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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十八 章 철륭의 몰락 새빨간 불꽃이 넘실대는 무쇠화로엔 벌겋게 달아오른 몇 개의 인두가 담겨 있었다. 살인독도 좌백수는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의 뒤에는 험상궂은 인상을 한 수하들이 몇 명 서 있었다. 좌백수는 인두를 움켜쥔 채 엄청난 고문으로 인해 이미 만신창이가 된 제중인을 쳐다보며 달래듯이 말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네놈은 누구냐? 그리고 인부를 가장해서 들어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제중인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힘겹게 열렸다. "이리… 가까이." 좌백수는 이제야 제중인이 마음을 돌려먹었구나 생각하며 짐짓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딱한 친구로군. 진작 털어놨으면 이렇게까지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우욱!" 귀를 들이댄 좌백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제중인이 귀를 사정없이 물어뜯은 것이다. "퉤!" 제중인은 반쯤 잘린 좌백수의 귀를 뱉어내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좌백수는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인두를 가차없이 내뻗었다. "이런 찢어 죽일 놈!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살이 타올랐다. 한치 깊이로 파고든 인두에서 솟구치는 연기와 불꽃으로 실내는 노린내로 뒤덮이고 말았다. 제중인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 나왔다. 신음은 없었다. 바들바들 떨던 제중인의 고개가 툭 떨어진 건 일각 정도가 지나서였다. "지독한 놈!" 좌백수는 축 늘어진 제중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에 든 인두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깨워서 죽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 노천주님께 보고하고 오겠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떨어져 나간 귀를 감싸쥔 채 지하계단을 오르는 좌백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철문 앞에 이른 그는 귀를 감싸쥐었던 피범벅이 된 손을 쳐다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수하들 앞에서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네놈을 산 채로 천참만륙하지 않으면 내 성을 갈고야 말리라!" 뿌드득 이를 갈며 지하를 나선 좌백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 아래, 흑백의 무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한데 뒤섞여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결전이 펼쳐진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지 광장은 시뻘건 핏물과 시체로 가득해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이곳을 알았단 말인가? 적진을 살피던 좌백수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눈부신 검광을 발하며 흑의무사들을 짚단 베듯이 베어 넘기는 좌수경과, 연신 허공으로 치솟으며 수하들을 박살내고 있는 수홍장을 발견한 것이다. "도검쌍패!" 이때 또다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좌백수는 흠칫하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수하들의 잘린 몸이 용수철에 퉁긴 것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는 수하들을 도륙하는 석옥성과 그의 뒤 석탑 위에서 쇠구슬을 손에 쥔 채 대소를 날리고 있는 축악의 모습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쪽에서는 잠송과 주청산 등이 신주제일청의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혈랑팔겁! 저, 저놈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경악성을 토한 그는 빠르게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철륭의 양물은 거대하고 흉측스러웠다. 그는 음침하게 웃으며 견고하게 닫혀진 염서시의 밀문 입구로 그 거대한 양물을 접근시켰다. "흐흐흐, 이제 곧 지독한 쾌감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될 것이다." '아… 안돼!' 염서시는 내심 부르짖었다. 하나,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엉덩이를 움켜쥔 철륭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뜨거운 것이 몸의 중심에 닿았다. 염서시는 이를 악물었다. 그를 만난 후 다시는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지 않겠노라 다짐한 각오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급보입니다, 노천주님!" 좌백수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냐?" 철륭의 음성에는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면 물러나라는 경고였다. "도검쌍패가 혈랑팔겁을 이끌고 대거 침공해 왔습니다. 급히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뭣이?" 놀라 벌떡 일으킨 철륭은 서둘러 옷을 걸쳤다. "그놈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는 말이냐?"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전에 한 놈을 잡아서 제팔옥(第八獄)에 감금시켜 두었습니다." 철륭은 음산한 눈빛을 뿜어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찾아왔단 말이지? 좋아, 도검쌍패와 혈랑팔겁이라면 불꽃놀이의 제물로는 적격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저승길로 보내주마." 콰콰쾅! 중간 성문이 통째로 터져 나갔다. 좌수경은 격전장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제칠조(第七組)와 제팔조(第八組)는 내전 쪽을 맡아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수십 명의 무사들이 허공을 날아갔다. "십육조(十六組)와 십칠조(十七組)는 선두 조를 지원하고 이십팔조(二十八組)와 이십구조(二十九組)는 좌우를 협공한다." 좌수경은 전방을 향해 맹렬히 쏘아져 나갔다. "삼십오조(三十五組)와 삼십육조(三十六組)는 후방을 점거하여 퇴로를 봉쇄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라!" 백의무사들의 중문을 넘어서자 광장에는 수많은 흑의무사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기다리고 있었다. 흑의무사들의 수뇌인 비월쌍륜(飛越雙輪) 엄탁(掩託)이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신주제일청의 형제들이여! 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저승길로 인도하라." 결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이 뒤범벅이 된 채 양 세력은 미친 호랑이처럼 얽혀들었다. 선두의 좌수경과 수홍장은 도검을 번뜩이며 살벌한 기세로 흑의무사들을 베어 넘겼다. 엄탁도 백의무사들을 향해 자신의 쌍륜을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그의 쌍륜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백의무사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주청산은 흑의무사 두 명을 양손에 잡아 풍차처럼 돌리더니 저 멀리 던져버렸다. "개벽신수인지 뭔지 하는 늙은이는 어디 있느냐?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석옥성과 단엽도 적진을 누비며 무차별 살상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격전장이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망루 위에서 철륭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단 말인가!' 염서시로서는 철륭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상하게 보이느냐?" 그녀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한 듯 철륭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웃고 있으니까 이상하단 말이지!" 염서시는 그때서야 손가락으로 전장 쪽을 가리켰다. "당신 눈에는 지금 애써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요?" "흐흐흐, 너무 잘 보여서 탈이지." 음침하게 웃은 철륭은 다섯 개의 눈부신 홍보석이 일렬로 박혀 있는 백옥으로 만든 피리 모양의 막대를 들어 보였다. 막대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필시 범상치 않은 기물(奇物)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런 걸 준비한 거다." "그게 뭐죠?" 철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는 혹시 구천십지여의신뢰(九天十地如意神雷)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염서시는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며 경악성을 발했다. "설마 전설의 무림십보(武林十寶) 중 서열 일위(一位)에 올라 있는 그 구천십지여의신뢰를 말하는 건가요?" 철륭은 음산한 눈빛으로 격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저놈들이 딛고 선 땅 밑에는 무려 삼백만 근의 화약이 매설되어 있고 내 손에는 고금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절대마병(絶代魔兵)인 구천십지여의신뢰가 쥐어져 있다." 맙소사! 이렇게 치밀한 인간이었을 줄이야. 철륭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염서시에게 구천십지여의신뢰를 들어 보였다. "네 생각에는 이걸 발사해서 삼백만 근의 화약을 폭발시키면 저 중에서 몇 놈이나 살아 남을 것 같으냐?" "설마 수하들까지?" 철륭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허공을 응시하며 광오하게 말했다. "천하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면 이까짓 신주제일청쯤은 열 개, 백 개라도 버릴 수가 있다. 잠시 후에 너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무림사 초유의 불꽃놀이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기이한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그긍! 땅이 진저리칠 정도의 굉음이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강렬했는지 양 진영의 무사들도 싸움을 멈추고 소리난 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콰가가강! 믿을 수 없게도 성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나타난 물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맙소사, 배야." "저렇게 거대한 배가 육지 위를 움직이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랬다. 배였다. 거선은 무서운 기세로 흑백의 무사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무사들은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무사들을 거선은 그대로 깔아뭉개며 성안으로 계속 진입했다. 거선을 바라본 잠송은 반색을 했다. 거선의 뱃머리에 우뚝 서 있는 사내는 다름아닌 사마군이었던 것이다. 그의 뒤로는 수백 명의 죽립객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마군, 과연 물건은 물건이군!' 사마군은 검을 뽑아들고 대갈일성을 토하며 날아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이 신주제일청의 오합지졸들이다.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마라." 그의 명령에 죽립객들이 벌떼처럼 일제히 날아 내렸다. "당황하지 마라. 전열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대응하라!" 엄탁은 수하들을 향해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당황하지 말라고? 그게 맘대로 될까?" 한소리 부르짖은 사마군이 신검합일의 자세로 엄탁을 향해 짓쳐들었다. 엄탁은 추호도 당황치 않고 쌍륜을 마주치며 사마군을 향해 공격을 펼쳤지만 애초에 상대가 아니었다. 쾅! 굉음과 함께 엄탁의 전신이 폭발하듯 터졌다. 그 광경을 본 좌수경 진영은 사기가 충천했다. 그 결과는 곧 힘으로 나타나 삽시간에 광장은 백의무사들로 거의 장악되었다. 철륭이 염서시에게 물었다. "저놈들은 누구인가?" "복장으로 보아 신월회가 틀림없어요. 최근 강호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신흥살수 조직이죠. 혈랑팔겁의 등장 이후 최고로 손꼽히고 있다고 들었어요." 철륭은 비릿하게 웃으며 음산한 눈빛으로 전장을 쏘아보았다. "어쨌든 많이 와주니 더욱 반갑군." 그는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혈전장을 향해 구천십지여의신뢰를 겨누었다. "열 가지 살길을 마다하고 한가지 죽을 길을 찾아왔으니 지옥에서라도 본좌의 무정함을 원망 말아라," 염서시의 얼굴에 공포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정말 그걸 사용하실 건가요?" "본좌는 항차 천하를 움켜쥘 천자의 대기(大器)다. 나를 따르는 자에겐 영광을 줄 것이나, 거역하는 자에게는 오로지 죽음뿐이다." 그는 서슴없이 구천십지여의신뢰의 첫번째 보석을 꾹 눌렀다. 그러자 구천십지여의신뢰에서 눈부신 홍광이 발출되었다. 홍광은 유성처럼 꼬리를 그리며 격전장을 향해 쏘아져갔다. 한창 신나게 흑의무사들을 도륙하던 단엽은 기이한 파공음을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질겁하고 말았다. 한 줄기 괴이한 홍광이 막내를 향해 쏘아가는 것이 아닌가? "막내, 위험하다." 경고에 그치지 않았다. 단엽은 몸을 날려 석옥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악! 홍광이 단엽의 가슴을 관통했다. 석옥성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홍광에 격타당한 단엽의 몸이 풍선처럼 터져 버린 것이다. "형님!" 아무것도 없었다. 단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실로 놀라운 구천십지여의신뢰의 위력이었다. "피해라. 어서!" 잠송과 주청산, 좌수경 등은 일제히 몸을 날렸다. 철륭은 그 광경을 보며 냉혹하게 웃었다. "흐흐흐! 운이 좋았구나, 애송이놈들! 그러나 한번 운이 좋았다고 해서 계속 좋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는 두 번째 보석을 꾹 눌렀다. 또다시 유성 같은 홍광이 격전장을 향해 쏘아져갔다. 양측 무사들은 눈을 부릅뜬 채 홍광을 쳐다보았다. 주청산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홍광이 날아오는 지점을 확인하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저쪽이다." "개새끼! 이 포부동이 죽여버리고 말겠어." 포부동이 검을 뽑아들고 홍광이 날아온 지점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돼, 임마!" 축악이 큰소리로 만류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단엽과 같았다. 홍광에 격타당하는 순간 포부동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크하하핫! 모조리 죽여버리고 말겠다." 철륭은 광기를 발산하며 미친 듯이 보석을 눌러댔다.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며 세 줄기 홍광이 품자형으로 격전장을 향해서 쏘아져갔다. 축악이 비로소 홍광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기겁을 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화중지왕(火中之王)인 구천십지여의신뢰다. 위험해. 모두 멀찌감치 피해라!" 그의 신호는 빨랐으나 어찌 빛을 능가할 것인가? 엄청난 폭발과 함께 흑백의 무사들이 무더기로 날아갔다. 다급하게 신형을 날린 잠송 등의 뒤쪽에서도 흑백의 무사들은 엄청난 불기둥에 휩싸인 채 가랑잎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철륭은 미친 듯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왓하하하하!" 그가 자신의 수하들과 적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살상을 벌이자 몇몇의 흑의무사들이 마구 휘날리는 파편과 불기둥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노천주님이 우리를 버리다니!" "그럼 우린 지금까지 누굴 위해 싸운 것인가!" 흑의무사들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이때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던 철륭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웃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아직까지 별 탈이 없는 격전장을 쳐다보면서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화약이 터지지 않지?" 염서시는 철륭의 광폭한 눈빛에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요? 난 땅속에 화약이 묻혀 있다는 사실도 조금 전에야 알았어요." 철륭은 잡아먹을 듯이 염서시를 쏘아보다 문득 좌백수의 보고를 떠올렸다. ―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전에 한 놈 잡아서 제팔옥에 감금시켜 두었습니다. "설마 그놈이 본좌의 대계를 망쳤단 말이냐?" 그는 제중인이 갇힌 감옥이 있는 가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갔다. "쥐새끼 같은 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염서시는 철륭이 사라지고 나자 우울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꿈으로 끝나버린 허무한 불꽃놀이…….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쾅! 뇌옥의 철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가며 철륭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걸레처럼 참혹한 몰골로 늘어져 있는 제중인을 향해 어금니를 뿌드득 갈아 마시며 물었다. "네놈 짓이냐?" 제중인의 짓뭉개진 눈덩이와 제멋대로 뒤틀린 얼굴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화약… 얘기라면… 도화선을… 모조리… 끊어버렸지." 철륭은 노기가 충천한 나머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전광쾌도 제중인!" "혈랑팔겁?" "흥분할거 없어. 어차피…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 거니까." 철륭은 분노가 폭발한 나머지 귓구멍에서 연기가 펄펄 날 지경이었다. 그는 갈고리처럼 손을 오므린 뒤 제중인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쳐 갔다. "이노옴!" 꼼짝없이 제중인의 머리통이 박살나려는 순간이다. 번쩍! 전광석화처럼 한줄기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철륭은 자신의 등뒤를 향해 무섭게 뻗쳐오는 기운을 느끼자 이내 신형을 홱 틀면서 냅다 쌍장을 뿌려냈다. "웬놈이냐?" 콰콰쾅! 그의 장력에 격중당한 벽면이 종잇장처럼 터져 나갔다. 뒤로 돌아선 철륭은 자신의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위지강을 발견하곤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네놈은……?" 그러나 위지강의 시선은 철륭을 지나쳐 참혹한 몰골로 늘어져 있는 제중인에게 향했다. 제중인은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위지강의 눈빛에 진한 고통의 기색이 스쳐 지났다. "아직… 견딜 만하느냐?" 위지강의 음성을 들은 제중인은 흠칫하더니 떨구고 있던 고개를 발작적으로 쳐들었다. "대형이오?" "그래, 나다." 제중인의 눈에서 격정의 피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렇구려. 이 목소리… 이 냄새… 정말 대형이구려……." 위지강은 제중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쓸어안았다. "기다려라. 너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먼저 처리하마!" 위지강은 천천히 일어나 철륭을 향해 다가섰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많은 빚을 졌군! 썩어 빠진 그 몸뚱이 하나로 갚기엔 지나치게 많은 빚이라고 생각지 않소?" 철륭은 차디찬 냉소를 흘렸다. "미친놈! 터진 주둥이라고 멋대로 지껄인다만 곧 곡소리가 나오게 만들어주마." 그는 두 손을 합장하면서 전신에서는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었다. 위지강은 천룡신검을 뽑아들었다. "이 자리에서 선친의 혈한까지 함께 정리하겠소." 철륭도 위지강의 척살대상인 강호육기의 일인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와 손을 잡았던 위지강, 그러나 이제는 은원을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철륭은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단 일초에 숨통을 끊어주마, 애송이!" 투명하게 변한 쌍장이 위지강을 향해 벼락같이 들이닥쳤다. 월영천혈기, 그 무공이었다. 반월형의 강기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날아들건만 위지강은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허나, 그는 내심 철륭의 무공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위지강이 막 공격을 가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안돼!" 염서시가 두 사람 사이로 번개같이 뛰어들었다. 빠지지직! 마치 번갯불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염서시의 교구가 엄청난 기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그리고는 태양이 폭발하듯 눈부신 광채가 사방으로 폭산되었다. 갑작스런 염서시의 행동에 철륭은 크게 당황했다. "이런 미친 계집!" 위지강은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손에 든 천룡신검을 쭉 내뻗으며 일성사자후를 토했다. "천마겁(天魔劫)!" 쿠오오오오! 천지간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기운이 구름처럼 철륭을 향해 몰려갔다. 철륭은 위지강이 발출한 검기를 쳐다보며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천마겁! 천마검법의 제팔초를 그 나이에 벌써 완벽히 터득했단 말인가?" 콰콰콰쾅! 두 개의 기류가 충돌하면서 바닥이 마구 뒤집히며 철륭은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뒤쪽으로 퉁겨나갔다. 쾅! 철륭은 석벽에 부딪쳐 큰 대자로 뻗고 말았다. 처참한 몰골의 철륭 위로 천장이 무너져 크고 작은 돌무더기들이 그를 덮쳤다. "염서시, 네년이 날 배신할 줄이야." 철륭은 한 맺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위지강은 천룡신검을 거둔 후 염서시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손으로 염서시를 안아들었다. "내 말이 들리오?" 염서시는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를 마지막으로 지피며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오… 오랜만… 이에요." 위지강은 연민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짓을 했소." "사랑… 하니까요." 그녀는 떨리는 손을 힘겹게 쳐들어 위지강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전에 말했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목숨을 걸고…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서시……!" "있잖아요… 나 진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해도… 되요?" "얼마든지." "만약에… 내세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거기선… 절대로… 당신을 다른 여자에게… 뺏기지 않을……." 염서시는 말을 맺지 못했다. 무림인들에겐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비정하고 냉혹하기만 했던 염서시 수음희, 결국 그녀도 한 남자의 품에 안주하고픈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위지강의 마음이나마 차지할 수 있었다. '편히 쉬시오!' 잡초로 뒤덮인 황량한 산기슭. 그 산기슭을 타오르는 여섯 사람이 있었다. 잠송과 주청산, 호랑평, 축악, 석옥성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백의인이었다. 그들은 이내 잡초가 무성한 산기슭에 내려섰다. 잠송 등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다급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형, 저희들이 왔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대형!" 이들은 지금 위지강을 찾아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인적이 없는 산기슭에는 스산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화가 난 주청산이 백의인의 멱살을 와락 잡아채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이쪽으로 오시는 걸 봤다고 했잖아!" 호랑평도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저 새끼, 얼결에 잘못 본 것 아냐?" "아, 아니오. 틀림없이 마도수, 그분이었소." 주청산이 잡아먹을 듯이 백의인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왜 없지?" 문득 석옥성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저길 보십쇼, 형님!" 그가 가리키는 숲에는 두 개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잠송 등은 흠칫하더니 곧바로 신형을 날려 그곳으로 달려갔다. 갓 만들어진 엉성한 두 개의 무덤 앞에 내려선 그들은 일제히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두 개의 무덤 앞에는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 多情義女之墓. ― 義弟 電光快刀 齊仲仁之墓. 염서시와 제중인의 묘지였다. 잠송 등등은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대형이다! 대형께서 돌아오셨다."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고봉 위에서 위지강은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여명이 움터오는 새벽하늘 저편으로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단엽과 포부동, 그리고 제중인의 모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미안하다. 아우들아.' 그는 쓸쓸하게 돌아섰다. '내세에는 부디 칼 대신 쟁기를 든 농부로 다시 만나자.' *** ― 대형이 다녀가셨습니다. ― 방금 철륭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연해월은 잠송이 한 말을 뇌리에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바보. 왔으면 나타날 일이지 그냥 사라질 건 뭐냔 말이야!'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쁜 사람!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 날인데……. 내가 왜 거기까지 갔는데…….' 연해월은 위지강을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서러웠다. 그녀가 사마군을 따라나섰던 것은 위지강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위지강은 격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내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거냐?" 그녀의 뒤에서 사마군이 다가오며 호탕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해월은 손끝으로 눈가를 훔치며 애써 미소를 지은 뒤 뒤돌아 섰다. "얘긴 잘되셨어요?" "무슨 얘기 말이냐?" "신월회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셨다면서요?" 사마군은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래! 원래 나란 놈은 무식해서 무림패권이라던가 야망 따위는 말만 들어도 골머리를 싸매던 놈이거든." 그는 시선을 돌려 연해월을 바라보았다. "한가지 유일한 꿈이 있다면 마도수처럼 잘 나가는 검법의 달인들을 내 손으로 꺾고 살아생전 한번이라도 천하제일검이란 호칭을 들어보는 것이었지. 그래서 떠났고 그래서 돌아온 거다." 사마군은 씁쓸하게 웃으며 연해월 옆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 친구를 도와준 셈이 됐으니 더 이상 이 북새통에 눌러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게지." "그럼 어디로 가시는 거죠?" 사마군은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정처 없이 바람처럼 훨훨 떠다닐 생각이다. 그러다 나보다 뛰어난 놈을 만나서 한 수 배울 수 있으면 금상첨화고." 그는 연해월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넌 어찌할 테냐?" 연해월도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성아를 찾아보겠어요." 사마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도 찾아보고 말이지." 그의 정곡을 찌른 말에 연해월은 흠칫했다. 사마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는 둘도 없는 사랑이지만 나한테는 둘도 없는 원수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면 무조건 죽여야 하지만 너는 어쩔 셈이냐?" 연해월은 곤혹스런 표정이 되어 사마군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사마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너고 나는 나야! 깊게 생각할 게 뭐 있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붙잡고 늘어지란 말이다. 그 동안 남몰래 흘린 눈물이 아깝지도 않니?" 연해월의 봉목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오라버니!" 진한 감동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연해월의 손에 사마군은 두툼한 전표 뭉치를 덥석 쥐어주었다. "받아둬라!" 연해월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뭐죠?" "아랫것들 나눠주고 남은 돈이다. 그 정도면 죽을 때까지 밥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사랑을 하든 지지고 볶든 배고프면 말짱 헛일이야! 오라비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찍소리 말고 넣어둬라." "……!" 사마군은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좀 부족해도 그냥 넘어가, 임마! 이젠 털어 봐야 먼지밖에 나올 게 없다고!" 연해월은 눈물을 글썽인 채 말했다. "처음 오라버니를 만났을 땐 무섭기만 하고 멋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사마군은 무안한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럼 제대로 본 거다." 연해월은 격정적으로 사마군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사마군은 연해월의 갑작스런 행동에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연해월은 사마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를 좋아해요, 안아주세요!" 순간 사마군이 굳어지며 연해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연해월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잘될 거다. 용기만 잃지 말고 살아가거라." "오라버니도 어서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요." 사마군은 우울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너 같은 여자가 이 세상에 또 있다면 모르겠지만!' 무림남북조시대(武林南北祖時代). 현재의 무림을 일컬어 강호인들이 부르는 말이다. 무림은 현재 거대한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두 세력에 의해서 강호가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정검천(正劍天). 동부와 북부무림 산하 총 팔백 예순다섯 개의 대소문파로 형성된 강북무림(江北武林)의 하늘이다. 남도맹(南刀盟). 남부무림 구백칠십 개의 문파가 수족처럼 움직이는 강남무림의 패자다. ― 남도북검(南刀北劍). 무림인들은 이 두 세력을 가리켜 남도북검이라 칭했고, 천하사세의 이름이 무림의 역사에서 지워진 지금 당금 무림은 철저하게 이 두 세력에 의해 영도되고 있었다. 흑백정사(黑白正邪)를 불문하고 일단 무림에 적을 둔 조직이나 무림인이면 이들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중도(中道)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강북에 있다면 정검천에, 강남에 있다면 남도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절대의 원칙이었고 여기엔 털끝만치의 예외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들의 조치에 일부 불만을 가진 무림인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 무림인들은 그 누구도 양대 세력에 대해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마침내 천하의 주인을 칼가름하기 위한 양웅 최후의 한판 승부가 목전에 임박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