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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
근대 초기에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을 알린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그는 기독교 사상만 진리라고 말하는 중세 철학에서 벗어나 과학적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경험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철학은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는 항상 아는 것이 힘이라며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직접 관찰하고 실험하면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베이컨은 "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하고 경험주의를 주장한 철학자들을 '경험주의자'라고 한다.
베이컨의 4개의 우상
베이컨은 <신기관>이라는 책을 썼는데 '새로운 기관' 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책이 <기관>인데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논리학을 제시하겠다는 의미였다. 베이컨이 제시한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낡은 편견으로 벗어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귀납법을 표준적 방법론으로 사용하자는 것.
베이컨은 중세 학문이 현학적이고 종교적 권위만 내세우며 자만과 신비주의, 미신에 빠져 있기에 기존 학문과 단절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4가지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상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한다)
1. 종족의 우상
인간의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 원숭이는 원숭이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돌고래는 돌고래 관점에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왜곡된 인식이 있는데 이것을 종족의 우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하다 보니 자연도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떤 하찮은 존재자도 존재의 목적이 있다든지, 소소한 사건도 신의 계획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새가 노래하고 나비가 춤춘다' 새는 그저 지저귄 거고, 나비는 그저 날갯짓을 한 것뿐인데 사람들이 사람 위주로 표현하고 해석했다는 것.
2. 동굴의 우상
개개인이 가진 습관이나 취향에서 오는 선입견과 편견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회적 지위나 환경에 처해있다. 그에 따라 개개인은 주관적인 생각이나 취향을 갖게 된다. 이는 자신만의 동굴에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인간은 자신만의 동굴 속에 살고 자신만의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 신념이나 개인적 성향은 우리가 객관적 진리를 보는 것을 방해한다. 이를 동굴의 우상이라고 한다.
3. 시장의 우상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때문에 생기는 왜곡된 인식을 말한다. 언어와 문자를 잘못 사용해서 생기는 선입견과 편견을 말한다. 시장에서처럼 교류가 활발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어떤 말을 만들어내면 사람들은 그 말을 실제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종종 귀신이나 도깨비, 천사와 악마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들의 존재는 증명된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실제로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있다고 믿는 것을 시장의 우상이라고 한다.
4. 극장의 우상
그럴듯하게 꾸며진 철학이나 학설, 전통을 무조건 믿는 데서 생기는 선입견과 편견을 말한다. 유명한 책이나 논문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자님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다른데 공자님 말씀이라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베이컨은 어떤 학설이라도 모두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또 그는 종교적 미신과 신학은 말할 것도 없이 우상이라고 했다.
인간이 우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떤 우상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왜곡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우리가 왜곡된 인식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그럴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다.
베이컨은 근대 철학의 선두에 서서 과학 시대를 이끈 사람이다. 그는 스콜라 철학으로 인해 생긴 편견을 없애기 위해 ‘4대 우상론’을 내세웠고, 귀납법에 기초한 지식 체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성경과 미신에 주눅 들어 있던 인간 이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본문
“베이컨은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없고, 큰 위험에 맞서지도 못하며 위대한 희생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 베이컨 당시에 누군가가 쓴 그에 대한 평가글
“나는 지난 50년간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나를 몰아낸) 이 판결은 최근 200년 동안 의회가 내린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열다
흔히 서양의 17세기는 천재들의 세기라 불린다. 갈릴레이1), 뉴턴, 보일2) 등 인류 역사를 바꾼 걸출한 학자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다.
나무가 크고 훌륭하게 자라려면 그만큼 좋은 토양과 환경이 필요한 법, 이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다.
이 천재들이 튼튼하게 자라는 데 걸맞은 사상적 토양과 환경을 만든 학자들이 있었다. 이성의 힘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고, 경험에 바탕을 둔 학문 탐구 전통을 세웠던 근대 철학자들이다.
미신과 신앙을 과학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적 풍토가 계속되었다면, 17세기 천재들의 학문 업적은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터다.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근대 철학의 선두에 서서 과학 시대를 이끈 사람이다.
그는 지식이란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려면 모든 지식은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
정작 그 자신은 경험에 기초한 대단한 과학적 발견을 한 것이 없다. 대신,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학문적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성경》의 권위와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 분위기를 뚫고 근대의 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사상의 토양을 일구었던 셈이다.
경탄할 만한 학문의 거미줄?
베이컨은 156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베이컨의 성장 과정과 교육 목표는 모두 정치를 향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3)의 통치 아래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대영제국의 높은 관료였다.
베이컨이 받은 교육도 엘리트 관료가 거치는 전형적인 코스였다. 그의 형제들도 나중에 모두 고위 관직에 올랐다.
최고 명문가의 소년 베이컨은 12세에 이미 출세를 위한 예비 학교 격인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엘리트들이 흔히 그랬듯, 그도 이곳에서 《성경》에 기초해 세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4)을 공부했다.
그러나 어린 베이컨의 눈에 비친 스콜라 철학은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치밀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경탄할 만한 학문의 거미줄’을 짓는다 할지라도, 《성경》에만 기초해 만든 철학은 소용이 없다.
적을 이기려면 먼저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법,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만들려면 먼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잘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공허한 사색보다는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공부는 3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스콜라 철학이 지배하던 대학의 분위기는 그가 학문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용한 학자로 생활하기에는 그의 야심이 너무 컸다. 당시 영국 학자들의 생활은 ‘일하면서 연구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싶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조폐국장을 지냈고 유명한 작가인 밀턴5)도 정치를 했다.
이 시기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들을 흔히 ‘영국 경험론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 추구와 실생활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 가운데 철학 하는 것을 생계로 삼은 직업 철학자는 없었다. 외교관, 정치인, 관료 등 다른 직업 활동을 하면서 철학을 했던 것이다.
항상 경험에 기초한 확실한 지식을 주장했던 이들의 태도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출세를 향한 길고 긴 사다리
베이컨은 어릴 때부터 정치에 뛰어들었다. 16세의 나이로 ‘이해득실을 신중하게 계산한 끝에’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의 수행원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베이컨은 관료의 평탄한 길을 걸으며 성공할 운명을 따를 듯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는 극적인 데가 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죽으면서, 잘나가던 소년의 출세 길은 한순간에 막히고 말았다. 급히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별다른 재산을 남겨 놓지 않았다.
막내인 데다가 아직 나이가 어렸던 탓이었다. 겨우 열여덟이던 베이컨은 당장 생활에 곤란을 느끼게 되었다.
베이컨 시대 사람들은 그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를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없고 큰 위험에 맞서지도 못하며 위대한 희생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베이컨을 비열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여겼던 듯싶다. 그가 이런 평가를 받는 데는 출세욕에 불타는 젊은 청년의 절박한 현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미 귀족의 사치스런 생활과 고위층과의 사교에 익숙해진 베이컨이 지금까지 누려 왔던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할 방법은 정치를 통한 출세뿐이었다.
청년 베이컨에게는 출세를 위한 자신의 수단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가릴 여유가 없었다.
끊임없이 벼슬자리를 구걸했지만, 주위의 유력한 친척들은 베이컨이 원하는 자리를 얻어 주지 못했다. 그의 야심이 나이에 비해 너무 컸던 까닭이다.
결국 그는 혼자 힘으로 출세하기로 결심했다. 피나는 공부 끝에 21세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 ‘웅변술이 필요 없는 웅변가’라는 격찬을 들으며 지방 의회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그의 출세 길은 평탄하지 못했다. 세금을 늘리기로 한 여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연설을 해서 미움을 샀을뿐더러, 이를 만회하기 위한 행동들도 주변의 경멸을 사기만 했다.
그가 어려웠던 시절, 법학 공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여왕의 전 애인 에섹스 경이 반역 혐의로 고발되자, 자청해서 그를 처벌할 검사로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은인이 처형당하는 데 앞장섰던 그를 편드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이 시기 그의 생활은 수입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소망은 직함, 후원인, 대저택, 아름다운 정원, 많은 하인, 진기한 장식장 등을 갖추는 것이다’라며 베이컨의 낭비벽을 비꼬기도 했다.
그는 과시와 사치를 즐기는, 출세욕과 권력욕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그는 정치에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면 장대함과 화려함은 기본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의 사치스런 생활은 비즈니스의 일부였던 셈이다. 그는 항상 1년치 수입만큼의 빚을 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더더욱 출세를 위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베이컨이 바라던 관료로서의 성공은 제임스 1세가 즉위한 뒤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과 의회 사이의 권력 다툼6)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가 왕의 편에 섬으로써 확실하게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또한 다방면에 걸친 재능과 거의 무한하다고 할 만한 지식은 그를 한껏 돋보이게 했다. 베이컨은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48세에 법무차관, 52세에 법무장관을 거쳐 57세에는 마침내 최고의 관직인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고, 남작과 자작의 작위까지 차례로 받았다. 관료로서 최고의 성공을 움켜쥔 것이다.
편견을 뿌리 뽑는 4대 우상론
삶의 모습만을 본다면 베이컨은 철학자라기보다 정치가였다. 그의 철학적 작업은 어찌 보면 부업이고, 여가 활동이었다.
그는 현실과 사상의 균형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바쁜 정치 일정 속에서도 독서와 철학적인 저술을 동시에 해 나갔다. 그는 평생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모든 학문은 실생활에 유용한 것이어야 하며, 이럴 때에만 지식은 곧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목적은 결국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꿰뚫어 알고 지배할 수 있는 거대한 학문 체계를 새롭게 구상하려 했다.
이 엄청난 시도는 《신기관(新機關)》으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기관(organon)’이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를 말하는데, 스콜라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논리학을 뜻한다.
당시의 논리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뜻했다. 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성경》과 과거의 권위 있는 이론에서부터 논리학을 통해 연역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연역법이 아닌 귀납법을 썼다. 그는 일상적인 경험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지식과 법칙을 이끌어 내려 했다.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지식을 만들어 내는 귀납법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귀납법을 바로 학문에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과거 수백 년 동안 스콜라 철학이 인간 정신에 박아 놓은 ‘편견’이 너무도 컸던 탓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편견을 뿌리 뽑을 목적에서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유명한 ‘4대 우상론’을 내세웠다.
종족의 우상이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편견을 말한다. 우리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아서, 자연현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인간과 관련 지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번개가 치는 이유를 우리가 벼락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 보는 오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편견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우리 속담은 이 우상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 준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에서 생기는 잘못된 생각이다. 증권시장은 시장의 우상으로 베이컨이 설명하려는 바를 잘 보여 준다.
증권시장에서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입 소문만으로도 시세가 올랐다 내렸다 한다.
마찬가지로, 행운의 여신, 봉황 같은 말들도 실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시장의 우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기존 이론이나 종교의 권위에 기대는 오류를 말한다.
잘 차려진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듯, 그릇된 많은 학설들이 기득권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판단을 어지럽힌다.
베이컨은 이성을 흐리게 하는 모든 편견을 거둬 내고, 귀납법에 기초한 유용한 지식 체계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결국 아이디어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 바쁜 생활 탓에 깊이 사색하고 학문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세의 끝, 허망한 죽음
베이컨은 60대에 이르러, 최고의 출세와 《신기관》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을 손에 쥔 순간, 다시는 올라올 꿈도 못 꿀 만큼 추락해 버리고 만다.
베이컨에게 학문의 적은 없었지만, 정치 세계에서의 적은 너무나 많았다. 그의 성공은 의회와 왕이 갈등하는 상황에서 왕을 강력하게 옹호했기에 가능했다.
의회가 그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적들은 마침내 그를 제거할 꼬리를 잡았다.
대법관 베이컨이 재판 과정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당시에는 재판관이 피고에게 돈을 받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단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일단 문제가 되면 치명타가 되는 법이다.
현실 정치에 밝았던 베이컨이 이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의회의 고소에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그는 ‘나는 지난 50년 동안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자신을 몰아내는) 이 판결은 최근 200년 동안 의회가 내린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처벌을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관직에서 쫓겨나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를 찍어 내기 위한 정치적 술수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정치에 더 이상 뜻이 없음이 확인되자 곧 풀려났을뿐더러, 베이컨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리지도 않았다. 그 뒤 그는 런던 외곽에 은둔하며 학문 탐구에만 전념했다.
1626년, 66세의 베이컨은 지독한 독감 끝에 숨을 거두었다. 베이컨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과학의 순교자 같은 모습이 엿보인다.
눈 덮인 시골 길을 걷던 베이컨은 문득 눈이 얼마나 부패를 막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는 즉시 실험을 하기로 마음먹고 농가로 가서 닭 한 마리를 사 배를 갈라 눈을 채운 뒤 땅에 묻었단다.
베이컨은 병상에 누워 실험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라고 만족했지만, 실험을 하기 위해 추운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었던 탓에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겸손함을 놓치다
베이컨의 삶은 출세욕과 학문적 성취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정치가로서의 베이컨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했듯, 철학자로서의 베이컨은 학문으로 자연을 완벽하게 인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는 기술과 자연의 경주에서 기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가 철학에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성경》의 권위와 미신에 주눅 들어 있던 인간 이성에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일이다. 그가 강조한 경험에 기초한 이성적 사고 덕택에, 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놓친 부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이성의 겸손함이었다.
이성을 짓누르던 편견에서 해방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풍요와 행복을 누렸다.
그러나 이용당하는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나머지, 인류는 각종 환경오염과 사회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편견과 단점을 깨닫고 스스로 반성할 줄 안다는 데에 있다.
베이컨이 인간 정신을 주눅 들게 했던 편견을 일깨워 주었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이성을 자만에 차게 한 ‘베이컨적 편견’을 일깨워 줄 철학이다.
원전 속으로
베이컨의 4대 우상론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감각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주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터다.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인간의 모든 지각은 감각이든 정신이든 우주가 아닌 인간 자신을 준거로 삼기 쉽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말이다. 매끄럽지 못한 거울은 사물을 비틀리게 비춘다. 인간의 지성도 그렇다. (중략)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들이 가진 우상이다. 사람들 하나하나는 자연의 빛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동굴들을 제 나름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마다의 개성이거나, 교육이나 다른 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거나, 읽은 책이나 존경하여 떠받드는 사람의 권위, 첫인상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 정신은 각자의 성격에 따라 변덕이 심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은 넓은 세계가 아닌, 상당히 좁은 세계에서 지식을 구한다’라고 했다. 이는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중략)
또한,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만남에서 생기는 우상이 있다. 이는 의사소통과 만남에서 생기므로 ‘시장의 우상’이라 할 만하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을 나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을 따라간다.
잘못 만들어진 말은 우리의 생각을 심하게 방해한다. 학자들은 자신을 지키려고 새로운 정의나 설명을 내놓곤 하지만, 상황을 더 낫게 하지는 못한다.
언어는 여전히 생각을 어지럽히고, 모든 것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헛헛한 논쟁이나 하며 수많은 오류에 부딪힌다. (중략)
마지막으로, 여러 학문과 잘못된 증명 때문에 생기는 우상이 있다. 이를 나는 ‘극장의 우상’이라고 부른다. 철학 이론이란 무대의 세계를 꾸리는 각본과 같다.
각본은 수없이 만들어져 무대에 오른다. 이때 오류의 종류는 아주 다르지만 그 원인은 대부분 같다.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관습과 태만이 일상화된 다른 분야들도 마찬가지다.
- 《신기관》 중에서
첫댓글 *4대 우상, 편견과 선입견의 인지 및 극복노력(실재계의 장소와 나무)
예습 / 이희형
근조 화환은 나보다 더 키가 컸다 열을 맞춰 천천히 시들어갔다 상주보다 더 상주 같았다
혼자서 가운을 여미는 것은 나에겐 벅찬 일이었다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해서 장례식장에서 삼천 원짜리
자동 넥타이를 샀다 얼마 안돼서 실밥이 다 터져 나와서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모두 목을 잘 동여매고 있었고 모두가 검정색 양복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누가 죽을 것을 어디서 배워온 것처럼
복도마다 가지런한 영정 사진
다들 너무 늙었고 너무 젊다
빈소엔 죽은 사람들과 산사람들이 함께 웃고
나는 이제 잠이 온다
미동하지 않는 것들의 어깨를 흔들어도 될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한번 흔들어볼까
늘어진 화환은 형들의 목매달았던 나무와 무척 닮았다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보면 죽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국화는 시들어도
정말 하얬다
나는 키가 작아서 죽지 못했어, 작은 형이 이 말을 하고 일 년 뒤 죽어버렸을 때 나는 죽기에는 너무 늦었구나
생각했다 역시 형들은 뭐든 나보다 잘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필사적으로 걸었다
걷다 보면 저기
나의 나무가 보였다
그곳은 어땠니?
사람이 많이 왔니
감사합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