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리 성지
주소 충남 부여군 홍산면 남촌 3구 101 교구 대전교구
성 손선지 , 성 정문호의 고향이다. 이곳에느 아직도 손선지의 종씨들이 비신자로 살로 있는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의 성인의 시성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본당에 밭을 기증했다 한다.
성 손선지(베드로)
손선지는 성운 이라고도 하는데 1820년 아버지 손달원 (이냐시오)과 어머니 임 세실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세하여 아버지 밑에서 직접 교리교육을 받으며 신심을 키워나갔다. 1837년, 불과 17세의 나이로 샤스땅 정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여 활동하였다. 김 루시아와 결혼했으며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충남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살던 중 장남 손순화 요한을 낳았다.
그 후 전라도로 이주하여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와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여 담배농사를 주업을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곳에서도 전교회장을 활동했으며 그의 집은 공소로 사용되었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전주 감영에서 나온 포교들에게 잡혔다. 포교는 손선지를 "사학의 괴수" 라 하여 앞세워 끌고 갔다.향리 오사현이 찾아와 "천주교을 믿지 않겠다는 말만 하면 포교와 의논하여 빼내 주겠다" 고 했으나 그는 "나는 이미 죽기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소.
당신이 그런 유혹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일이오"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포교들은 손선지를 심문하여 주리를 틀고 주장질을 했지만 , 팔이 부러지고 만신창이 가 도어서도 그리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니문하는 영장에게 자신은 생명을 바쳐 천주를 믿을 것임을 단호히 밝혔다. 내일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문을 들은 손선지는 함께 갇혀 있던 김사집에게 옷을 벗어 주면서 "나는 내일 죽을 몸이니 이 옷은 쓸모없다" 며 입으라 하였다.12월 13일 숲정이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형이 집행될 때가지 손선지는 하늘을 향하여 ' 예수 마리아" 를 계속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일명 기식이라고도 하며 1801년 충남 임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데, 손선지의 영향으로 입교 하였고 입교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하여 살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였다.
그는성품이 온화하고 예의가 바르면 행동이 모범적인 인격자였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식이 많고 신앙심이 깊어 외교인과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수계 생활을 도와 주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년 가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의 손길이 그가 살던 신리골에도 뻗쳐오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5일 저녁,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신리골에 담배를 사러 상인들이 출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주 진영의 포교들이 담배상인으로 가장하고 정문호의 지베 들이 닥쳤다. 그리고 " 천주교를 믿는다" 는 죄목으로 체포하였고 같은 마을에 살던 손선지, 한재권과 함께 전주 진영으로 압송하여 진영 앞 구류간에 수감했다.
이곳에는 앞서 잡혀온 조화서, 조윤호 부자와 이명서, 정원지 등의신자들도 있었다. 노구의 정문호는 3차에 걸쳐 심문을 받는 동안,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치명하자는 조화서의 권고와 격려를 받고 마음을 바로 잡아 치명키로 결심했다.그래서 영자에게 '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고 서슴없이 말했고 열심히 기도를 바치면서 마음의 평온과 기쁨을 잃지 않았다.
12월 13일, 그는 감옥을 나와 형장으로 가면서도 기쁜 얼굴로 열심히 기도 드렸다. 그리고 함께 형장을 가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오늘 천당 과거시험을 보러가고 있으니 오늘이야 말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오" 하였고 일행들도 그의 말에 동의 하였다. 정문호는 자기 차례가 되어 휘광이가 칼을 내리쳤지만 칼이 빗나가자 고개를 들고 휘광이를 바라보며 "어찌 하여 단칼에 목을 치지 못하느냐?" 하고 호령했다. 세번째 칼에 목이 잘렸는데 그이 목에서 흰 피가 흘러나왔다.그의 나이 65세 였다.
현재 기념비만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