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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보며
20240707 / 마 8:5-13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감동하신 백부장의 믿음을 주목해 보면서 우리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기를 소원한다.
1. 감동적인 인생을 살아간 백부장
본문을 통해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감동적인 인물을 한 사람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전도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한 백부장이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고하며 고쳐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백부장이 ‘주님! 저의 집은 너무 누추해서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어찌 수고스럽게 저의 집까지 오시겠습니까? 그냥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저도 군인이기 때문에 제 윗사람이 저더라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섭니다. 그리고 제 부하들도 제 명령에 살고 죽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될 줄로 저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기이하게 여기셨다.’라고 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깜짝 놀랐다는 말이요. 감동하셨다.’라는 말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믿음의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이런 놀라운 감동해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이런 말은 선지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핍박도 무릅쓰고 따르는 자들에게 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듣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모욕이지만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에게는 놀랄만한 칭찬이었다.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백부장의 믿음은 관념적(觀念的)인 믿음이 아닌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한 것처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믿음’이었다(갈 5:13).
백부장이 바울이 한 말씀을 알았을 리가 없으나, 백부장이 하는 행동을 보면 이런 말씀들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백부장의 이러한 믿음을 예로 들어 사랑을 강조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여도 괜찮을 정도이다.
백부장은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에는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백부장을 위해서 대신 간구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대부분 유대인은 정복자들인 로마인들을 증오했다. 열심당원이라고 불리는 유대의 독립투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로마 군인들을 살해했다. 그런데 유대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은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것은 백부장이 먼저 유대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유대인들이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배우기도 하고, 기도도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게 회당이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회당에서 각종 회의도 하고, 결혼식도 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마을 회관 또는 교회당이라고 할 수도 있다. 회당은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또 지켜나가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집회소이다.
식민 통치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식민지 백성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준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마치 일본강점기에 일본군 헌병 대장이 민족혼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일을 하는 학교나 교회당을 지어주었다는 말과 같다.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회당을 지어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백부장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로마 당국이 이 사실을 안다면 과연 잘했다고 할까? 문책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이다. 또 회당을 지어주려면 많은 물질이 들어간다. 백부장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본능을 초월해서 식민지 백성들을 사랑했다. 그런 백부장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유대인들을 감동시켰다.
또한, 백부장은 하인을 감동시켰음에 틀림이 없다. 하인은 노예로 당시에 노예는 사람은 사람인데,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다. 백부장의 집에 하인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비록 하인이지만, 그를 존엄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대했고, 약한 자를 향한 연민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고 예수님을 찾았다. 고침을 받은 하인이 평생토록 감동하였을 것이다. 하인은 진심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했을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그의 섬김을 받는 자를 감동하게 한다. 그리고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도 감동하게 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자기 자신의 삶에 감동을 불러오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
■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순회할 때에 있었던 일이다. 한 여인이 자기는 온갖 상담을 다 받았지만 도움이 안 되었고 ‘이제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테레사 수녀에게 말했다. 테레사 수녀는 그녀에게 제안하기를 ‘기왕에 죽을 결심을 하셨다면 자살을 연기하고 내가 일하는 인도에 와서 나를 한 달만 도와주고 그 다음에 죽으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그대로 했다. 한 달 후에 테레사가 이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테레사 수녀가 웃으며 물었다. ‘언제 돌아가시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죽다니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요. 전에 나만을 생각하던 시절 나는 나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웃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시면 나보다 더 고통받고 나 보다 더 외로워하는 이웃들을 섬기자.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조그만 일이라도 행동으로 실천해 보자. 나 자신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인생의 행복과 보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을 초월하여 고통받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길 때 주어진다. 우리 모두 마음이 백부장의 마음 같아지고, 백부장처럼 자신을 초월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갖게 되기를 소원한다.
3.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8절 /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백부장의 말은 ‘욱 히카누스’라는 말로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한 마디로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는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 참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에 관한 사상이나 이론을 습득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하였다. 예수님을 이땅에 오신 메시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은 복 중의 복이요, 은혜중의 은혜이다.
마 16:13-19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에 가서 하인을 고쳐주겠다고 하자 백부장이 보인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백부장의 말에서 우리는 참으로 좋은 믿음, 최고로 성숙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알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항상 기적을 경험하는 믿음이 좋은 믿음인 줄로 한다. 뭔가 남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면, 그것을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가진 증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구하는 자들을 칭찬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기적을 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말씀만 나온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믿음은 요한복음 2장에서 물을 돌항아리에 붓고 포도주를 떠 온 하인들의 믿음이었다. 어떤 증거도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데 일조했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몰라도 그들이 한 일은 대단한 것으로 찬송가 545장을 기억하게 만든다.
➊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후렴>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➋ 이 눈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 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
➌ 주님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 참고로 어떻게 백부장은 이렇게 말씀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에 이르게 되었을까? 본문을 잘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부장의 믿음은 생각하고 추론(推論)할 줄 아는 데서 온 것이다.
산상보훈 말씀에서 예수님은 항상 근심과 걱정에 매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들에 피는 백합화를 생각해 보고, 공중에 나는 새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깨달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먹이고 입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들꽃도 입히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을 먹이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먹이고 입혀주실 게 아니냐?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깊이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적은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믿음도 생기고 믿음이 커지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백부장은 나름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군대의 장교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 추론을 해냈다. 권세라는 게 무엇인가?
■ 교통경찰을 예로 들어본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인 힘이나 지혜로 차를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교통경찰에게는 도로와 차량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국가로부터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의 손짓 하나, 호루라기 한 번에 수많은 차량들이 질서있게 움직인다.
백부장은 자신이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가이사 황제가 부여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권세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추론해 내었다. 자신은 백부장으로서 백 명의 부하들에게 권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부하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자신도 윗사람의 권세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런 추론에 의해서 더욱 깊이 깨달은 것이다.
백부장은 이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깨달았고, 권세는 말씀(명령)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권세 있는 사람은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명령한다. 그러면 그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 명령대로 움직여서 일을 이루어낸다. 그것이 권세이다. 백부장은 그것을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백부장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분이 명령하시면 그대로 되는 줄로 알고 믿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권세가 모든 질병을 향해서 명령하면 질병이 떠나가고, 귀신을 명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자를 향하여 명하면 죽음이 물러가는 것을 기록하였다. 바다와 바람도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 기사에 대해서 보고 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줄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절대적인 복종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백부장과 같은 칭찬 받는 큰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평상시에 백부장처럼 생각할 줄도 알고 추론할 줄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경건의 훈련으로 믿음은 자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참된 지식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한 말씀(마 17:14-21) /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간청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5-16)라고. 그리고 그를 데려왔을 때, 주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18).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께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라고.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20a). 그러고 나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20b)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일까? ‘겨자씨 한 알’은 비록 작을지라도 살아있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땅에 심기어질 때 큰 나무로 자라나고 열매를 맺게 된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겨자씨’의 생명력을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또한, 예수님께서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20)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비유의 의미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문제를 극복’하거나 ‘가장 힘든 장애물을 제거함’을 말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왜 우리는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한 알의 겨자씨의 믿음(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열쇠가 된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은 믿음’과 ‘한 알의 겨자씨 믿음’의 차이를 본다.
적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곧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의심하지만, 겨자씨의 믿음은 기도로 인내하며 약속을 기다리게 한다. 적은 믿음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지만, 겨자씨의 믿음은 인생의 먹구름과 고난의 안개를 뚫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향해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느냐?’고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는지? 사람의 경험과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제한당하고, 그 역사가 많이 사라진 이때 제자들과 같은 심정으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구하여 이 땅에 다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의의 일꾼이 되기를 소원한다.
말씀을 맺는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조차 아직 이러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소유한 것은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백부장의 믿음을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없었던 훌륭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 마침내 백부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강건하여져 있었다. 마태는 백부장의 종이 단순히 ‘나으니라’라고 기록하였으나 누가는 ‘그가 나을 뿐만 아니라 강건해졌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적의 완전함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믿는 대로 역사하신다.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자. 우리 안에 잘못된 고정관념의 못을 빼자. 고정관념은 고장난 관념이다. 믿음이 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낮은 자존감, 열등감, 불신앙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은 백부장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신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신다. 죽은 자도 살리신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라고 하신 말씀 앞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만선의 기쁨을 경험하며 평생토록 예수님을 따르게 한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남은 삶을 믿음으로 사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믿음의 그물을 던지자.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우실 것이다. 모든 일을 아름답게 해결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서 벗어나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험한 세상을 사는 우리로서는 백부장의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좋은 군사(의의 군사)로 거듭나는 비결이다.
본문 말씀을 기억하며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은>,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찬양을 부르며 설교를 마치려 한다.
♬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 군병이 되려는 우리를 인도하시며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기 소원하신다.
♬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길 원합니다 /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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