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으로 명명(命名) 된 사유
大家(대가)라는 名稱(명칭)은 儒學(유학)의 大家(대가)이신 寒岡 鄭逑, 동강 김우옹 선생과 그 외 名賢巨儒(명현거유)가 많이 輩出(배출)되어 큰집이란 뜻에서 大家(대가)라 命名(명명)하였다 함.(출처 : 성주군)
대가면에는 옥련리, 칠봉리, 금산리, 옥성리, 옥화리, 용흥리, 대천리, 흥산리, 도남리 등 9개 리로 되어 있다.
(일부 설명 제외)
성주군 인구(2023년 12월 현재)는 24,095세대, 42,086명이며, 대가면은 1,351세대 2,316명이다. 참고로 1996년 인구가 53,675명이었으며, 1960년대에는 10만명이 넘었다.
星州郡 大家面 金山洞
금산동(金山洞) 영파면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가면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대산동, 조양동, 금곡동, 삼산동을 병합하였으며, 금곡과 대산의 이름을 따서 금산리라고 하였다.
가야산, 다락산, 칠봉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삼산(三山)[상상삼(上象三) · 웃상삼], 뫼재[조양(朝陽) · 산령(山嶺)], 대산령(大山嶺)[대실령], 당고개[당현(堂峴)] 등의 마을이 있다.
삼산 마을은 가야산, 다락산, 칠봉산이 앞을 둘러 싸고 있어 불리게 된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명종 때 밀양에서 삼성재(三省齋) 박윤연(朴潤連)이 이거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세거한다.
웃상삼은 삼산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 뫼재는 산고개의 마을이란 뜻이며, 산골이서 아침에 해가 뜨는 것만 볼 수 있고 저녁에는 산이 가려서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일부 지역은 ‘조양’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산령에는 마을 뒤에 산이 가로 놓여 있으며 언덕 위에 여우터란 곳이 있다. 이 여우터 고개에 마을이 있어서 대산령으로 부르다가 대실령이 되었다. 당고개는 성주읍에서 군내 서부 지역으로 통하는 고개 마루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고개에 성황당과 나그네를 위한 주막이 있어 당고개 혹은 당현으로 부른다.
문화유적으로는 경성재(景省齋)와 대산재(大山齋) 등이 있다. 경성재는 삼산 마을의 밀양인 삼성재 박윤연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대산재는 대산령 마을에 있으며, 김해인(金海人) 남곡(南谷) 김대생(金大生)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그는 현감을 역임하다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으며, 후손들이 세거한다.
1912년 금산동에는 姜氏, 郭氏, 權氏, 奇氏, 金氏, 朴氏, 裵氏, 白氏, 史氏, 申氏, 吳氏, 柳氏, 李氏, 林氏, 張氏, 全氏, 鄭氏, 曺氏, 韓氏, 洪氏 등 적어도 20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朴氏 · 裵氏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인터넷 1912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금산동(金山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본문 중에서
금산리
본래 영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산동, 조양동, 금곡동과 대가면의 삼산동을 병합하여 금곡과 대산의 이름을 따서 금산리라 하여 대가면으로 편입되었음.
금산리는 동쪽 상산(象山, 165m), 다락산(樓山, 다락산 380m)이 둘러 있고, 대가면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33번 국도의 중간부 땅고개 부근과 그 동쪽 산간에 산재하고 있는 자연부락이며 1988년 당시 5개 마을 인구는 84호, 인구는 255명이다. (웃상삼 세대는 30여 호 정도?)
상삼(上三, 象三,池山)
大家初等學校지나 도로변의 西便 언덕길 산골에 낮은 산을 등지고 南向한 “아래상삼"과 그곳의 細川上流쪽의 貯水池가 있는 곳의 "못안상삼"과 땅고개 비탈길의 北山間 金山의 “웃상삼”으로 3分되어 있다.
아래상삼 마을에는 星山人 花堂 裵規와 두 아들 閑, 閏의 3부자가 文科를 거쳐 함께 大司成을 한 名伐이였고, 裵閏은 世宗 大司 諫,弘文館直提學을 지낸 大家였고, 世祖때 殂命당한 金宗瑞는 裵閏의 사위다.
웃상삼(上象三)
대가면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국도 중간쯤에 염속산(厭俗山)에서 뻗어내린 맥이 칠봉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언덕을 당고개(땅고개)라고 하는데 언덕 북쪽에 산자락으로 마을을 가리고 들어앉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 명종때 밀양에서 삼성재(三省齋) 박윤연(朴潤連, 1555生)이 입향(入鄕)하여 시문(詩文)을 벗삼았고, 그 후손들이 경성재(景省齋)를 지어 추모하고 500년 노거수와 모도비(慕道碑)가 있다.
뫼재(미재)(朝陽, 山嶺)
웃상삼 남쪽 샛길에 있는 마을이며 뫼재마을은 산고개의 마을이란 뜻이다. 아래뫼재마을의 일부를 조양(朝陽)이라 하는데 조양이라 함은 새날이 밝아 아침 해가 뜨고 봉황이 노래하는 상서(祥瑞)로움을 표방하였는데 시경(詩經)의 구절(句節)에 비유한 지명이다.
대산령(大山嶺)
다락산의 북쪽 뫼재 북쪽 방향 좁을 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
선조 때 김해인 남곡(南谷) 김대생(金大生, 1557년)이 현감에서 물러나 원주에서 입향하여그 후손들이 대산재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이 마을의 성산인 배재기(裵在麒 1921∼1988)는 학문과 전의(典儀)에 밝았다.
가느골(금곡)
땅고개 남쪽 산간 국도에서 500m 들어앉은 마을
당고개(堂峴)
땅고개라고 부르는 당고개 마을은 국도가 접한 마을이며, 민속신앙의 성황당(城隍堂)의 당터가 있었기로 당고개라 한다.
옥화리
본래 성주군 영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리동, 오현동, 남정동, 행화동을 병합하여 옥화리라 하여 대가면으로 편입되었음.
대천리
大伽川邊과 伽泉面으로 트인 국도를 접해서 대가면의 서단부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지이다.
杏亭.뒷골.샛덤.장밭.굴미기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원래 今巴谷坊에 소속되었던 이곳의 굴미기는 옹기가마가 있었던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봉동(鳳洞)
大家初等學校의 細川을 接하여 鳳頭山을 등지고 西向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麗三重을 지낸 廣平君李能(陵)의 後孫이 살고 根의 아들 李漢錫(1872生)이 詩賦에 밝았고 德望이 높았다.
哲人林錫圭가 知禮에서 입향해서 世居했고 아들 白蓮 林洪洙(1866生)는 文科에 올라 聲水臺에서 経史와 儀禮를 後門에 講學했다. 晋州人鄭師賢의 後孫 鄭好夫가 文望을 떨친 곳이다.
옥성리
대가면의 소재지로 표고 100m의 구릉에 자리하여 성주읍을 가까이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로는 국도가 관통하고 남북으로는 지방도가 개설되어있다. 옥성리에는 여수동(麗水洞), 군장리(軍臧里), 여우실, 안터(內基), 앵무동(鶯舞洞)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 되어 있다.
星里는 郡內 6個面과 隣接한 大家面의 所在地 里洞이다. 東西로 33번 國道가 貫通하며 南北으로 地方道가 交叉하는 地點 이고 1914年 行政 改編에 依해서 大家面으로 된 뒤에 現 面事務所 周邊에는 질그릇(옹기) 가마가 있었고 甕器類를 散賣하는 곳이라 하여 "여으실점(店)”이라 했다.
이곳에는 良質의 高嶺土가 많아서 질그릇 原料로 利用되었고 高嶺土가 있는 곳을 옛날에는 “분통골”이라 했다. 星里는 交通의 便易로 未來志向的 小都市로 開發이 豫想되는 곳이다.
여으실(狐谷) - 대가면소재지
面所地 中心部의 原地名이 "여으실"은 商街 等으로 變貌해서 地名이 잊혀져 가고 碧珍의 여으실마을이 統稱으로 되고있다.
地名의 “여으”는 여우(狐)의 古語이고 杜詩彥解에 “草中狐兎…” 를 "플소개 여으와 톳기는..."의 例를 볼 수 있다.
여우는 지혜롭고 끈기가 있어 옛 사람들이 좋아하던 動物이다.
이 마을 의 花崗巖은 石質이 이름나 있고 그 앞의 貯水池 部分을 분통골이라 했다.
앵뫼동(洞)
大家面事務所 東國道 약 1km 거리의 國道를 接해서 南向한 마 을이며 西北에는 앵무산(鶯舞山:177m)의 緩慢한 地脈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마을에는 碧珍人 살았고 李光의 사위 德溪健은 사도 실에 살면서 星州鄕校의 教授로 東岡, 寒岡을 길렀고 文風을 振興시 켰다.
宣祖때는 原州人仁同에 내려와 後孫이 이곳에 살았다. 마을 앞에는 大星初等學校가 과거에 있었다.
안터(內垈)
大星初等學校 北쪽 뒤의 낮은 丘陵 넘어로 아늑하게 南向한 마을 이다.
義城金氏의 集姓 마을인 이곳에 太祖때 忠淸兵馬都節制使를 지낸 內省用超가 ㅈ鄕하여 마을 들머리에 遺墟碑가 세워져 있고 그 8世孫이고 四友堂 金石의 둘째 孫子인 溪峰 金天諜(1558~1621) 은 寒岡의 門人이고 壬辰倭乱 때 功勳을 세웠으며 이 追慕하는 溪齋가 있다.
이곳의 敬堂은 默齋 金枓를 追慕하는 宗堂이고 또 赤城(山淸) 郡守를 지내고 詩文과 経史에 特出한 敬齋 金重南(1606~1698)의 廟址碑가 있다.
이상 마을이름 출처 : 성주마을지(星州마을誌)(1988 성주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