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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6).
○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게도, 망가뜨리기도 하는 힘이다.”
- 다음 국어사전.
욕망의 동의어가 몇 가지 있다. 삶에 필수적인 것을 충족시키려는 필요(need), 마음이 원하는 사소한 것인 소원(want)의 단계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욕구 또는 욕망(desire)이 있다.
이 단어들이 혼용되기도 한다. 즉 need는 욕구나 필요로, want는 필요, 소원 및 요구로, desire는 욕망, 욕구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정욕(lust)이나 욕심, 탐욕, 탐심(greed)은 주로 죄나 유혹의 결과 일어나는 것들로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욕망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의 동기가 무엇이며, 얼마만큼 추구하고,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이기적, 세상적, 육신적 욕망(Fleshly desire)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성령의 욕망(Holy Spirit’s desire)은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한다.
욕망과 유사한 단어로 욕심, 탐심, 탐욕 등이 있는데 이런 단어들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 욕망에 관한 명언들
욕망에 관한 명언을 잠시 살펴보자.
"사람의 욕망은 내버려두면 한이 없다. 끝없는 욕망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자기 욕망에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목표를 분명히 가진 것이 된다."
–괴테.
'성취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은 욕망이다. 보잘것없는 욕망은 보잘것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작은 불씨로는 작은 열을 낼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나폴레옹 힐.
"우리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는 세 가지 유혹이 있다. 첫째는 성적 욕망이요, 둘째는 자만심이요, 셋째는 부에 대한 턱없는 욕망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세 가지 탐욕에서 비롯된다.
그런 욕망만 없다면 인간은 행복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 몹시 병들은 우리들이 그것을 어떻게 멸절(滅絶)시킨단 말인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을 단련시키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세계는 오직 마음을 갈고 닦음으로써 개선될 것이다."
–라메네.
"우리는 성취에서보다 오히려 욕망에서 살고 있다."
-조지 무어.
"만약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소유물을 늘리지 말고 욕망의 양을 줄여주는 것이다."
–세네카.
"올바른 자는 자기의 욕망을 조정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는 욕망에 조종 당한다."
–탈무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라. 지금 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마음의 평온을 가지려고 노력하라. 이야말로 가장 유익하면서도 자기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자유롭고자 한다면 자기의 욕망을 누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라.
욕망이 작으면 작을수록 인생은 행복하다. 이 말은 낡았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진리이다."
–톨스토이.
"욕망과 성적 충동이 인간 행동의 두 가지 동기이다."
–프로이드.
"욕망의 절반이 실현되면 고생은 두 배가 될 것이다."
- B. 프랭클린.
○ ‘육신을 따르는 욕망’과 ‘성령을 따르는 욕망’
위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욕망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욕망(desire)을 중립적으로 취급한다.
사람이 생활을 하는데 돈, 건강, 권력, 성(性), 명예, 사랑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욕망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것이 방향성 즉 욕망을 추구하는 의도이다. 이런 것들을 나를 위해 추구하느냐 하나님을 위해 추구하느냐에 똑같은 욕망이라도 결과가 달라진다.
육신(flesh)의 생각이나 의도를 따라 추구하면 멸망으로 인도되고, 성령(The Spirit)의 생각이나 의도를 따라 추구하면 생명과 평안을 누린다(롬 8:6 참조).
‘육신’ 즉 죄 된 자신을 위해 무엇을 추구하면 그것은 멸망과 사망으로 이어진다.
육신적으로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요일 2:15-16).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몸이 아니라 ‘죄의 영향을 받는 인간의 전인격’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영향을 위해 추구하면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된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교계의 유명 인사 중에서도 욕망과 정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평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사변 이후의 경제적 궁핍 시기를 거치면서 ‘더 많이, 더 크게’ 소원하고 욕망하여 충족시키는 것이 한국 개신교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선교 1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선교사 파송 세계 2위 또는3위, 기독교율 20퍼센트에 육박하는 세계적인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개신교 신자들 중에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고 구제와 봉사도 타 종교에 비해서 많이 한다. 그러나 불교, 천주교에 다음으로 종교 선호도에서 꼴찌이다.
왜 그런가? 욕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억누르고 부인해 왔던 욕망이 ‘잘 살아보세!’란 경제개발과 ‘믿습니다’란 긍정적 사고를 통해 한껏 부추겨져서 어느 정도 충족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제대로 절제도 못하고 승화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사사 시대’에서도 발견한다.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도움을 주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안정되면 나태하고 방탕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다시 시험과 환란이 와서 영혼은 곤고해지고 삶은 힘들어 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악순환을 반복한 이유는 죄성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욕구의 종류
아브라함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2가지로 대별한다.
- 결핍욕구. 생리적 욕구→안전 욕구→소속과 사랑 욕구→자존감의 욕구
- 성장욕구. 인식의 욕구→미적 욕구→자아실현 욕구→초월적·영적 욕구.
결핍욕구는 한 번 충족되면 더 이상 동기로서 작용하지 않지만 성장욕구는 충족이 될수록 그 욕구가 더욱 증대된다.
매슬로는 초기에는 결핍욕구가 강하지만 이것이 채워지면 성장욕구가 살아난다고 한다. 욕구가 승화될수록 삶의 질도 높아진다. 사람은 성장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고 승화시킬 때 삶의 보람과 만족을 누린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 의할 때,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아직도 결핍욕구 충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넓고 좋은 아파트, 외제 자동차, 맛있는 음식, 명품 옷과 장신구, 일류대학과 일류직장, 목회자는 큰 교회와 단체의 장 등, 이런 것을 가짐으로써 누리는 안전 욕구, 존경 욕구 등을 많은 신자나 목회자가 축복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가질 때 잠시 좋은 것이지 지속적이고 깊은 만족은 주지 못한다.
항상 이런 것들보다 더 좋고 더 비싼 것들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내가 평생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져본 들 시간이 지날수록 영적 허무감, 공허감 및 상실감이 더해 가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적 성장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결핍욕구 충족을 뛰어넘어 성장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한 소유의 사람과 존재의 사람과 유사하다.
소유의 사람은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서 만족을 얻지만 존재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매슬로가 말하는 결핍욕구 충족이나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소유의 분야는 잘 해왔지만 성장욕구 충족과 존재의 분야에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개신교는 매슬로의 ‘자아실현’ 욕구에 해당되는 거룩, 사랑의 회복과 실천 및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초월, 영적 상태 실현에는 타 종교보다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욕망을 다루는 법: 욕망충족, 안분자족, 욕망부인
어떻게 하면 결핍 욕구 충족에서 성장 욕구 충족으로, 소유의 사람에서 존재의 사람으로 신앙을 승화시킬 수 있는가?
욕망을 다루는 법을 통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중국의 사상가인 양수명은 욕망을 다루는 방법에 따라 서양문화, 중국문화 및 인도문화로 구분한다.
양수명은 문화의 3가지 성향을 통해 서양 문명의 우위를 설명한다.
문화의 차이란 추상적인 양식의 문제일 뿐 아니라 생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차이인데 문제 해결의 방법-혹은 생활양식-에는 3가지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하는 생소하고 어려운 용어를 필자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로 정리했다.
- 욕망충족 성향(서양인의 성향)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고 애쓰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투쟁하는 태도다.
문제에 부딪치면 늘 전진하여 실천하고 그 결과 국면을 바꾸어 욕구를 충족시킨다.
- 안분자족 성향(중국인의 성향)
문제에 부딪치면 해결하지 않고 바로 그 처지에서 자기 만족을 구한다. 가령 집이 작고 비가 새면 욕망충족의 사람은 집을 고치거나 바꾸려고 하지만 이 성향의 사람은 집을 개조하는 대신 자기 생각을 바꿈으로써 현실에 안주한다.
- 욕망부인 성향(인도인의 성향)
앞의 두 가지 성향과는 반대다. 상황이나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상황이나 문제를 아예 취소하려고 한다.
욕망충족적인 서양 문화는 이런 성향을 바탕으로 한 자연정복, 과학정신, 민주주의와 같은 찬란한 정신문명 및 물질문명을 이루어내었다.
-자연정복. 찬란한 서구문명은 자연정복의 집합이다.
-과학정신. 현상을 바꾸려고 하고 세분하여 분석적으로 고찰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민주주의. 각종 권위, 세력에 대한 반항, 분투, 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서양은 성경의 가르침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욕망충족형 문화’에 눈을 뜨면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의 유교와 도교는 안분자족형 문화, 인도의 불교는 욕망부인형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서양 외의 문화권은 아직도 소수 특권층은 무한한 축복을 누리지만 절대 다수의 백성들은 도탄에서 신음한다.
그런 나라들은 지금도 그렇다. 소수 특권층의 고상한(?) 정신 문화는 절대다수 백성들의 가난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물론 동양에서 4대 문명이 시작되고, 18세기까지 중국이 문명에서 유럽 보다 앞서 있었지만 산업은 주로 농업위주의 일차 산업이었다.
또한 중국이 비록 서양 보다 문명이 앞섰다고 하지만 장인 혼자 주물럭거리는 수준에 머물렀고 과학정신이 결여되어 기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거나 전수하지 못하였다.
만일 중국이나 인도가 유럽 문명과 충돌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18세기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양수명은 진단한다.
그러나 욕망충족형 서구 문화가 이제는 욕망부인형 인도 문화를 배우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돈, 섹스, 권력, 명에 등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를 누려보았지만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한 각종 심인성 질병, 인생에 대한 허무와 공허가 임하기 때문이다.
○ 신앙과 욕망의 조화
신앙이 미성숙한 사람의 성향
-욕구충족 성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의 육신적 재미, 성공, 부귀, 명예의 충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안분자족 성향. 신앙생활의 진보에 무관심하고 현상에 만족하고(계 2:1-7),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현실적인 소유와 성공에 만족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인들이다(계 3:14-22).
-욕구절제 성향. 신령한 은혜, 영성개발, 영적성숙, 인격적 성숙에 무관심하거나 이것들을 의도적으로 기피한다. 그 결과, 자기 영광과 세상 영광을 탐하는 미성숙한 신앙인에 머물고 만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의 성향
-욕구충족 성향. 신령한 은혜, 영성계발, 영적성숙, 인격적 성숙에 더욱 열심을 낸다.
-안분자족 성향. 현재 소유한 것에 만족하고 빈부에도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다(빌 4:12; 잠언 30:8-9).
-욕구절제 성향.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절제한다(롬 12:2; 골 3:5-10; 요일서 2:15-17 참조).
신자라면 당연히 전자의 단계에서 후자의 단계로 성숙해 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