로 변경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28년 건립됐다. 김대건 신부 묘소가 바로 앞에 있어 미리내 성지 순례의 절정이 되는 곳이다. 하얀색 벽면에 빨간 지붕을 얹은 아담한 크기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와 목관 일부분을 안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일, 이상도 기자]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기념 성당’ 본래 의미 되찾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서 명칭 변경
-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수원교구가 미리내성지에 자리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 명칭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으로 변경했다.
수원교구는 지난 10월 3일 열린 교구 국장회의를 통해 명칭 변경을 결정하고 10월 22일 공문을 발송해 명칭 변경에 관해 알렸다.
이번에 명칭이 변경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이하 김대건기념성당)은 1928년 미리내성지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묘소 앞에 세워진 건물이다.
교구는 공문을 통해 “본 경당이 지어질 당시 명칭은 ‘복자 기념 성당’이었으며, 여기에서 ‘복자’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지칭하는 것”이라며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김대건 사제가 ‘성인’으로 시성됨으로 인해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며 명칭 변경의 근거를 제시했다.
또한 교구는 ‘성당’이라는 표현에 관해서 김대건기념성당이 “설립 당시부터 일부 특정 신자들을 위한 곳(경당)이 아닌, 모든 신자들에게 개방된 곳(성당)이었음”을 확인하고 “‘순교자의 모후’를 주보 성인으로 두고 봉헌식과 축복식을 거행했으므로 ‘성당’이라는 명칭이 교회법적으로도 부합하다”고 밝혔다.
교회법 제1214조에 따르면 성당은 ‘하느님 경배를 위해 지정된 거룩한 건물’로 신자들에게는 하느님 경배를 특히 공적으로 행하기 위해 성당에 출입할 권리가 있다. 반면 경당은 ‘어떤 공동체나 또는 그 곳에 모이는 신자들의 집단의 편익을 위해 직권자의 허가로 지정된 하느님 경배의 장소’다.(제1223조)
김대건기념성당은 전국 성지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순례지 중 하나다.
1928년 9월 18일 당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였던 라리보 주교가 봉헌식을 주례했고, 아직 ‘성지’라는 용어조차 사용되지 않던 시절부터 김대건 성인의 묘소를 찾는 많은 신자들이 김대건기념성당에서 기도해 왔다. 1965년부터는 9월 순교자 성월마다 성당 앞 광장에서 순교자현양대회가 열렸고, 미리내성지 초입에 자리한 성요셉성당에서부터 김대건기념성당까지 유해행렬을 하는 전통도 생겼다.
미리내성지는 2017년 김대건기념성당 앞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한국 순교자의 모후이신 성모상’을 설치해 순례자들의 신심 함양을 도왔다. 성모상은 순교한 김대건 성인과 그 모친 고 우르술라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8일, 이승훈 기자]
4. 미리내 성지 탐방 (요셉성당)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교구 지정 순례지 탐방]
김대건 성인 묻혀 있는 ‘별처럼 빛나는 골짜기’
- 미리내 성요셉성당.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성당이자 한국교회 개척사를 간직한 곳이다.
1846년 6월 5일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확보하기 위해 백령도 등을 살피다 체포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3개월 뒤인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순교 전 성인은 최후증언으로 “이제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나를 위한 영원한 행복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뒤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후 이민식(빈첸시오, 1829~1921)은 관군의 눈을 피해 40일 만에 시신을 거뒀다. 이후 몇몇 신자들과 함께 1846년 10월 30일 시신을 지고 150리를 걸어 자신의 고향 미리내에 안장했다. 미리내가 특별히 순교사적지로 의미를 갖는 순간이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시궁산과 쌍령산 골짜기에 자리 잡은 미리내성지(전담 지철현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가 묻힌 곳이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우리말이다. 성지에 미리내라는 명칭이 붙은 데는 신유·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 때, 밤이면 그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인 데서 유래했다.
은하수를 이루는 수많은 별처럼, 성지에는 신앙을 증거한 많은 이들이 묻혀 있다. 1846년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 외에도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성 이윤일(요한, 1816~1867)의 묘소 유지(遺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묘소가 있다. 성 김대건 신부 모친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빈첸시오)의 묘도 성지 내 성 김대건 신부 경당 양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신앙을 좇아 미리내에서 살아왔던 이름모를 순교자들의 무덤도 함께 있다.
- 성요셉성당에 모셔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아랫턱뼈.
성지는 과거와 근현대 교회를 아우르는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미리내본당(주임 지철현 신부)만 해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장소다. 본당은 1883년 공소로 설립된 뒤 1896년 갓등이(현 왕림)본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됐다. 현재 본당은 성지 우측 미리내 성요셉성당에서 양성면 일대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며 지역 신앙 중심지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미리내 성요셉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성당이자 한국교회 개척사를 간직한 곳이다. 초대주임 강도영 신부(1863~1929)와 신자들이 직접 근처에서 가져온 돌을 쌓아 만들었다. 지금도 성당 옆에 남아 있는 ‘말구 우물’이 당시 신자들과 강 신부의 노고를 말해주는 듯하다.
강 신부는 또한 성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서 신앙을 전하듯 일제강점기 신자 계몽을 위해 양잠업을 가르치고, 초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신자 자녀에게 천주교 교리와 초등교육을 했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은 지금도 성당 옆에 남아있다. 그 간절함이 녹아든 성당에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부터 사용돼 온 성당 제대가 지금도 쓰이고 있다. 제대 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랫턱뼈가 모셔져 있다.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 성당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종아리뼈가 안치돼 있다. 성당 2층에는 박해 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의 모형물을 둔 전시실이 마련돼 있어 교인들이 당시 겪었을 고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미리내성지에 있는 김대건 성인 묘소.
성지는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매월 첫 주 금요일 오전 11시30분 미사 후 성 김대건 신부 성해 친구식을 거행하고 있다. 7월 5일에는 성 김대건 신부 묘소 앞 광장에서 ‘시복기념미사’를 봉헌하며, 안장일인 10월 30일에는 묘역 앞 광장에서 현양대회 겸 야외기념미사를 봉헌한다. 특히 이번 현양대회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잔치’라는 의미를 더해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하는 밝은 분위기의 행사로 꾸릴 계획이다.
성지는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성인이 보여준 정신을 되새기는 작업도 함께한다. 이를 위해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성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 남겼던 최후 증언을 비치할 계획이다. 성지 안내판에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으로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걸어가자’는 메시지를 적은 것도 그 일환이다.
성지 전담 지철현 신부는 “성지를 찾는 신자들이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성인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며 “성지에 들러 당시 신앙 선조들이 겪었던 어려운 삶을 되짚어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열정’으로 생명을 살리려는 삶을 살아가셨다”며 “생명을 살리려는 삶을 살아가신 성인의 활동을 본받아 우리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희생을 실천하는 ‘녹색순교’를 실천하면 어떨까한다”고 조언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6월 6일, 이재훈 기자]
5. 미리내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는 서울에서 태어나 1883년부터 1892년까지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마치고 1896년 4월 26일 정규하 · 강성삼과 함께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동시에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강도영 신부는, 1929년 3월 12일 선종할 때까지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면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고, 그곳에 있는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 옆에 안장되었다.
설립 당시 1896~1897년의 미리내 본당은 공소 35개소, 신자수 1,779명을 기록했다가 1912~1913년에는 공소 34개소, 신자수 3,043명으로 증가하였다. 1913년 5월 첫 자본당으로 ‘압고지 본당’을 분리하고, 1927년 9월 두 번째 자본당으로 ‘남곡리 본당’을 분리하였다. 이러한 교세확장과 더불어 1906년 여름에 강신부는 《사사성경》의 마태오 복음을 번역했으며, 1925년에는‘성체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미리내 본당 내에서 이기준 신부 등 모두 5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강도영 신부의 사목활동은 지역 사회의 계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1907년 강도영 신부는 교회 교리학교와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개량서당 성격을 함께 지닌 ‘해성학원’을 설립했다. 또한 1923년 무렵부터는 본당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양잠업을 장려하고, 다음해에는 ‘해성제사’와 양잠 학교인 ‘잠업전수소’를 설립함으로써 농촌 부흥 운동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 부임하면서부터 순교자 김대건 신부 현양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21년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자, 그 건립 장소가 미리내로 결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미리내에 기념 경당을 건립한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해 7월에는 경당이 완공되어 1928년 9월 18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강복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강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을 바탕으로 건립된 ‘복자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주보 : 한국 치명자들의 모후)은 이후 김대건 신부의 본래 무덤이 있던 묘역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로 자리 매김되어 왔으며, 현재의 미리내 성지가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Ⅰ. 머리말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는 1896년에 사제로 서품된 이후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의 초대 주임으로 재임하다가 선종한 뒤 그곳에 묻혔다. 사제로서의 모든 생애를 미리내 본당과 함께했으니, 이 본당의 설립과 이후의 정착 과정은 바로 강도영 신부의 일생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강도영 신부의 신앙과 생애는 물론 미리내 본당에 대해 직접 연구한 경우는 없었다. 이와 관련된 글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것들이다.1) 다행인 것은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강도영 신부의 ‘미리내 본당 사목 보고서[라틴어 公翰]’가 최근에 번역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뮈텔(G. Mutel, 閔德孝)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이 보고서들은 본 글의 작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2)
본 연구에서는 먼저 강도영 신부의 신학교 생활과 서품 과정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강 신부가 미리내 본당에서 이룩한 여러 가지 업적들을 설명함으로써 그 생애의 일단을 조명해 보려고 하였다. 특히 후자에서는 강도영 신부의 선교 활동은 물론 미리내 성당 건립, 해성학원과 해성제사의 설립 등을 차례로 설명한 다음,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손꼽히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에 대한 공경 행위 즉 현양 활동과 기념 경당 건립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다.
Ⅱ. 강도영 신부의 페낭 유학과 서품
강도영 신부의 부모나 유년 시절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1863년 8월 6일 서울에서 출생했고, 집안이 가난한 탓에 장성할 때까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또 그의 집안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열심한 신자였던 고모 강 마리아의 영향이 컸으며, 그가 뒤늦게 천주교 교육 기관인 종현학당(鐘峴學堂)3)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학업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것도 고모였다고 한다. 이 해가 1882년으로 그의 나이 만 19세 때였다.4) 다음에 설명한 것과 같이 그가 종현학당에 입학한 다음해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사실에서 볼 때, 그는 그 이전부터 사제의 길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도영이 종현학당에서 수학한 기간은 아주 짧았다. 왜냐하면 다음해인 1883년 후반 무렵에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5)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1882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내수(李?秀, 아우구스티노),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5명의 신학생이 교구장 블랑 주교의 명에 따라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남으로써 조선교구의 신학 교육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6)
강도영 신학생이 부산 · 나가사키 · 상해 · 홍콩을 거쳐 페낭 신학교에 도착한 시기는 1883년 12월 7일로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이때 그와 함께 유학을 떠난 신학생들은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14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13세)과 전 요한(15세), 김 베드로(13세) 등 모두 5명이다.7) 강도영 신학생은 이후 1892년 6월 20일 페낭 신학교를 떠날 때까지 8년 6개월 동안 재학하면서 라틴어와 수사학 공부를 마치고 철학 과정을 밟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에 설명한 것처럼 그가 페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되어 삭발례(削髮禮)를 받은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1892년 6월 20일 페낭 신학교를 출발한 강도영 신학생은 김성학, 김원영, 홍병철(洪秉喆, 루카),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최 바오로 등 5명과 함께 상해를 거쳐 7월 12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어 7월 14일에는 명동 주교관으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방문한 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갔으며,8) 6개월 뒤인 1893년 3월 18일에는 강성삼 등 5명과 함께 삭발례를 받고 신학반으로 올라갔다.9) 신학반 과정 도중에 그는 폐병으로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10)
1895년 6월 8일 강도영은 정규하·강성삼과 함께 대품인 차부제품을, 12월 21일에는 부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1896년 4월 26일, 약현 성 요셉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집전 아래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으니,11) 당시 강도영 신부와 정규하 신부의 나이는 32세, 강성삼 신부의 나이는 27세였다. 이들 세 명이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탄생한 한국인 사제들이요, 최초의 페낭 유학생 사제들이었다.
Ⅲ. 강도영 신부와 미리내 본당
1. 선교 활동과 사제 양성
뮈텔 주교는 1896년 4월 26일의 서품식 당일 ‘갓등이 본당’(현 왕림 본당, 현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의 2대 주임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을 분리해서 ‘미리내 본당’을 설립하였다. 경기도 한수 이남의 두 번째 본당이었다. 동시에 뮈텔 주교는 새 사제 강도영 신부를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했으며, 강 신부는 5월 20일 서울 주교관을 떠나 미리내에 부임하였다.12)
이에 앞서 미리내 교우촌은 박해 이후인 1883년 뮈텔 신부(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 주교로 서품됨)에 의해 다시 공소로 설정되는데, 당시의 신자수는 82명이었다.13) 그리고 강도영 신부가 미리내에 부임하기 이전인 1893년 12월 초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신부가 미리내 공소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운 뒤 1894년 4월 14일 ‘부엉골 본당’(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주임으로 임명되었다.14) 이어 1893~1894년에는 미리내 공소 신자들이 기존의 사제관 터에 경당(현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앞, 양성면 미산리 60번지)을 건립하고, 갓등이 본당 알릭스 신부의 집전 아래 ‘성 요셉’을 주보로 축복식을 가졌다.15) 또 189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빌렘(J. Wihelm, 洪錫九) 신부가 이곳 사제관에서 머물렀다. 당시 빌렘 신부는 병을 얻은 알릭스 신부 대신 갓등이 본당의 사목을 임시로 맡아 경기도 일대에 있는 32개의 공소들을 순방했는데, 그가 방문한 신자수는 1,821명이었고, 그중 미리내 본 공소의 신자수는 177명이었다.16)
1896년 5월 20일 미리내에 부임한 강도영 신부는 이듬해 4월까지 첫 공소 순방을 마무리하였다. 당시 본당에 속한 공소들은 양지 · 죽산 · 이천 · 광주 · 용인 · 양성 일대에 흩어져 있었으며, 첫 해에 설정된 공소수는 미리내 본 공소를 포함하여 35개소, 총 신자수는 1,779명이었다. 이 중에서 공소 신자수가 100명 이상인 곳은 미리내(185명), 양지 은이(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152명), 양지 상·하 배마실(현 양지면 남곡리, 117명), 죽산 모래실(현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 135명), 양성 원댕이(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101명) 등이었다.17)
강도영 신부는 1904년부터 1905년 초까지 미리내 성당과 사제관을 ‘은이 공소’ 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은이가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곳에 정주한다면 38개 공소가 모두 50리 이내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8) 그곳에는 이미 1893~1894년에 신자들이 건립한 6칸짜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경당’이 있었지만,19) 성당과 사제관을 위해서는 새 집이 필요하였다. 이에 강도영 신부는 은이에 성당을 건립하거나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을 매입하기 위한 비용을 모금하기도 했지만, 적당한 집이 나오지 않은 탓에 이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1905년 무렵부터 강도영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본당 분할을 건의하였다. 미리내 본당의 신자수가 2,8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20) 이와 관련해서 그는 1906년에 용인 도사리골(현 용인시 포곡읍 삼계2리)과 광주 미륵댕이(현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의 미륵동·새말) 중의 하나를 새 본당 중심지로 선정해 주도록 뮈텔 주교에게 요청했다. 또 미리내 이웃의 ‘하우현 본당’(현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900년 3월 설립) 주임 샤플랭(O. Chapelain, 蔡) 신부가 신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하우현을 떠나 귀국하자, 다시 한번 자신이 요청한 곳에 새 본당을 설립하고 선교사를 그곳으로 보내주도록 건의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21) 1906년 여름에 강 신부는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사사성경》(四史聖經, 1910년 간행) 중에서 마태오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22)
1910년에는 광주‘시어골 공소’(현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의 신자들이 경당을 건립한 뒤 시어골이나 도사리골 공소로 사제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강도영 신부는 세 번째로 뮈텔 주교에게 미리내 본당의 분할을 건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 3월에도 용인 ‘압고지 공소’(현 용인시 포곡읍 前垈里)에서 새 사제가 거처하기에 적당한 가옥을 매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다시 본당 분할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23) 교구장 뮈텔 주교가 미리내 본당의 분할을 결정한 것은 이로부터 2년 뒤였다.
1913년 5월 17일 뮈텔 주교는 미리내 본당의 분리를 결정함과 동시에 그 자본당으로 용인 ‘압고지 본당’을 설립하고, 그날 사제로 서품된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24)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압고지는 강도영 신부가 새 본당 중심지로 천거했던 곳 중의 하나로, 용인 도사리골과 인접해 있었다. 이 압고지 본당의 분리 결과 미리내 본당 관할이던 광주 지역의 공소들은 물론 용인 지역의 일부 공소들이 새 본당으로 이관되고, 다음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미리내 본당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1914년에는 하우현 본당의 페랭(Perrin) 신부가 1차 세계대전으로 소집되면서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와 갓등이 본당의 6대 주임 김원영 신부가 이곳 사목까지 나누어 맡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1917년에는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갓등이 본당의 김원영 신부, 압고지 본당의 정규량 신부가 합의하여 세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했으며, 이때 미리내 본당의 16개 공소가 갓등이 본당과 압고지 본당 관할로 각각 이관되고, 압고지 본당의 5개 공소는 미리내 본당 관할이 되었다.26) 위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1917~1918년 미리내 본당의 공소는 28개, 신자수는 2,411명이었다.
뮈텔 주교는 1924년 6월 부여 금사리 본당에 있던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를 강도영 신부의 보좌로 임명했으며, 1927년 9월 14에는 미리내에서 ‘남곡리(南谷里) 본당’(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 본당의 전신)을 분리 신설함과 동시에 박동헌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27) 그러나 이때의 분할로 인한 미리내 본당의 교세 변화는 알 수 없다.
한편 강도영 신부는 1924년 ‘성체회’설립 허가를 뮈텔 주교에게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런 다음 1925년 2월 23일 공세리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준 뒤 성체를 거둬 와서 재의 수요일에 미리내 본당의‘성체회’를 설립하였다.28)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는 동안 모두 5명의 본당 출신 사제를 탄생시켰다. 우선 1913년 5월 17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진천 출신의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있는데, 그는 미리내로 이주해 살던 1896년에 강도영 신부가 선발하여 용산 신학교로 보냈었다.29) 이어 1918년 3월 16일에는 용인 출신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서품되었고, 1921년 6월 12일에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용인에서 신학교에 입학한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신부가, 1923년 5월 20일에는 은이의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미리내 본당 출신으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1925년 6월 6일에 서품된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신부도 용인 남곡리 출신이다. 또 한 명의 남곡리 출신으로 1934년 3월 17일에 서품되는 오연희(吳然喜, 마티아)는 그때 용산 신학교에 재학중이었다.
2. 성당 신축과 해성학원 · 해성제사 설립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 부임 직후 1894년에 건립된 기존의 성 요셉 경당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1904~1905년에는 한때 성당을 은이로 이전할 계획도 세웠었다. 그러나 미구에 이 계획은 포기되고,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의 기존 성당 서쪽, 즉 현재의 위치에 새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미리내의 새 성당 공사는 1906년 말 중국 인부들의 감독 아래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본당 신자들은 건축비를 모금했다.30) 또 강도영 신부는 1907년 1월 말에 성당 건축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같은 해 8월 5일에는 명동대성당 건축을 감독한 경험이 있는 명동 본당 주임 푸아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미리내 성당 건축을 돌아보기도 하였다.31)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8월에는 마침내 410평의 부지 위에 길이 28m, 폭 9m, 건평 약 80평의 자연석 석조 성당이 완공됨으로써 옛 성 요셉 성당과 함께 두 개의 성당이 있게 되었다.32)
성당 완공과 동시에 강도영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신축 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세우도록 허가해 줄 것과 미리내에 와서 새 성당을 강복해 주도록 건의하였다.33) 그러나 뮈텔 주교가 미리내를 방문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미리내의 신축 성당은 강도영 신부가 직접 기존의 성당 주보인 ‘성 요셉’을 주보로 정하고 축성한 뒤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34) 이후 강도영 신부는 1909년 3월에 성당 종을 마련하고 다시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강복을 요청했지만, 이때도 주교의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5)
미리내 새 성당은 완공된 지 4년이 지난 1911년부터 붕괴될 위험에 노출되면서 강도영 신부의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특히 강도영 신부가 피정차 상경해 있던 1907년 봄에 건축된 부분이 그러했다. 그래서 강도영 신부는 1911년 8월부터 보수 공사를 차례로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에는 교구 당가로 재임하던 비에모(M. P. Villemot, 禹一模) 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미리내 성당의 수리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미리내를 방문했다.36) 이후 강 신부는 뮈텔 주교의 경비 도움과 신자들의 봉헌을 바탕으로 1912년 여름 장마 전까지 보수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37)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의 현재 모습은 이때 비로소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뮈텔 주교가 미리내 성당을 방문한 것은 1913년 3월 29일이었다. 이어 다음날인 3월 30일에 뮈텔 주교는 베드로와 데레사를 대부와 대모로 삼아 종을 축복했고, 31일에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Ferreol, 高) 주교의 무덤(1853년 미리내에 안장됨)을 방문한 뒤 4월 1일에 상경하였다.38)
새 성당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07년에 미리내의 열심한 신자들은 강도영 신부의 지시에 따라 새 성당 왼쪽에 교사로 사용할 건물을 건립한 뒤, ‘바다의 별’을 주보로 삼은 ‘해성학원’(海星學院, 일명 해성서당)을 열었다.39) 1922년의 상황을 보면 동정녀들이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년 · 소녀 신자들에게 기도와 문답, 한글 등을 가르쳤고, 강도영 신부가 이들의 의·식만 해결해 주는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의 학생수는 소년반 30명, 소녀반 약 10명이었다.40)
이후 강 신부는 교리 학교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각 공소에 교리 학교를 설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2년 무렵에는 ‘학일리 공소’(현 용인시 원삼면 학일2리의 고초골)에도 해성학원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남·녀 학교(소년반 20명, 소녀반 10명)가 설립되었으며, 1926~1927년 무렵에는 다른 공소의 교리 학교들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41)
한편 해성학원 남자부(소년반)는 미리내 본당의 2대 주임 뤼카(F. Lucas, 陸加恩) 신부가 부임하는 1929년의 기록, 3대 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은경축 기록에도 나타난다.42) 이에 대해 훗날의 증언에서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해성학원이 언제부터인가 해성학교로 불리게 되었고, 인근에 거주하는 비신자 학생들도 이 학교를 다녔으며, 여러 명의 교사들이 정식으로 임명되어 천주교 교리뿐만 아니라 한글, 한문, 산술, 역사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0년 3월 31일 미곡공립심상소학교(현 양성면 노곡리의 미곡초등학교)가 설립 인가되면서 해성학교는 소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중등반으로 유지되다가 광복 이후 폐쇄되었다.43)
이렇게 볼 때, 해성학원은 교회 교리학교로서의 성격과 애국계몽운동의 역할을 한 개량서당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닌 형태로 출발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 소년 · 소녀들도 해성학원에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교리학교로서의 성격 대신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해성학교 시절까지도 교리 교육이 병행되었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지역 사회 안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은 꾸준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강도영 신부는 일찍부터 지역 사회의 농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공소 순방 중에는 언제나 다른 지역의 농사 결과를 지켜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리내 지역의 농민들에게 수확 성과가 예상되는 작물이나 과수 재배를 권장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나무로 만든 자[尺]를 나누어주면서 감자를 심는 간격을 개선해서 수확을 올리도록 하는 등 ’농법 개량 사업도 전개하였다.44) 그러다가 1923년 무렵부터 미리내 성당 인근에 뽕나무를 심고, 신자들에게 담배 농사 대신 양잠을 장려했으며, 이러한 의견에 따라 양잠에 종사하는 신자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45) 1921년에 일제 총독부가 연초 전매령을 발표하면서 담배 농사로 인한 이익보다 양잠으로 인한 이익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46)
1924년 무렵, 강도영 신부는 복사 민영중으로 하여금 미리내 성당 인근에 ‘해성제사’47)와 기숙사를 건립하도록 하고, 양잠 학교 즉 ‘잠업전수소’도 설립하였다. 이후 안성군에서는 군의 보조금으로 매년 학생 10명과 교사 1명을 선발하여 이곳에서 양잠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강도영 신부는 1925년에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차용한 돈을 양잠업에 이용해서 수익을 올렸는데, 이때 미리내 신자들뿐만 아니라 본당 내 다른 공소의 신자들도 양잠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48)
강 신부가 실천한 양잠 보급 활동과 해성제사 · 잠업전수소 운영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인근 비신자들에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미리내 본당의 사목에 유익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49) 따라서 해성학원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고 한다면, 농법 개량 사업, 양잠 장려 활동, 해성제사와 잠업전수소의 운영은 강도영 신부가 전개한 농촌 부흥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Ⅳ. 김대건 신부 현양 운동과 기념 경당 건립
강도영 신부는 1896년 5월 20일 미리내 본당에 부임하면서부터 페레올 주교와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에서 사목하게 된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니, 이는 그 자신이 1921년에 맞이한 사제 서품 은경축의 감사 답사에 잘 나타난다.50) 다시 말해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 부임하면서 순교자 김대건 신부에 대한 관심과 공경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앞서 1846년 미리내에 조성된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1882년 이후에 진행된 기해 · 병오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 수속(교구 재판) 판사 푸아넬 신부에 의해 1886년에 개봉된 적이 있었다.51) 이어 1901년 5월 20일에는 시복 판사 푸아넬 신부와 서기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가 미리내에 와서 안성 본당의 공베르(A. Gombert, 孔) 신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 무덤을 발굴하였다. 그런 다음 횡대는 무덤 안에 다시 넣고 원상대로 봉분을 쌓았으며,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의 사제관에 안치했다가 5월 23일 궤에 담아 무덤에서 나온 관과 함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52) 이러한 과정에서 강도영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현양 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1921년 교황청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포함된 기해·병오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추기경 회의의 첫 번째 단계인 전(前) 예비회의를 개최하였다. 또 서울에서는 1866년의 병인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 재판(교황청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 4월 20일에는 한국 교회 최초로 한국인 사제 강도영 신부의 은경축이 미리내에서 있었고, 갓등이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이를 축하하는 ‘치명자 안드레아 김 신부 치명 성극’을 공연해 주었다. 《경향잡지》에서도 위의 사실들을 알리는 한편 치명 성극 대본을 연재함으로써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유도하였다.53) 한편 강도영 신부는 이 해 용산 신학교에서 개최된 김대건 신부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사제와 신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54)
1921년 5월 5~9일 사이에 개최된 한국인 사제 피정 때에는 김대건 신부 현양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고, 이를 위한 기금 모금 운동 문제가 논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어 다음해 5월 15일에 시작된 한국인 사제들의 피정 때에는 다시 한번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면서 구체적으로‘어디에 기념관을 건립하느냐’하는 데 대해 의견 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5)
미리내에 있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 사제의 옛 무덤에 기념관을 짓는 데 대해 황해도의 어떤 신부들은 ‘무엇 때문에 산골 구석 미리내에 (기념관을) 짓느냐, 용산(즉 순교지인 용산 새남터)에 지으면 참배하기 쉬우니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미리내에 짓자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 이 일로 약조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몇몇 신부들이 낸 돈은 당가(경리) 신부에게 맡겨놓았고, 미리내냐 용산이냐는 주교님의 뜻에 달렸다.’56)
위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념관 건립 장소로는 용산의 새남터와 미리내 두 곳이 거론되었는데, 이 중에서 미리내에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은 강도영 신부가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강 신부는 건립 장소에 대한 최종 결정은 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는 유보적인 입장도 피력했다. 이와 관련해서 훗날의 증언 기록에서는, 당시 강도영 신부가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하신 새남터보다는, 55년(1846~1901년)이라는 세월을 묻히고 살이 썩은 미리내에 경당을 세워야 합니다.… 고 주교님의 묘지도 이곳에 있으며, 그 당시 김 신부님의 시체를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경당은 미리내에 세워야 합니다”57)라고 주장해서 뮈텔 주교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으로 설명한다.
강도영 신부는 이후에도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이 미리내에 건립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3년에는 페레올 주교의 무덤과 김대건 신부의 무덤 자리가 있는 산(일명 ‘오두재’)을 신자 무덤, 즉 교회 공동 묘지로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드브레 부주교에게 당부해서 결실을 얻기도 했다.58) 훗날의 상황 변화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결국 강 신부는 여러 사제들로부터 기념관 건립에 대한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고, 미리내 지역의 회장과 유지들도 1926년 9월 26일의 첫 ‘한국 치명 복자 79위 첨례’(현재의 순교자 성월) 때에는 경당 건립 기금을 모금하여 강 신부의 의지를 뒷받침해 주었다. 이어 강 신부는 1927년에 드브레 부주교로부터 허락을 받아 구체적으로 건축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59)
미리내 기념 경당 건축은 1928년 봄 오두재 부지(김대건 신부의 본래 무덤 자리 옆)의 정지 작업으로 시작되어 7월에 완공되었다. 그 규모는 길이가 8m(약 26척), 너비가 4m(약 13척)였으며, 건축 재료로는 양회가 사용되었다. 이때 복자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무덤 봉분도 양회로 쌓아올리고, 그 둘레에는 사제들의 무덤 경계임을 표시하기 위해 약 2m 높이의 담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 강도영 신부는 같은 해 9월 18일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1926년 서품) 부주교의 집전 아래 ‘한국 치명자들의 모후’를 주보로 기념 경당 강복식을 가졌다.60) 한편 그에 앞서 1921년 12월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 안장하는 데 공로가 컸던 이민식(빈첸시오)이 선종하여 김대건 신부 무덤 자리 옆에 안장되었으며, 강도영 신부도 1929년 3월 12일에 선종하여 같은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와 같이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은 강도영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을 바탕으로 완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과 사제들의 무덤은 1929년 1월 3일 남곡리 본당의 청년과 어린이 70여 명이 이곳에 와서 순례 미사를 봉헌하는 등61) 건립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로 자리 매김되어 왔다. 현 미리내 성지의 직접적인 기원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Ⅴ. 맺음말
강도영 신부는 서울에서 태어나 1883년부터 1892년까지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마치고 1896년 4월 26일 정규하 · 강성삼과 함께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동시에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강도영 신부는, 1929년 3월 12일 선종할 때까지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면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고, 그곳에 있는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 옆에 안장되었다.
강도영 신부 부임 초기인 1896~1897년의 미리내 본당 교세는 공소 35개소, 신자수 1,779명을 기록했다가 1912~1913년에는 공소 34개소, 신자수 3,043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동안 강 신부는 여러 차례 본당 분할을 교구장에게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1913년 5월 17일에서야 첫 자본당으로 ‘압고지 본당’이 분리 설립되었다. 그리고 1927년 9월 14일에는 두 번째 자본당으로 ‘남곡리 본당’이 분리 설립되었다. 한편 강 신부는 1906년 여름에 《사사성경》의 마태오 복음을 번역했으며, 1925년에는 ‘성체회’를 설립하였다. 강 신부 재임 기간 동안 미리내 본당에서는 이기준 · 황정수 · 박정렬 · 김영근 · 김인상 신부 등 모두 5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강도영 신부는 1907년 8월 현재의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을 자연석으로 완공 축성하고, 1909년 3월에는 종을 마련하였다. 이 종은 4년 뒤인 1913년 3월 30일 뮈텔 주교에 의해 축복되었다.
그에 앞서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의 지시에 따라 교회 교리학교와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개량서당 성격을 함께 지닌 ‘해성학원’이 미리내 성당 옆에 건립되어 문을 열었고, 이 해성학원은 어느 때부터인가 해성학교로 불리면서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폐쇄될 때까지 지역 사회 안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아울러 강 신부는 일찍부터 지역 사회 안에서 농법 개량 사업을 전개했으며, 1923년 무렵부터는 본당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양잠업을 장려하고, 다음해에는 ‘해성제사’와 양잠 학교인 ‘잠업전수소’를 설립함으로써 농촌 부흥 운동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강도영 신부의 업적 중에서 전자의 해성학원이 애국계몽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후자의 농법 개량과 양잠 사업은 농촌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 부임하면서부터 순교자 김대건 신부 현양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21년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자, 그 건립 장소가 미리내로 결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미리내에 기념 경당을 건립한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해 7월에는 경당이 완공되어 1928년 9월 18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강복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강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을 바탕으로 건립된 ‘복자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주보 : 한국 치명자들의 모후)은 이후 김대건 신부의 본래 무덤이 있던 묘역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로 자리 매김되어 왔으며, 현재의 미리내 성지가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6. 이민식 빈첸시오의 김대건 신부 유해 안장 기록
이민식(1829∼1921).
1846년 병오(丙午)박해 때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 세례명 빈첸시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고 40여일동안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려고 노력한 끝에 10월 26일 밤 포졸들의 감시를 뚫고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내에 안장했고, 그 뒤 1901년 시복 수속 관계로 김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게 되자 유일한 증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평생을 자신이 거두어 안장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가 1921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관련된 기록이다. 김 신부가 은이 마을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열심한 신자로서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은 김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고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40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안고, 동체는 결방하여 짊어지고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체를 옮기게 된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은 돌(黑石洞)을 지나 동작리(鋼雀洞)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에 이르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쿨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 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이(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퉁점(銅店),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 여러 가지 증언
이 밖에도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다섯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김 프란치스코라는 시람에 의하면 상여에 실어 양성에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고 했고(《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 282쪽), 박 베드로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임시로 문배부리(지금의 용산구청 자리)라는 곳에 묻었다가 양성 미리내로 옮겼다고 했고(위 증언록 285쪽), 서 야고보라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조금 떨어진 왜재에 매장했다가 다음 날 왜고개(현 국군 중앙 성당 자리)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했다.(위 증언록 289쪽).
또 김대건 신부 유해 발굴과 이장 기록 보고서에 의하면 1846년 9월 30일 교우 14명이 미리내로 옮기고 그해 10월 26일에야 미리내에 유체를 안장했다고 한다. 이민식의 증손자 이순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식을 비롯 세 사람이 옮겼다고 한다.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30여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와 8,90대 노인들의 증언들을 종합 분석하여 지도상에 그 경로를 재현해 본결과 한강 도강 과정 누락, 유체 단독 이장 등 과장 부분을 제외하면 용인천주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장 경로가 당시 실제 상황과 부합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겨진다.
[자료 참고 : 한국순교자현양회]
■ 유해 이장 경로
이민식 빈첸시오의 후손 [고초골의 자랑 5]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만25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자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당시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하신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시킵니다.
현재 고초골에는 이민식 빈첸시오의 후손(이선행요아킴)이 살고 계십니다.
* 이민식(1829~1921)*빈첸시오 소개
빈첸시오는 1829년 열심한 교우 집안인 함평 이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그의 집안 역시 군란 때의 다른 교우들 가정이 다 그랬듯이 쫓겨 다니는 처지라 가정 형편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고 공부도 많이 못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과 용기가 뛰어나서 다른 성숙한 청년을 능가하는 용감한 청년이었던 그는 남달리 신심이 깊었고 김대건 신부님이 은이에서 전교 하실 때 30리나 되는 은이까지 밤으로 찾아가서 성사를 보고 신부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김 신부님이 밤에 미리내에 오셔서 성사를 주고 그날 밤으로 가실 때에는 빈첸시오가 으례 길을 안내해서 영접해 오고 또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 신부님을 각별히 따랐고 김 신부님의 어진 인품과 고결한 덕행에 많은 감화를 받았으며 신부님 또한 그의 강직하고 순박하면서도 열심한 수계 범절을 칭찬 하셨다고 한다.
* 사제가 되고 싶었던 빈첸시오*
김 신부님처럼 자기도 사제가 되어 천주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그는 나이 40세가 되도록 꿈울 접지 못하고 있다가 40세가 지나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50세가 가까이되자 총명이 떨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전보다 더 열심히 수계하여 부감목 신부 밑에서 여러 해 동안 복사를 했으며 서울 약현 본당 초대 정 신부를 도와드리는 등 교회 사업에 전념하여 당대나 후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평생 동정으로 살면서...*
평생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거룩하게 살아 모든 교우들로부터 반성인 이라 일컬어졌다.1853년 2월 페레올 고 주교님이 서거 하신 후 베르뇌 주교님의 분부로 페레올 주교님의 유해를 김대건 신부님 무덤 옆자리로 안장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앞장서서 주교님의 유해를 모셔다가 김 신부님 묘소 옆에 안장해 드리기도 하였다.
평생 동정으로 살면서 교회에 봉사해 오던 그는 1921년 12월9일 9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묵리에서 미리내 성당으로 모셔졌고 수백 명의 교우들이 참례한 가운데 드브레 주교님의 주레로 장례미사를 드리고 성당 앞 빈첸시오 선산에 안장할 때 주교께서는 연령방면 예절을 행하시며 무덤에 강복하셨다.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교회에서는 1976년 여름 그의 묘를 김 신부님 옆 현재의 무덤 자리로 이장하였다.
[자료: 고초골 피정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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