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7월 22일(월) 로마서 13:1-7 찬송 312장
5절)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제 12장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성도의 생활 윤리 중
제 12장이 성도의 교회 안에서의 삶의 자세와
교회의 대(對)사회 관계에 있어서의 삶의 태도에 관한 말씀이었다면
제 13장은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천국 시민인 성도의 두 신분 때문에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인
국가 권세에 대한 복종과 그 복종의 한계 및
그러한 두 신분을 가진 성도의 이 세상 속에서의 개개인의 삶의 자세를 말씀한다.
오늘 말씀은 먼저 성도가 지녀야 할
세상 국가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논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국가관은 근본적으로는 마22:21에 나타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울은 위정자(爲政者)들을 하나님의 일꾼들(6절)이라 규정하면서
성도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 이유는 위정자들이 갖고 있는 권세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기관들을 친히 제정하셨는데
가정(창2:18-25)과 교회(행243-47)가 그러하며
정부 혹은 국가 권세도 이에 해당한다.(단4:17)
따라서 성도는 세상 권세의 존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
이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듯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로마교회 내의 유대인 출신 성도 중 많은 수가
자신의 조국이 로마의 속국인 것 때문에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점차 가중되는 로마 정부의 정치적 박해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항하려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이 국가 권세를 세우신 것은
선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은 처벌에 의하여
제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선을 행하기를 힘쓴다면
결코 권세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다.(2-3절)
따라서 성도는 악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여 권세에 복종하는
소극적인 복종을 넘어서 자신의 양심에 준한 적극적인 복종을 해야 한다.(5절)
그런데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국가 권세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인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국가 권세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거나 양심을 거스린다면
당연히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우선적으로 섬겨야 한다.
국가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만
순종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바울은 이상의 이유들을 들어 성도가 성숙한 자세로
국가에 대해 납세의 의무를 행하며 하나님이 세운 자라는 측면에서
위정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할 것도 권고한다.(6-7절)
국가 권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맹목적인 적대감은 둘 다 옳지 못하다.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 나라에 속해 있으므로
주어진 의무를 다하며 그 권세가 하나님의 뜻에 바른 것인지를
분별하여 양심에 따라 성숙하게 대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벧전2:13-17)
이렇듯 성숙한 국민의 모습을 갖춘 성도라면
교회 내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좋은 본이 될 것이다.
80년 5월 21일
당시 다녔던 전주 신흥고에서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뒤숭숭했다.
결국은 몇몇 학생의 주도로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스크럼을 짜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았다.
이미 교문 밖에는 전경들이 둘러싸 있었기에
시내로 진출하지 못하고 두어시간 운동장을 돌다가 끝이 났다.
이 일로 학교는 1주일간 휴교령이 내렸다.
그때가 고2였다.
82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여전히 대학가는 데모로 인해 수업하는 날보다 휴강하는 날들이 많았다.
데모 대열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2학년을 마쳤다.
당시 신앙 훈련을 받았던 선교단체나
출석했던 교회에서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배우지 못했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만한 사상적 기초도 없었기에
주변 언저리를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입대하여 2년 4개월의 군복무을 마치고 제대하여
돌아온 학교는 여전히 학내 문제와 반정부 시위로 소란했기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복학하였다가 바로 1년을 휴학했다.
마침내 87년 6월 10일 노태우씨의 항복으로 시위는 끝이 났다.
그 당시 학교에서나 가투(시내투쟁)에서나
데모 대열을 따라다니며 뒤에 섰다.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그때의 꿈을 꾼다.
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숨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빚진 마음이 있다.
정의(공의)롭지 못한 불의한 일에 대해
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한 비겁한 행동에 대해 자책하며...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