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신검(飛流神劍) 제3권
- 차 례 -
1. 사면에서 부는 바람 2. 흑백사의 출현 3. 열세 명의 백의인 4. 무상지음부골공 5. 적귀노파 청백구 6. 구사일생 7. 모녀 상봉 8. 친구가 아니면 적 9. 지고무상의 기초 10. 열두 음탕마녀 11. 통쾌한 죽음 12. 미혼이향 13. 회심정실의 고인 14. 복면 노파의 비밀 15. 도장맹의 맹주
1. 사면에서 부는 바람
선우철은 비류신이 말끝을 못 맺는 것을 보자 자신도 다소 목이 메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비형, 의리가 하늘과 같고 아량이 바다와 같이 넓으며, 공명정대한 비형을 하늘이 알고 있으니 쉽게 목숨이 끊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오.” 비류신은 다시 쓸쓸히 웃음을 지었다. “하늘에 눈이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이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이오.” 이때 청색혈마가 다가오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냉랭하게 비류신에게 말했다. “선우철은 악독한 심정으로 당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을 텐데. 그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말을 하시는 건가요?” 선우철은 그녀의 말에 얼굴빛이 일변하며 급히 말했다. “여협, 말을 할 때 남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소? 나는 진정으로 비형을 옛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소.” 청색혈마의 표정에 금세 경멸하는 기색이 돌았다. “흥! 선우철, 당신은 고분에서… …” 그녀의 말을 비류신이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가로챘다. “당신이 나에게 베푼 은혜는 후일 반드시 보답하겠소이다. 그러나 선우철과 나의 우정에 금이 가게 하지 마십시오. 내 말이 무례하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청색혈마는 선우철에게 사나운 눈빛을 쏘며 다시 말하려 했다. 그러나 비류신에게 저지당하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류신, 당신은 강호에서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어서 인간이 얼마나 간악한지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강호의 음흉하고 간악스런… …” 이때 다시 비류신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머지 많아 이승과 작별을 할 것이며,세상의 모든 영욕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하시는 말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비류신은 선우철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한 다음 발길을 돌려 떠나갔다. 비류신이 홀연히 떠나고 나서 얼마 후 장중에는 색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돌연 남의소녀가 여러 사람을 향해 외쳤다. “중원 무림의 군호 여러분, 자신의 지력이 어떤지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군호들은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무슨 뜻인지 모르고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익공관주 순천진인이 입가에 냉소를 머금으며 남의소녀에게 말했다. “그건 어째서 묻는 거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지력이 초인적이오.” 남의소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또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요?” 익공관주 순천진인이 음침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건 당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물어볼 필요가 어디에 있소?” 남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둘러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지요. 내가 물을 필요 없이 모두들 죽으려고 모인 것이겠죠.” 그녀의 말에 장중의 군호들이 노한 기색을 띠었다. 순천진인 역시 얼굴에 노여운 빛을 보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흑룡강 일파는 사면초가의 형세에 놓였소. 아무리 하늘과 통하는 재주가 있다 해도 이 죽음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할 거요.” 남의소녀는 그의 말을 듣자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어째서 저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백미에게 말했다. “백미 언니, 저 사람들 보고 모두 나를 따르라고 일러요. 어디 죽나 안 죽나 봅시다.” 백미는 남의소녀의 말을 듣자 곧 여러 사람들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소저는 한마디 말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네들이 정히 믿기 어려우면 모두 따라오세요. 그리고 당신네들 자신의 생사에 대해 밝혀 보세요.” 남의소녀는 백미의 말이 끝나자 백발노인을 향해 말했다. “둘째 사형, 이젠 그만 싸우고 우리 떠납시다.” “거기 모두 남아 있어!” 남의소녀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백발노인이 아닌 청색혈마였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남의소녀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 사람을 위해 복수를 하려는 거요?” “비류신이 중상을 입었으니 대가로 목숨을 빼앗자는 거요!” 청색혈마의 앙칼진 말소리에도 남의소녀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응답했다. “당신의 설욕하려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시오.” 청색혈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소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남의소녀는 다시 풍운류랑인 고화룡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만약 조요장문(照曜掌門)의 증거물과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거든 학철두의 말대로 하십시오.” 풍운류랑인 고화룡은 비통스러운 표정으로 탄식하고 나서 말했다. “고화룡은 죽을지언정 그런 사악한 일을 도울 수 없소.” 남의소녀가 차갑게 웃었다. “호호호, 우리는 항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니까 물론 당신을 죽이지 않겠지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고화룡이 받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자만 살인자는 아니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살인자야말로 가장 악독하고 흉악한 인간이오.” 남의소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잔소리 그만두고 우리를 따라 오려거든 따라오고 싫거든 그만 두시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풍운류랑인 고화룡은 쓸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런 대꾸하지 않았다. 장중의 여러 사람들은 도대체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용을 알 수 없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고화룡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사람이 생사영욕을 도외시할 때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내가 그러한 마음을 먹었을 때 누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남의소녀가 그의 말을 받아 결연하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죽기로 결정을 내렸군요. 그러나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당신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 없소. 물론 사람이 죽는 방법은 천만 가지가 있겠지만 평안히 죽느냐, 고통스럽게 죽느냐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소.죽고 난 뒤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풍운류랑인 고화룡이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을 때 신독괴살수가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당신네들은 지금 무슨 수작을 하고 있는 거요? 어서 우리들을 데리고 생사의 신비나 보여 주시오!” 남의소녀는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미와 함께 다른 뜰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화룡이 돌연 청색혈마 곁으로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여협은 비류신과 어떤 관계인가요?” “어째 그러시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청색혈마가 쌀쌀하게 되묻는 말에 고화룡이 급히 응답했다. “비류신의 생사와 관계있는 얘기를 당신에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청색혈마의 얼굴에 긴장된 빛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하시오.” “여협께서 솔직히 말해 주시오. 당신은 비류신의 생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풍운류랑인 고화룡이 이렇게 묻는 바람에 청색혈마는 처량한 얼굴로 한숨을 쉬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생명은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하지요!” 풍운류랑인 고화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그의 생사는 그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온 무림의 운명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 청색혈마는 그의 말을 듣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비류신의 생사가 그처럼 영향력이 클 줄 몰랐던 탓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좀 자세하게 해 주시오.” 청색혈마가 다그치자 풍운류랑인 고화룡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말을 하자면 깁니다. 다만 나는 당신이 비류신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소이다. 모든 것은 훗날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당장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무림 사람들의 마음을 미치게 하는 잔금섭혼신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요.” “네? 뭐요? 잔금섭혼신편이요?” 청색혈마가 놀라는 것을 보며 고화룡이 말을 이었다. “본래 제가 비류신의 일생을 보호하려 했으나, 난 머지않아 세상을 뜨게 되므로 이 일을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천하의 창생을 위해서 힘을 써주기 바라오.” 청색혈마의 안색이 달라지며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비류신과 나의 관계는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요. 일을 지체할 수 없으니 나는 먼저 가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고화룡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탄식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비류신의 상세를 보고 몹시 슬퍼하는 것을 보니 필시 그들 사이는 보통 관계가 아닌 모양이야.” 그는 멀어져가는 청색혈마를 바라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쳐들고 입을 다물었다. 이미 죽음에 다가선 몸인데 이런 생각을 더 이상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홀로 길을 떠난 비류신은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참아가며 계속 경공을 전개하여 번개같이 황야를 달렸다. 그러나 통증은 갈수록 더했다. 참고 참으며 경공을 전개하였던 탓에 끝내 한 걸음도 갈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몸을 이끌고 수십 걸음을 걸어 나갔다. 마침내 비류신은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흔들리는 초목들이 쏴아 쏴아 하는 소리를 냈다. 비류신은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황량하고 음침한 묘지였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무덤이 있었고, 낡은 묘비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비류신은 문득 지령보 부근을 생각했다. 그곳은 모두가 묘지인 것처럼 느껴졌으며, 자신도 지금 그 묘지 안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결국 사람이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로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허무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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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