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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드러난 단서(端緖) [1] 유청풍과 엄희채가 탄 배는 황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정체를 드러내고도 태연히 비등원에 머무는 이유가 뭘까?" 엄희채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그녀는 등인탁이 꾸민 계략에 당한 생각을 하며 치를 떨었다. 수십 년 간 자행해 온 인신매매업, 화절 납치사건, 천락무예단 인 수자금 대출건, 제약소 사건 등... 실로 그가 무림에 끼친 해악은 헤 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모두 남을 이용하여 음모를 획책하면서 서로 싸우도록 만든 것이었 다. 엄희채는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강물로 던지려고 했다. 노를 젓던 유청풍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그게 뭐지?" "채권서류야. 비등원주의 농간으로 인수자금을 빌린 거야. 내가 살 수를 그만 두기 바라는 엄마의 심리를 그 자가 교묘히 이용한 셈이지 ......." 그녀는 천락무예단을 인수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출에 관련된 서류는 상당히 많았다. 등인탁이 서명한 보증서류, 무연사태의 명의로 된 대출확인서류, 전장에서 발행한 약관, 그리고 천락무예단을 담보로 잡은 서류 등 여 러 가지였다. 서류를 들춰보던 유청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장패? 여자 이름인데......?" 명판(名板)으로 찍은 이름, 장패란 이름은 위강이 말한 이름과 동 일했다. 하지만 유청풍은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설령 돈을 빌린 장본인이 장패란 점주와 마주쳐도 알아 볼 수가 없 을 것이다. 모든 업무는 점포에서 고용한 점원들이 처리하기 때문이 었다. 그는 엄희채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차후 언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서류를 간직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런 근거를 남기지 않은 채 구두로 천락무예단의 운영권을 양도 할 경우 등인탁이 구실을 잡을 소지가 많았다. 엄희채는 다시 서류를 품속에 갈무리하며 물었다. "참, 외조부께서 주셨다는 유품은 뭐였지?" 그녀의 외조부는 바로 독혈 방시굉이었다. 유청풍은 그의 죽음에 관해 그녀와 노방에게 절운애에서 대략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침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야." 침합을 받아든 엄희채의 뇌리에는 지나간 추억이 아스라이 떠올랐 다. 엄희채가 여덟 살 때였을 것이다. 독혈 방시굉은 침으로 다친 짐승들을 치료해 준 적이 종종 있었다. 어린 엄희채의 눈에는 부상당해 처량하게 울던 노루가 껑충껑충 뛰 는 모습이 몹시 신기해 보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침합을 들고 자기도 해보겠다며 떼를 썼다. 방시굉은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고집부리면 이 침을 네 신랑 될 녀 석의 엉덩이에 팍 놓아 줄 테다! 하며 침을 흔들어 댔었다. 얼굴이 빨개진 엄희채는 피이! 그럼 남자에게는 시집 안 가요! 하 고 도망치곤 했었다. 그녀는 침합을 열어 잠시 살펴보았다. 가지런히 들어 있는 아홉 개의 침 하나 하나에 외조부의 따스한 숨 결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는 침합을 덮은 후 다시 건네주었다. "네가 간수해. 어른의 뜻이니......." "왜 내가 그분의 유품을 보관해야 하지?" "그 분의 의술을 배웠으니까." 엄희채는 단호히 말하고 직접 그의 품에 넣어 주었다. 유청풍은 그녀와 옥신각신하기 싫어 잠자코 있었다. 비록 침합이 소중한 유품이지만 그 때문에 서로 입씨름할 단계가 아니었다. 얽히고 설킨 음모를 밝혀내는 일이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 이었다. 갑자기 엄희채가 정색을 하며 똑바로 쳐다보았다. "냉영괴화를 만나러 갈 거야?" 유청풍은 침묵을 지켰다. 지금 그는 등조민이 들려주었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혈광마검이 가짜로 바뀐다는 게 무슨 뜻일까?’ 엄희채는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뭘 그리 생각해?" 유청풍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원수이자 은인인 고혜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감이 잡히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희채는 집요하게 물었다. "좋아하는 모양이지? 그녀를......?" 재차 답을 강요하듯 그녀에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여자들이란 그저.......’ 바로 그때 엄희채가 번개같이 그의 목을 껴안으며 입술을 맞춰왔다 . "흡!" 기습적으로 입술을 빼앗긴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희채는 부 드러운 혀로 그의 입속을 누벼댔다. 그녀의 혀는 향기롭고 따사로웠 다. 그녀는 꿀물을 뿌리듯 그의 입안을 혀로 한 바퀴 휘돌아 치고는 무 섭게 빨아댔다. '......!' 유청풍은 도저히 그녀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경우 작은 배는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한편 엄희채는 감하봉에서 벌어졌던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고혜원은 그녀를 연적(戀敵)으로 여겨 철저히 무시했었다. 그것도 다분히 우월감에 젖어 얕보는 태도로 대했던 것이다. 비록 엄희채가 살수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복수를 위한 것일 뿐 직업적으로 택한 길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전설처럼 알려진 독혈 방시굉의 외손녀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고혜원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오기를 발동한 것이 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살며시 입술을 뗀 그녀는 다시 구민선의 일을 물고 늘어졌다. "갑자기 입술을 빼앗긴 내 기분을 알아?" 그녀는 당연한 응징인양 싸늘한 음성을 발하며 뱃머리 쪽으로 걸어 가 주저앉았다. 하나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옥용에는 감미로운 미소 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유청풍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2] 달과 별이 먹구름에 가려진 음산한 밤. 스스슷! 한 가닥 인영이 비등원으로 날아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고목과 정원수, 나지막한 가산들은 침입자를 포박할 것처럼 움직이는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만 드는 사물의 배열은 바로 침입자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진도(陳圖)였 다. 인영의 예리한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흩었다. 사방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인영은 쉽게 진세를 허물며 금세 본채의 지하로 스며들고 있었다. '조민이 알려 주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진 속에서 죽을 뻔했군. ’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계단을 지나 세 번째 출구를 열고 인영은 소리 없이 진입해 들어갔다. '아니? 저건......?’ 한 개의 굵은 기둥 뒤에 은신한 인영의 동공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 다. 지하의 전면에서 거대한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쪽으로... 빈틈없이 맞춰야 한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공사 감독관 혁련달은 도면을 보며 인부들에게 연신 작업을 독려하고 있었다. 삼십여 명의 인부들은 손수레에 흙을 퍼담아 운반하는가 하면 십여 명의 목수들은 목재를 자르고 있었고, 또 다른 자들은 기둥을 세우 고 있었다. 그때 공사장의 인부 한 명이 등을 들고 지나갔다. 등불 빛에 인영의 모습이 언뜻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유청풍이었다. 지금 그는 공사장을 살피며 머릿속으 로 하나의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 올랐다. '그렇군! 저렇게 해서 혈광마검을 가짜로 바꿔 놓을 셈이었어!' 공사의 방향은 위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방향은 바로 마 검각과 이어지는 쪽이었다. '......!' 그의 몸이 돌연 굳어졌다. 불현듯 공기가 유연하게 흐르는 현상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 다를까?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지하로 잠입하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인영은 반대편의 돌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인영의 측면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를 본 유청풍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모염정이......?’ 인부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곳을 바라보는 것은 붉은 경장을 걸친 요염한 여인으로 바로 색절 모염정이었다.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공사현장을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수 시로 드나들어 그런지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공사현장만 을 응시할 뿐이었다. 순간 흙을 쏟아 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모염정은 그 쪽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유청풍은 그 틈을 이용해 바람처럼 지하를 빠져나갔다. "으음, 그래서 천락무예단의 운영권을 넘기겠단 말인가?" 등인탁은 접객실에서 엄희채를 만나고 있었다. 엄희채는 단호하게 말했다. "피차 신분이 드러난 이상 이런 관계를 청산하는 게 좋아요." 그녀의 음성에는 적대감이 우러나왔다. 그녀는 대출서류와 천락무예단의 명부, 그리고 각종 물품의 품목이 적힌 대장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피차 계산을 확실히 하고 나서 결판내자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었다 . 등인탁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허어! 단원들을 사곡에다 대기시켰다니... 아예 단단히 결심을 굳 혔구먼." 그는 상체를 기울여 인원명부를 펼쳐 보았다. "변동사항이 있나?" "결원(缺員)은 열 두 명이에요. 청풍은 계약기간 만료로 그만 두었 고, 투검 영감 외에 열 명이 죽었어요. 그리고 물품은 하나도 없어요 . 그건 갈곤태가......." 그녀는 절운애에서의 일을 얘기했다. 등인탁은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와호장이 의절의 제약소 사건에 너무 민감해. 청풍이나 비사금환 과 등져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것인지. 원." 그는 말을 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통좌가 무엇 때문에 이들을 살려 줬을까? 그가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사국중이 절운애로 간다고 말했었다. 한 데 유청풍과 살루문주 고헌부가 버젓이 살아있는 이유를 그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때 엄희채의 팔에서 금색의 비사금환이 번쩍거렸다. 그것을 본 등인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황옥진비결! 오라... 총통좌는 마성을 잠재우는 도가최고의 내 가심법을 탈취할 생각이군.’ 하지만 그는 걱정이 앞섰다. 자칫 힘만 소모하고 자신은 아무런 소득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 었다. 엄희채는 돌아갈 의사를 비쳤다. "확인이 끝났으면 수결해 주세요." 그녀는 인수증을 내밀었다. 순간 서류를 넘기던 등인탁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번져나갔다. '옳지. 이 계집을 처치해버리자. 살루문주가 저지른 것으로 꾸미면 제대로 맞아떨어지겠군.’ 그는 손끝에 슬며시 진기를 끌어 모았다. 죽음의 위기를 맞았건만 엄희채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등인탁이 서류를 덮으며 막 강기를 발출할 순간이었다. 쌩!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동그란 물체가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등인탁은 좌수로 물체를 쳐내며 우수로 엄희채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었다. 윙! 날아오던 물체가 갑자기 괴력을 발산한 것이다. 등인탁은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타앗!" 순간 부스러진 돌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차돌? 방해한 자가 누굴까?’ 등인탁은 창문을 박차고 허공을 날아갔다. 잠시 후 그는 가산 아래 내려서서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지 만 주위는 조용하기만 할 뿐 풀을 밟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귀신같구나......' 암습자는 분명히 실내상황을 어림잡아 밖에서 돌을 던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전에서 투석한 것처럼 공격한 정확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엄희채 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휘이잉! 그저 열려진 창문을 통과한 바람이 장막을 휘날릴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 발악적인 살광이 번져나갔다. '으음! 내 신분이 드러났지만... 두고 보자!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마.’ [3] 모염정은 연기처럼 신형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허공을 날던 그녀가 가볍게 착지한 곳은 화원 뒤편이었다. 한데 비 등원으로 침투할 때와는 달리 어쩐지 경계가 한층 강화된 느낌이 들 었다. '......?' 사방으로부터 찌를 듯한 예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이동할 전방을 재빨리 흩어나갔다. 그녀는 전방의 잔 디밭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가는 편이 제일 안전할 것 같았다. 그녀가 막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헉!" 삼 장쯤 앞에서 등인탁이 뒷짐을 진 채 느리게 걸어오는 것이 아닌 가? "왜 그리 놀라나? 왔으면 얼른 들어올 것이지." 나지막한 음성이 왠지 섬뜩하게 들렸다. 모염정은 내심을 감춘 채 살포시 미소 지었다. "놀래주려고 몰래 오려했더니......." 그녀는 둔부를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두 사람은 비스듬한 자세로 나란히 섰다. 등인탁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껴안는 척하더니 별안간 손을 비 수처럼 세웠다. 찰나 두 개의 음성이 고요한 밤 공기를 깨트렸다. "얏!" "탓!" 등인탁이 수도(手刀)로 그녀의 목덜미를 내려치는 순간 자세를 낮 춘 그녀 역시 손으로 쳐낸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이 장여나 벗어났 으며 등인탁은 재차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등인탁이 들고 있는 색혼비창과 모염정의 채대(彩帶)가 엇갈린 것 이다. 아홉 자 장창으로 늘려 공격한 등인탁과 연철(軟鐵) 허리띠를 풀어 막아낸 모염정의 솜씨는 실로 전광석화였다. 색혼비창은 얼추 긴 꼬챙이처럼 보이지만 천축산 묵철과 청은을 합 금하여 만들어 강철로 된 방패 열 개를 꿰뚫어버리는 무서운 병기였 다. 반면 모염정이 쥐고 있는 붉은 채대는 산동 제남부(濟南府)에서 캐 낸 자철광(紫鐵鑛)으로 제조한 날카로운 연검이었다. 두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등인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끝내 배신하겠다는 건가?" 나지막한 음성이 어딘지 오싹하게 들렸다. 모염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살수를 펼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나요?" 얄밉게 보이는 모습에 등인탁은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아직 그는 자신의 최고 절기를 펼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한 점은 모염정도 잘 알고 있었다. 등인탁은 일갈을 터트리며 창을 휘둘렀다. "흑룡포효(黑龍咆哮)!" 수십 가닥으로 변한 색혼비창이 모염정의 가슴을 정통으로 관통할 찰나였다. 그녀는 자세를 낮추며 우측 발을 대각선으로 좍 뻗음과 동 시에 신형을 돌려 체대로 후려쳤다. "하앗!" 원래 그 가격법은 회신후벽(回身後劈)이라는 검술의 공격품세였다. 그것을 채대로 구사하는 모염정의 일신조예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는 내심 도주할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동조자가 있는 줄 알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구나. 그럼 이쯤에서.. .....’ 바로 그때 호원무사들이 달려들었다. "잡아라!" 돌연 모염정의 신형은 신기루가 움직이듯 여섯 개로 늘어났다. 동 시에 사방에서 호위무사들이 비명을 발하며 쓰러졌다. "으아악!" 그들의 이마에는 한결같이 작은 침들이 박혀 있었다. 모염정이 막 손을 거둘 순간 등인탁은 정확히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딜 도망가려고?" "악!" 모염정의 입에서 숨막힐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데 창대를 세운 등인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창 끝에 는 옆구리가 길게 찢어진 붉은 경장만이 걸려 있었다. 모염정은 어느 새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그는 옷을 집어 내던지며 주위를 살폈다. "여우같은 계집이 작정을 했군! 옷을 두 겹이나 껴입고......." 이미 모염정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신법은 빨랐다. 원주의 눈치를 살피던 호원무사들은 재빨리 시체를 들고 사라졌다. "......." 등인탁은 심각한 상념에 잠겨들었다. 문제는 오늘부로 유청풍을 감시하는 체계가 무너진 셈이었다. 지금 까지 모염정은 그의 동향을 알려준 통로였던 것이다. [4] 비등원을 빠져 나온 유청풍과 엄희채는 곧장 막연산으로 달려갔다. 실로 수 년 만에 밟아보는 땅이었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 어 그는 감회를 느낄 새가 없었다. 다행히 그는 지리에 밝아 산을 타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이 사곡 입구에 접어들 즈음 어둠 속에서 노방의 음성이 들려 왔다. "유형! 어서 오시오." 그는 천락무예단을 인솔하여 먼저 와 있었다. 이곳이 내일 새로운 경영주인 등인탁에게 인원을 인계할 장소였다. 유청풍은 소리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수고했오." 엄희채가 언뜻언뜻 보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숙식준비를 하는군요." "응, 거의 마쳤을 거야." 노방은 두 사람이 오면서 죽을 뻔한 사실을 아는지 서둘러 진행하 고 있었다. 그는 유청풍에게 시선을 돌렸다. "막연산의 공기가 맑아서 아주 좋구려." 원래 사곡은 역질 환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황하가 막연산을 지나면서 수많은 동굴을 형성한 터라 아직도 사람 의 발길이 닿지 않은 동굴이 많았다. 천락무예단원들은 그런 동굴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엄희채는 인수증을 보여 주며 말했다. "사형, 운영권을 넘겼어요." "인계해도 걱정이군. 정해단 소속이 될 테니......." "등인탁의 정체가 드러나 아마 운영할 수가 없을 거예요."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어언 세 사람은 단원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단원들은 준비를 하 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솥을 거는 사람, 쌀과 반찬거리를 준비하는 여단원, 땔감과 물을 길어 나르는 사람 등... 뇌옥에서 탈출해 그런지 모두들 활달해 보였 다. 몇몇 고참 단원들이 등을 들고 다가와 일제히 인사를 했다. "단주님, 오셨군요!" "저희들 때문에 고초가 많으십니다." 엄희채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할 소리, 그보다 다들 무사해서 반가워." 설가대가 엄희채에게 나직이 말했다. "단주님, 저희들은 정해단이 싫습니다." "그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지?" "표혈이란 영감이 다녀갔습니다." 유청풍이 의아해 하자 설가대는 말을 이었다. "청풍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모르겠다고 했더니 내일 비등원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며 돌아갔습니다." 유청풍을 비롯한 삼 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천락무예단이 이곳으로 온 사실은 오직 등인탁만이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엄희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유청풍에게 말했다. "그 자가 벌써 퍼트린 걸까?" 어쩐지 음모의 냄새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청풍은 입을 다 문 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별안간 나타난 사국중이 중재를 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것이다. 입을 달싹거리던 화염 도종이 떨떠름한 음성을 발했다. "한데 그 늙은이 참 이상해." 유청풍이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투검 영감의 신발을 신고 있더란 말이야." 그러자 외줄 강봉만이 픽! 하고 웃었다. "젠장, 신발에다 이름을 써놨나 어떻게 알아?" "그게 아니라 투검 영감이 내 발과 크기가 같거든. 그래서 불 뿜기 연습할 때 영감의 신발을 몰래 신었었는데......." 북치기 노달맹은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투덜댔다. "염병, 제 걸 아끼려고 남의 걸 신어?" 도종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침을 튀겼다. "이 사람아, 낡아도 투검 영감의 것은 양가죽이었어. 겨울에는 가 장 따듯했지. 불똥이 튀어서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그걸 다른 늙은이가 신고 있으니 하는 소리야." 그 말은 실수로 신발에 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라 허공에 기름을 뿌 린 다음 발을 흔들며 재주를 피우느라 그렇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도종의 신발을 쳐다보았다. 노달맹은 아예 등을 바짝 들이대고 내려다보았다. 과연 그의 헌 신 발은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구멍은 미세하게 뚫려 있었다. 잠자코 있던 탈바가지 안창구가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그 표혈이란 늙은이가 웃을 때 투검 영감처럼 어금니 가 썩었더군! 킁!" 그는 입을 쩍 벌리더니 치아를 가리켰다. 유청풍은 안색이 굳어졌다. '이 사람은 탈을 제조하는 전문가라 상대방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만일 사국중이 투검 영감의 변신이라면......? 축골술이나 역용술이 뛰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소지가 농후했 다. 돌이켜 보면 무공을 익힌 투검 영감의 죽음은 석연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국중의 출현도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신발과 이가 일말의 증거는 된다해도 직접 확인하지 않은 이상 선뜻 단정짓기가 어려웠다 . 엄희채는 그의 상념이 길어지자 설가대에게 지시했다. "설주무, 어서 식사를 하도록 해. 우리는 잠시 상의할 일이 있어." 고참단원들은 허리를 굽히며 물러갔다. "예, 그럼 저희들은 이만......." 유청풍은 산기슭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산기슭 아래에 검혈 단궐의 무덤이 있었던 것이다. 엄희채와 노방 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 후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앞서 가던 유청풍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기척!’ 언뜻 밤바람처럼 들리는 음향은 절정고수만이 식별할 정도로 매우 미세했다. 그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어림잡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가느다란 음성이 명확하게 들려왔다. 들릴 듯 말 듯한 가느다란 음향은 분명히 신음소리였다. 노방과 엄희채도 아연 긴장하는 빛을 띠었다. 유청풍은 한 지점을 향해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넝쿨과 바위가 뒤엉킨 속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청풍은 여인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색절!’ 놀랍게도 여인은 색절 모염정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채 풀밭에 누워있었다. 한 뼘쯤 찢어진 우측 옆구리가 치명적인 상처였다. 창자가 손가락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와 숨을 헐떡거릴 때마다 피가 푸르르! 소리를 내며 솟구쳤다. 그때였다. "가까이 가지마!" 돌연 싸늘한 여인의 음성이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휙! 교영이 떨어져 내렸다. 뜻밖에도 인영은 고혜원이었다. 그녀는 서슬 퍼런 안색으로 쌍륜화 극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는 한 수에 모염정을 쳐죽일 듯한 기 세였다. "참아." 유청풍은 무겁게 한 마디 던진 후 모염정에게 다가갔다. 고혜원은 아미를 치켜올리며 분노에 찬 음성을 발했다. "대체 왜 저런 여자를 살리려는 거지?" 그녀는 원망스런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묻지 않아도 그녀는 모 염정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모염정이 악을 쓰듯 음성을 높였다. "흥, 이 사람 선친의 무덤을... 만든 게 나야. 알아? 으......." 몇 년 전 유청풍의 선친인 유대진은 갈곤태에게 맞아 숨을 거두었 다. 당시 유기될 뻔했던 유대진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 다. 그녀는 심한 고통으로 연신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 고혜원은 그만 할말을 잊고 말았다. 늘 가슴 한 구석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는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 었다. 한편 노방과 엄희채는 그저 눈치로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들도 모 염정에 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유청풍이 하는 것을 잠시 지켜볼 모양 이었다. 유청풍은 모염정 옆에 앉아 나직이 물었다. "누구 짓이지?" 모염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으윽... 등인탁 그 놈이......." 그녀가 입을 벌릴 때마다 내장도 함께 펄떡거렸다. "알았으니 이젠 입 다물어." 그는 익숙한 솜씨로 지혈제를 뿌린 다음 흉대를 감아주었다. 모염 정은 감격스런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위험에 빠지면 모두가 등을 돌리는 터에.......’ 비록 그녀는 폭넓게 남자들과 정을 통하고 있지만 막상 위급한 순 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유청풍은 고개를 돌리며 재촉했다. "뭐해? 독한 술 한 병 가져와야지." 움찔 놀란 고혜원과 엄희채는 공교롭게 동시에 대답했다. "알았어." 순간 두 여인은 서로 마주 바라보더니 이내 함께 달려갔다. 노방은 단약을 한 알을 권했다. "자, 이 약을 복용해. 피를 보충해 줄 테니." 그도 의술에 관한 한 수준에 도달했는지라 약을 입에 넣어준 다음 삼 장 정도 뒤로 물러났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겠소." 안도감을 느낀 모염정은 분풀이하듯 등인탁의 악행을 늘어놓았다. "그 자가 대통좌가 분명해. 화절을 납치한 것도, 제약소 사건도 다 그 자가 저지른 거야!" 아울러 그녀는 지하에서 본 공사까지 거론하면서도 끝내 자신이 연 관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청풍은 전모를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고혜원과 엄희채가 돌아왔다. 두 여인은 보자기를 내려놓았다. 그 속에는 술 한 병과 풍등(風燈) , 그리고 옷 한 벌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가까운 빈촌 가게에서 사 온 모양이었다. 유청풍은 독혈 방시굉이 물려 준 침합(鍼盒)을 품에서 꺼냈다. 침합 속에는 아홉 개의 크고 작은 침과 바늘 한 개가 들어 있었다. 그새 엄희채가 풍등에 불을 붙였다.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엄희채는 풍등을 상처부위에 바짝 들이댔다. 천으로 감싼 상처부위 는 그새 피가 엉켜 말라 있었다. 그는 술 한 모금을 입에 넣더니 고개를 상하로 당기며 천 위에 뿌 렸다. "윽, 따가워!" 모염정은 얼굴을 찌푸린 채 몸을 사렸다. 술은 천 위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엄희채는 그 천을 풀어냈다. 유청풍은 바늘에도 술을 뿌렸다. 이슬 같은 술 방울이 바늘구멍을 통해 똑똑 떨어졌다. 그는 바늘구멍에 까만 명주실을 끼어 잡아당겼 다. 모염정은 갑자기 생각난 듯 상의 단추를 풀어 제켰다. "글쎄, 그 잡놈이 여기도 치더군. 멍들었나 모르겠어." 일순 풍만하고 뽀얀 젖가슴이 확연히 드러났다. 수많은 남자를 경 험했건만 정기를 갈취해서 그런지 그녀의 가슴은 처녀의 그것과 다름 이 없었다. 엄희채와 고혜원의 눈 꼬리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년.......’ 결국 그녀들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유청풍은 긴 바늘을 응시하며 신중하게 말했다. "첫 시도라 말을 하면 내장과 살을 같이 꿰맬지도 몰라." 모염정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뭐?" 그녀의 둥그런 눈에 공포의 빛이 흘러갔다. 절정고수 등인탁 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그녀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늘과 자신의 상처를 차 례로 보았다. 저 긴 바늘과 검은 실이 창자를 지나 살과 함께 붙들어 매졌다고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마 바늘이 이토록 무섭게 보이기는 처음일 것이다. 그녀는 입술이 타는지 두어 번 침을 바르더니 나직이 물었다. "한 모금 마셔도 될까?" 유청풍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눈과 신경은 오직 상 처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술 한 모금을 들어 마신 모염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크으... 독해." 쑥! 그 순간 바늘이 들어갔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허리를 비틀며 두 다리를 구부렸다. "으윽!" 일순 거뭇거뭇한 허벅지 사이가 모조리 드러났다. 그 광경에 고혜원과 엄희채의 옥용이 확 달아올랐다. 모염정이 경 장만 걸치고 다니는 사실을 두 여인은 처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청풍의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도 않았으며 느낄 여유도 없었다. 바늘은 양쪽 살을 합치며 계속 위로 올라갔다. 긴장한 모염정의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녀는 다시 술을 서너 모금 들이키고는 긴 트림을 했다. "끄윽! 내 언제고 등인탁... 그 인간을 똑같이 만들어서 데려올 테 니 창자를... 윽!" "입 다물고 호흡을 가다듬어." 쑥! 바늘이 들어가고 실을 당기는 소리가 오싹하게 들렸다. 하지만 진 지한 그의 모습에 세 여인은 숨을 죽였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숙달된 솜씨로 상처를 봉합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가위로 실을 절단한 후 손가락에 말아 매듭을 지어 놓았 다. "당분간 식사와 물을 조금 마시고 천은 삼 일 후. 실밥은 보름 있 다가 제거해." 그는 약낭에서 가루약을 꺼내 뿌려준 다음 다시 깨끗한 천으로 허 리를 싸매 주었다. 그가 침합을 들고 뒤로 물러서자 모염정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유청풍에게 다가가 눈을 찡긋거렸다. "뜨겁게 안기고 싶지만 연인이 둘이라서 말야. 한 사람은 자유롭게 즐기려 들 테고... 호호호! 앞으로 구원을 빙자한 여자를 조심하는 게 좋을걸?" 그녀는 신형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말은 다분히 고혜원을 겨냥한 이간질이었다. 엄희채와 고혜 원은 그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아유... 청풍만 아니라면 그냥.......’ 이때 노방이 산 아래를 가리키며 먼저 걸어갔다. "유형, 어서 냇가로 갑시다." 고혜원은 얼른 하얀 비단 손수건을 건넸다. "이거 가져가." 백합 한 송이가 수놓인 그 수건에서 향기로운 방향이 번져 나왔다. 수건을 받아든 유청풍은 비로소 온 몸에 피가 묻었다는 사실을 알았 다. 그는 냇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가 수건을 받아 얼 굴을 닦는 것을 본 엄희채는 한쪽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