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쳉스토호바 (Czestochowa) 성모발현 성지
폴란드인들의 정신적인 수도이자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인 챙스토호바는 세계적인 성지순례지로 잘 알려져 있다.
■ 야스나 구라 수도원 (Jasna Gora Monastery)
1) 야스나 구라 수도원 (Jasna Gora Monastery)
쳉스토호바 주가지 언덕 위쪽에 위치한 야스나구라 수도원의 정식명칭은 ‘성바오로 은수자회의 수도원’으로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증언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블랙마돈나’로 불리우는 신비로운 마리아상을 방문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블랙마돈나 (Black Madonna)
블랙마돈나로 불리우는 이 성모화는 야스나구라에 있는 성 바오로 은수자회의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다. 처음부터 이 성화는 정치적 불안 시대에 살던 수도자들과 기사들 그리고 치유의 은사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병자들, 교회의 일치를 회구하여 기도해온 신자들로부터 큰 공경을 받았다.
18세기에는 폴란드가 독립을 잃게 되었는데, 이 때 성모님은 모든 항쟁의 수호자가 되셨고, 민중들은 마리아를 해방과 국가 통치권의 수호자로 열렬히 모셨다. 지금까지 야스나구라 수도원은 폴란드의 영적 수도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폴란드 교회의 시노드, 주교회의를 비롯하여 각종 대회 및 전국적인 심포지움이 열린다. 역대 교황들은 성모님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지원과 함께 많은 특전들을 부여하였다.
첸스토호바 (Czestochowa) 의 성모님 -블랙 마돈나
성자(聖子)를 동반하신 복되신 성모님에 대한 표현으로서 첸스토호바의 성모화(聖母圖)보다 더 장구하고도 찬란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표상은 없을 것이다.
이 성모화는 예수님의 성가정에서 사용하던 사이프리스 나무로 만든 탁자의 윗면에 성인 루카가 그린 것이라고 전해진다. 성인의 요청에 의하여 성모님은 의자에 앉으셔서 모델이 되셨다고 전해지는데, 완성된 초상화를 보시고 매우 흡족하시어 "나의 은총이 이것과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초상화의 기적적인 역사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거의 300년 동안 예루살렘의 모처에 숨겨져 있는 동안에도 공경의 대상이었던 이 초상화는 성녀 헬레나가 ‘진짜 십자가(True Cross)’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성녀 헬레나는 이 초상화를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그의 아들이며 로마제국의 첫 번째 신자 황제였던 콘스탄틴 대제에게 바쳤다. 콘스탄틴 대제는 초상화를 안치하기 위한 성당을 건립하였고, 그후 초상화는 5세기 동안 그곳
에 보관되었다. 그 초상화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의 역사하심 이라고 증언하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외적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였는데, 그때마다 초상화가 안치된 성당은 그 도시사람들이 희망을 소원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한번은 외적의 침공을 받아 도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는데, 주민들이 초상화 앞에 모여 기도한 결과 외적의 침략에서 도시를 구해낸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역시 외적의 침공으로 성당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오직 벽 한쪽 귀퉁이만 남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 초상화가 걸려있던 벽이었다. 안료로 사용된 올리브유의 속성으로 이미 어두운 색을 띄고 있던 초상화는 화재로 인한 강렬한 열기와 연기로 인하여 더욱 검을 빛을 띄게 되었다.
나중에 비잔틴 황제가 초상화를 루데니아의 귀족(Ruthenian nobleman)에게 선물하게 되어, 초상화는 키에프(Kiev)로 옮겨져서 벨츠의 궁전(Royal Palace of Belz)에 안치되는데, 그 이후 579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1382년에 타타르인의 침공을 받아 초상화는 화살에 관통되는 훼손을 입게되는데, 그때 목부분에 생긴 상처는 아직도 식별이 가능하다. 초상화의 안전을 염려한 브와디스와프 오플스키 (Ladislaus Opolski) 왕자는 북부 실롱스크 (Silesia) 에 있는 자신의 성들 중의 한곳으로 초상화를 옮겨놓기로 결정한다. 첸스토호바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밝은 언덕’이라는 뜻의 야스나 구라 (Jasna Gora)라고 불리우던 산의 언저리에 이르렀을 때, 초상화를 실은 마차를 끌던 말들이 멈추어 선 채 아무리 어르고 때려도 더 이상 나아가지를 않았다. 이때 성모님께서 브와디스와프 왕자에게 나타나시어 바로 그곳이 당신의 새로운 집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기적의 상(Miraculous Image)’ 즉 초상화는 그곳의 한 성당에 안치되고, 그리스 정교회의 바실리아 수도자들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몇년 후, 브와디스와프 왕자는 그 초상화를 로마가톨릭 성바오로 은둔 수도원 (Latin Rite Hermits of Saint Paul)으로 옮기는데, 그 수도원은 현재도 그곳에 남아있다. 이 ‘기적의 초상화’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기록은 1382년부터 시작된다. 가톨릭 교회의 적들에 의해 자행된 침공으로부터 폴란드를 영웅적으로 방어해 내는 거듭된 과정에서 야스나 구라 수도원은 폴란드 국가주의의 핵심적 요새로 변모하였다.
1655년에 수도원은 막강한 스웨덴 군대의 침공을 물리치고, 1683년에는 터키군대, 그리고 1920년에는 구소련의 볼쉐비키 군대의 침공을 물리치게 된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첸스토호바 (Czestochowa)의 성모님은 폴란드의 여왕 (Queen of Poland)으로 등극하였다. (축일은 3월 3일). 이러한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초상화는 오염과 훼손을 당하게 된다.
1430년에 후스(Huss: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의 추종자들이 수도원을 약탈하여 야스나 구라의 모든 보물들을 마차에 싣고 가려고 하였으나, 초상화가 실린 마차를 끄는 말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후스의 추종자들이 초상화를 마차 밖으로 버리자 비로소 말들이 마차를 끌기 시작하였다. 초상화를 뒤덮고 있던 보석들과 금을 본 약탈자 중의 한사람이 검으로 초상화를 내리쳤는데, 성모님의 오른쪽 얼굴을 두 번 찌르고 세 번째 찌르려하는 순간 그는 넘어져서 죽고 말았다. 이것을 본 다른 약탈자들은 신의 처벌을 두려워하며 달아나 버렸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예술가들에 의해서 여러 차례 상처의 복구가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복구를 시도할 때마다 매번 얼굴의 상처는 다시 드러나곤 하였는데, 이것은 성모님의 성지(聖址 ; Her Shrine)를 오염시키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로서 상처가 그 자리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성모님의 뜻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1909년에 난동자들에 의해 금관과 진주로 장식된 외투 부분이 뜯겨졌는데, 이 신성모독은 새 금관을 제공한 성 비오 10세 교황의 도움으로 보수되었다. 역대 교황들은 성모님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지원과 함께 많은 특전들을 부여하였다. 현재 첸스토호바 성모님의 모사초상화가 카스텔 간돌포 (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의 개인 경당의 제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첸스토호바 (Czestochowa) 의 성모님이 블랙마돈나로 불리우는 이유
블랙 마돈나는 별명이며, 초상화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피부색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우리는 마리아, 예수, 그리고 성 요셉이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분들의 피부색은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피부암이 발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두운 갈색이거나 올리브색이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와 마리아의 초상화에서 흰 피부와 푸른 눈, 그리고 금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모든 성화와 성예술품들은 성가정(Holy Family)과 사도들이 올리브색의 피부, 검거나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첸스토호바 성모님의 초상화는 거의 2000년 가까이 오래 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 루카가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는 열악한 품질의 유화물감이 사용되었다. 유화물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래고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그 초상화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화재를 겪게 된다. 그 초상화가 동방 정교회에 보관되어 있던 동안에는 그 앞에서 수만개의 향로가 지펴지고 있었고, 봉헌물로서 수백만개의 양초들이 타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모 마리아의 성상(Holy Image)을 검어지게 만든 요인들이다.
자료: paxkorea 홈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