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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소통에서
오민석 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문학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은 결핍이고, 수준 이하이며, 아직 멀었고, 형편없는 것들이다. 문학은 최상의 순간에 그것에서 빠져나와 더 나은 것을 꿈꾼다. 정신의 이 무정부주의야말로 문학을 영원한 전위부대로 만든다.(p5)
누가 글을 쓰는가. 매혹의 개 같은 고통을 견디는 자들이 글을 쓴다. 블랑쇼의 책 제목대로 글쓰기는 오로지 “도래할 책”을 쓴다. 저기 책이 오고 있다. 옛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p15)
문학은 묻지 말라는 것을 묻는 언어이고, “밥상을 엎은 다음의 질문”(권혁웅, 「가정요리대백과-밥상」)이다. 다만, 문학은 이 모든 질문을, 철학도, 저치도 아닌 문학으로 수행한다.(p28)
먼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이 한 일은 시를 죽이는 일이었다. 시인들은 시를 죽이고 시를 만든다. 그러므로 시의 역사는 시의 다양한 種들의 죽음이고, 새로운 종들의 탄생의 역사이다.(p39)
문학은 세계를 원료로 새로운 세계를 생산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생산의 위대성 여부는 ‘새로움’의 유무에 있다.(p63)
개체가 자신의 ‘바깥’을 사유하지 않을 때, 즉 주관성의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을 때, 세계와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으며 진정한 글쓰기는 ‘도래’하지 않는다.(p65)
처음부터 끝까지, 문학은 기술이고 표현이다. 언어는 너무나도 솔직해서 빈약한 사유를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그러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은 정신이 아니며, 서투른 언어는 그 자체 서툰 생각이고 서툰 감성이다.(p75)
문학과 비평은 해답보다는 질문의 생산지이며, 결정보다는 비종결을 지향하고,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더 큰 재난을 예방한다.(p83)
이 궁핍한 시대에 자판을 두드리는 이 약하고 약한 작업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그러나 보라. “오직 책만이 폭발한다.”(p86)
#미래의 불안, 그리고 유토피아의 언어(26p-35p중 발췌)
문학의 안테나는 존재의 결핍, 균열, 공허, 무의미, 불안을 향해 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온전한 외피가 감추고 있는 가난, 파멸, 울음,절규, 한숨을 민감하게 잡아낸다. 그러므로 문학은 '완전성'에 대한 의심이고 질문이다. 문학은 도취적 행복euphoria의 탁자아래에서 고통스레 떨고 있는 개에 주목한다. 불안과 결핍, 비루먹은 존재는 문학의 오랜 원료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을 삐딱한 트러블 메이커로 볼 필요는 없다. 대문자 신God을 제외하고 온전한 존재는 없으므로, 블랑쇼M.Blanchot의 말대로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여"이므로, 문학이 존재에 대하여 던지는 이런 질문들은 정당하다. 문학은 가짜 행복과 거짓만족과 대문자 진리를 조롱하며,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선물한다. 문학이 조장하는 불안은 재난의 미래에 대한 예고이고 경고이다.
불행했던 행운에 대하여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너 잘난 세계의 개진아
대지의 은폐야
나는 운다
엉엉엉-------
거짓말이 하기 싫어서 나는 운단 말이다. 이 식민지의 것들아!
- 박남철, 「하이데거의 릴케論」아!」 부분
문학은 "잘난 세계"가 "은폐"하고 있는 "불행"에 대하여 말한다. 문학은 그것에 대하여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문학은 잘난 세계가 감추고 있는 악과 재앙과 스올Sheol 의 미래를 까발린다. 잘난 세계의 파사드facade에 열광하는 자들이야말로 “식민지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언어는 아무리 위악처럼 보일지라도 "거짓말"이 아니다. 문학은 "거짓말이
하기 싫어서" 우는 언어이다.
루카치G. Lukacs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에서 "불안에 짓눌린angst-ridden 세계관"으로 "객관적 현실"을 대체했다고 카프카F. Kafka를 비판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의 존재가 불안에 시달린다면, 그것도 '객관적현실'이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문제없음'의 하늘을 스치는 '문제있음'의 바람을 느낀다. 그 느낌을 '불안'이라고 하자. 불안은 심리의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밀도로 체감된다. 문학은 불안을 명시화하고, 그것에 짓눌리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언어이다. 바람을 느끼지 않고 바람을 넘어설 수는 없다. 결여의 수많은 징후를 모른 척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말'이다.
아이더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제발 묻지 마세요
그건 밥상을 엎은 다음의 질문입니다.
-권혁웅, 「가정요리대백과 밥상」 부분
문학은 묻지 말라는 것을 묻는 언어이고, "밥상을 엎은 다음의 질문"이다. 다만, 문학은 이 모든 질문을, 철학도, 정치도 아닌 문학으로 수행한다. 문학이 하는 철학과 정치는, 그 자체 철학과 정치가 아니라 문학의 철학이고 문학의 정치이다. 여기에 문학의 고유한 약호 code가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문학의 정치'가 "문학이 (다름 아닌) 문학으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괄호는 필자의 것)이라는 랑시에르J. Rancière 의 정의는 옳다. '문학의 정치'를 이렇게 정의할 때, 랑시에르는 "작가가 정치적 참여를 해야 하는가' 혹은 '예술의 순수성에 전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순수성 자체도 사실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상표인 좌절, 절망, 불안 등은 상당부분 자본(주의)의 선물이다. 자본주의는 개발과 생산수단의 끝없는 변혁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노예제와 봉건제는 자본주의로 가는 기관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자본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영민하게 포착해냈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인 불안과 격변이 부르주아 시대를 이전의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시켜준다. 굳고 녹슨 모든 관계는 오랫동안 신성시되어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
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는 모든 생산과 생산품의 과거를 부인하고, 자연을 끊임없이 개발 혹은 착취하지 않고서는 존속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유용성을 끊임없이 과거화시키며 새로운 교환가치를 생성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은 새로운 상품의 개발을 통해 파멸의 순간을 계속 연장하며 "항구적인 불안' 속에서 존재한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끌어들였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이제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운동법칙으로 전 지구를 갈고 다닌다. 이제 그 누구도 자본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데이비드 하비D. Harvey는 자본가를 마술의 주문으로 불러낸 지옥 같은 세계를 더이상 통제할 힘이 없는 마술사"에 비교한다. 자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현실 사회주의는 70여 년의 실험 끝에 무너져버렸다. 그러고도 30여 년이 지났다. 혁명은 먼 추억이 되었다. 이제 세계의 주인은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니고 자본이다.
지친 한밤의 100원짜리 삼립빵,
가난한 목수 아들의 삶에서 뜯은 빵이여
잔업이 잔업을 낳고
靈魂에 찰싹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利이라는 이름의 거머리.
이 피는 포도주가 아니다.
사제 목에 걸린 철십자가에 못박힌 노동자,
나의 安樂이 너를 못박았다.
이 짐승들아,
가슴을 친다고 그게 뽑혀지느냐.
- 황지우, 「102.」 전문
혁명도, 자기반성 ("나의 꽃이 너를 못박았다.")도 자본의 기관차를 막지 못했다. 자본은 주체들과 관계들을 "짐승들"로 만든다. 문제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다고 그게 뽑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와 자본가를 끌고 환호하는 소비자들을 횡단한다. 자본가도 이제 더이상 자본의 주인이 아니다. 자본이 자본가들을 질질 끌고 간다. 소비자들은 자본의 노예를 자청하며 소비 능력을 상실할까 전전긍긍한다.
이제 불안은 소비 불능의 가계와 제어 불능의 괴물에게서 온다.
(중략)
자본의 길이 멸망의 길인 것은, 그것의 속성이 끝없는 파괴이기 때문이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심지어 자본가까지도 그 파괴의 고삐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괴물의 등에 올라타 성과주의를 외치며 돌진하지만, 그것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본의 발전기계가 어느 단계에 가서 멈춘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자본이 자신의 모순에 의해 자신에게 치명적인 칼날을 들이댈 때일 것이다. 자본의 타자는 이제 자본밖에 없다. 자본은 지구상에서 국가와 민족, 인종과 성별의 경계를 모두 뛰어넘은 최초의 경제적·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내 자본', '네 자본'은 이제 없다. 다국적 자본은 여러 국적을 가진 자본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 자신의 정체성으로 모든 국적의 경계를 마구 넘어 다니는 자본이다. 자본은 모든 생물의 서식지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물 개체의 몸에 파고 들어가 그 안을 "허연 폐수"와 "비닐끈들로 채운다. 몸의 정치학 body politics 이라는 푸코M Foucault의 개념은 그러므로 허사가 아니다. 자본은 그것을 만들고 그것을 통제불가능한 괴물로 키운 사람들의 '몸'을 가난과 질병으로 공격한다.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어떻게 이 안 보이는 적과 싸울 것인가,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 거대한 괴물이 일으키는 불안의 풍랑을 감지해왔고, 그것을 '문학의 기술'로 표현해왔다. 문학은 개념적 진술이 아니므로 멸망이 아니라 멸망의 징후들을 건드린다. 문학은 로고스Logos의 언어가 아니라 예감의 언어이다. 문학은 중세와 징후를 건드림으로써 도래할 파국을 예고한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폭풍의 냄새를 '미리' 맡는다. 문학이 울 때, 세계는 이미 병들어 있다. 문학은 개념적 진단보다 먼저 몸의 아픔을 감지한다.
개념적 진술은 세계의 잠재성을 잡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의 부분이나 순간을 핀셋으로 고정시켜놓고 진단한다. 세계는 움직이는 잠재성이며 로고스의 분석을 끊임없이 피해 나간다. 가령, 아감벤G. Agamben 은 예술가를 "내용 없는 인간man without content 이라 부른다. 이는 예술가가 그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술
가는 당연히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변하기때문에 예술가는 내용을 끊임없이 박탈당한다. 아감벤이 잠재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잠재성은 '무엇이 될 잠재성 thepotentiality to be'과 '무엇이 되지 않을 잠재성the potentiality to not be'으로 나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았을 때, 후자는 일종의 무능impotence으로 읽힌다. 그러나 아감벤이 볼 때, 이것은 존재의 상태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순수한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현실성 actuality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문학과 예술은 현실뿐만 아니라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재앙(잠재성)의 냄새를 맡는다.
https://naver.me/5yqUT7b2
한 권의 도서를 구입하는 이유와 가치("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 오민석 평론집/시인동네)
이충재(시인, 문학평론가)
주로 <이제,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pp.39- )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블랑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문학은 그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사라짐이라는 본질로 향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시는 어디로 가는가?' 시도 그 자신을 향해 간다. 시도 "사라짐이라는 본질로 간다. 따지고 보면 문학의 역사는 문학의 사라짐의 역사이다. 먼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이 한 일은 시를 죽이는 일이었다. 시인들은 시를 죽이고 시를 만든다. 그러므로 시의 역사는 시의 다양한 종들의 죽음의 역사이고, 새로운 종들의 탄생의 역사이다. 모든 시들은 이렇게 죽음 - 탄생으로 이루어진 진화의 장구한 역사 위에 있다.
<시의 난해성 혹은 소통의 문제>(pp.52- ) -"문학이 난해해졌다는 것은 그 반영과 굴절의 대상인 세계가 그만큼 복잡하고 난해해졌다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20세기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세계는 이해(설명) 불가능한 혹은(리얼리즘적 의미에서) 재현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모더니스트에게 글쓰기란 재현 혹은 굴절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거나 굴절시켜야 하는 형용모순의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모더니스트드에게는 20세기는 '악몽'의 세계였다. 그들은 변화한 세계를 담을 새로운 형식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어떤 형식에 의해서도 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의 개발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물이 모더니즘을 특징짓는 '실험적' 형식들이다. 그들의 실험적 형식들은 어찌 보면 파편화된 현실에 대한 파편적 재현이었다. 양차 세계대전과 총체적 재현의 불가능이 모더니즘의 세계관을 좌절과 절망과 고뇌로 가득 채웠다. 페시미즘은 모더니스트들의 브랜드 네임이 되었다. 외적 현실이 불가해한 대상으로 디가오자 그들은 시선을 인간의 내면세계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모더니즘 문학은 루가치가 '현실의 희석화"라 비판한 대로 외적 현실로부터 상당 부분 등을 돌렸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게 한다. 그렇다면 현실성의 충분한 반영으로 인한 인간성 타락이나 그 회복은 전제 하지 않는 실제만을 다루거나 회피성 혹은 모순의 발상만을 나열하는 계기를 낳게 되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동시에 오늘날의 난해성에 가까운 시들을 쓰는 사람들이 이 난해성의 의미를 얼마만큼 이해, 해독가능한가의 그 의도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유행병처럼 무작정 모방만 한다면 그 작품에서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적인 태도변화도 감지되어야만 그 작품의 가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p.86) -난로가 점점 따뜻해지고, 잠을 깨는 숲 위로 태양이 빛난다. 마당의 목련은 얼음 속에서도 탱글탱글 꽃 폭탄을 키우고 있다. 이 궁핍한 시대에 자판을 두드리는 이 약하고 약한 작업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그러나 보라 "오직 책만이 폭발한다."(말라르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