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법등사설오스님TV(YouTube) 작성자 : 변함없는 즐거움
그래서 과보가 다 없어져도 습기는 남아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다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점찰윤상을 사용할 때에 또 이야기할 겁니다.
지장보살이 견정신보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래에,
미래에 바로 우리의 말법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부처님 제자들은 삼보님께 귀의를 한 사람들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입니다. 귀의를 하지 않은 사람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아무리 오래 믿었다 하더라도 삼보에 귀의를 안했으면 부처님 제자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귀의를 해야 비로서 불문에 입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미래세에 당래세에 부처님 제자가 이 선악의 과보를 점찰해서 상응하면 바로 여러분이 점찰을 했을 때에 경전에서 말씀하신 여러분들의 모든 사상과 여러분의 행위가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응이라고 합니다.
전생에 살생의 업이 매우 중한 사람은, 금생에 비록 그 업보를 받았다 하더라도 혹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해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상응이라고 합니다. 전생에 선업이 매우 중한 사람으로 전혀 살생을 하지 않은 사람은 금생에 전혀 병고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오욕(五慾)을 갖추고 뜻대로 되는 사람은 바로 오욕의 경계가 다 만족하게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방일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만족했으면 더 이상 그 외에 더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이것은 내가 과거에 지은 선업으로 금생에 이러한 과보를 얻는 것이다. 내가 만약 이 기초위에 다시 더욱더 정진을 한다면, 더욱 정진한다는 것은 바로 용맹정진하는 것이고, 최대한 선업을 짓고 악업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면(勸勉:남을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어떤 일에 힘쓰게 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장보살께서 권하는 것입니다. 현재 상태에 멈춰있지 말고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욱더 노력하고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좋게 하고, 더욱더 좋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현생에 여러 가지가 뜻대로 되지 않고 갖은 액운을 만난다면, 항상 상서롭지 못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서는 두렵고 근심하고 뜻과 같이 안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면대(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함)할 것인가 하면 달게 받아내고 참아내야 합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는 짓지 말고 지금 받아서 업을 녹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달게 받아내고 참아내야 합니다. 의심하고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사부대중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은 과거에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과 다른 사람을 손해 끼치는 일들을 했고, 바로 과거 생에 일인데... 다른 사람에게 고통만 주고 다른 사람을 환희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금생에 받는 업보는 행복과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마땅히 참고 받아내야 합니다. 뜻대로 안되는 일들을 참고 받아내야 합니다. 빚을 갚는 마음으로 기쁘게 갚아야 합니다. 안그러면 이자까지 더해서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을 때에,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 쓰고 이자를 안주면 되겠습니까?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에게 목숨 빚을 갚아야 합니다. 안됩니다. 죽인지가 몇 년이나 지났고 몇 겁이나 지났습니다. 거기에 이자가 더 붙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자까지 더 갚아야 합니다. 이것을 살생의 업 가운데 나머지 과보(餘保,여보)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누군가를 봤을 때 보자마자 그가 바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전혀 좋은 인연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머지 과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과 은혜도, 원한도 없고 전혀 아무 일도 없는데 길을 가다가 그냥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지나갑니다. 전혀 마음에 영향도 감응도 없습니다. 그 사람과 연이 없어서 전혀 아무 인연이 없는데, 여러분이 그 사람을 보자마자 마음이 기쁘면 조금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번뇌가 일어나면 그것도 좀 관계가 있는 겁니다. 아무 까닭없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 까닭없이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모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악업으로 인해서 금생에 항상 병고에 시달립니다. 많은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까닭없이 근심이 생기고 까닭없이 번뇌가 생깁니다.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다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게 짜증이 납니다. 그렇지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여러분들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본인은 항상 번뇌로움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 그만하면 모든 것이 좋아보이는데 본인은 만사가 뜻대로 안된다고 느낍니다. 모든 법우들이 다 그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출가한 스님들이 무슨 번뇌가 있고 무슨 부담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인이 까닭없이 번뇌를 일으킵니다. 만사가 뜻대로 안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과거생에 숙세의 업이 발현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숙세의 업이 발현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생에 업이, 숙세의 업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는 겁니다.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점찰경전을 배우고 알아진 겁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참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내심이 있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숙세의 업이 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수행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참회 절을 해야만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업을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진정한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도중에 해태심을 내지 않습니다. 또한 방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견사혹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번뇌 무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미혹한 업(業)이 아직 매우 중합니다. 정진을 해서 선업이 여러가지로 증장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점찰윤상을 쓰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요구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점찰윤상이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어떤 어떤 업이 드러나고 있다고, 빨리 그 업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왜 까닭없이 번뇌가 일어나고 또 까닭없이 춤이 덩실덩실 괜히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좋은지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괜히 마냥 즐겁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오늘 예불을 하고 염불한 것이 상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대중과 함께 수행을 했다든지 혹은 오늘 무슨 좋은 일을 했다든지 그러나 이 점찰 윤상을 쓰게 되면 점찰윤상이 알려줍니다.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점찰이라고 하는 겁니다.
선남자여 만약 과거에 지은 업의 오래되고 가까운 내용을 점찰하고자 하면 지은 업의 강약과 대소의 차별을
내가 과거에 도대체 어떤 업을 지었길래 현재에 이러한 업보를 받게 되었는지? 우리 불교에 입문한 사부대중들은 출가한 2부승과 재가 2중의 부처님 제자들은, 만약 과거에 선연의 업이 없었다면 선인을 짓지 않았다면 금생에 삼보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사 만났더라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연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선업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작은지 오래된 것인지 최근에 지은 것인지, 선업의 힘이 강한지 약한지, 자신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비록 삼보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삼보님 안에서 수행을 조금 하고 있기는 하지만, 크지 않고 용맹하지도 않고 그 힘이 매우 미약합니다. 그러면 점찰을 하면 점찰 윤상이 알려줍니다. 과거에 실은 선업의 인이 크지 않다고 말해줍니다. 금생에 빨리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생에 선업의 인이 사라져 버립니다. 선업이 증장되고 악업이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선업이 커짐으로 해서 악업이 작아집니다. 선업이 강해지면 악업은 곧 약해집니다. 이것이 점찰윤상을 쓰는 주요한 이유입니다.
바로 이 중간 정도로 악업이 있기는 하지만 큰 악은 없고 선업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큰 선은 없습니다. 더욱더 강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지장보살님께서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점찰 윤상의 시작입니다. 다시 세 개 윤상을, 나무를 깎아서 만듭니다. 나무를 깎아서 세 개 윤상을 만들어서 이 세 개의 윤상을 가지고, 하나는 구업을 주로 하고, 한 개는 의업을 주로 하고, 하나는 신업을 주로 합니다. 바로 신구의 3업을 한 개의 윤상으로 합니다. 글씨로 써서 새겨 넣습니다. 신업이 한 개의 윤상이고 구업이 한 개의 윤상이고, 의업이 한 개의 윤상입니다. 각각 한 개의 윤상이 주가 됩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가 쌓은 업을 점찰합니다. 우리의 현재 업보는 한 생 두 생에 지은 것이 아닙니다. 열 생, 여덟 생에 지은 것이 아닙니다. 천백 만억 생에 지은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몸에 쌓여 있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압니까? 몸에 쌓인 선업이 큰지 혹은 별로 크지 않은지, 혹은 몸에 쌓인 악업이 큰지 혹은 별로 크지 않은지, 혹은 몸에 구족한 악업이 크면 그럼 선업은 작습니다. 선업이 크면 그럼 악업은 작습니다. 두 가지가 모두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중간인 경우도 있습니다.
선은 한 겁, 두 겁에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만 년 동안 모두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선업이 매우 맹렬한 것입니다. 그래서 금생에 만나는 인연이 다 선연이고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불문에 들어와서도 항상 용맹정진하고 게으르지 않아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얻어서 지혜가 열립니다. 이것을 큰선(大善)이라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gF_kVqLpY0&list=PL5MPltq86t10Hv7-_IggRNjTlFkp0uH8o&index=26 설오스님 한국어 통역 https://www.youtube.com/watch?v=hWyfLYlLA50&list=PL5MPltq86t11mMX67mzXILujzccPO6sKj&index=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