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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막내딸을 시집 보내고 그녀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게 된 어느 날 왕룽은 삼촌에게 말했다. "숙부님 좋은 담배를 드릴까요?" 그는 아편 봉지를 뜯었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났다. 삼촌은 그것을 손에 들고 냄새를 맡더니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거 참, 좋은 것을 가져왔구나. 나도 간혹 피워 본 적은 있지만 너무 비싸서 자주 피우기 어렵구나." "아버지가 나이 드시고서 잠을 이루지 못하시기에 산 것인데 오늘 남은 것이 눈에 띄어 삼촌 생각이 났어요. 저는 아직 피울 나이도 아니고 해서 아저씨에게 드리려고요. 두었다가 편찮으실 때나 생각나실 때 간간이 피우세요." 왕룽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왕룽의 삼촌은 반색하며 빼앗다시피 아편을 받았다. 그는 그 향기에 무한한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곧 담뱃대를 사 가지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피웠다. 왕룽도 그 담뱃대를 여러 개 사서 여기저기 놓아 두었다. 삼촌 가족에게 보이기 위해서 피우는 체만 하고 사실은 입에도 대질 않았다. 또한 두 아들과 렌화에게는 비싼 것이라는 구실로 절대로 손을 못 대게 하면서도 숙부와 숙모, 또 그 아들에게는 권했다. 온 집안이 달콤한 연기 냄새로 가득 찼다. 그러나 왕룽은 아편 값에 쓰이는 은전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아편 덕분에 집안의 평화를 다시 되찾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가고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겨우 바닥이 드러나는 논밭을 둘러보고 다니는 왕룽에게 달려온 장남이 벙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아버지, 머지않아 식구가 하나 늘어납니다. 아버지 손자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룽은 아들을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히 만족한 웃음을 담았다. "그래, 정말 반가운 일이구나." 왕룽은 칭 서방을 성안으로 보내어 생선과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사오게 한 후 며느리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이렇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애도 건강하느니라." 이 봄 내내 왕룽의 마음을 위로한 것은 손자가 태어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다른 일에 바쁠 때도 이 일을 떠올리며 귀찮은 일이 생겼을 때도 앞으로 태어날 손자 생각을 하며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지었고 위로를 받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홍수 때문에 말리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혹은 한 떼, 두 떼로 떼를 지어 기나긴 겨울에 지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집터는 물먹은 황토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 황토 속에서도 그들의 집은 다시 하나 둘 세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지붕을 덮울 거적 같은 것을 사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왕룽을 찾아와서 돈을 빌려갔다. 왕룽은 그에게서 돈을 꾸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자 고리로 빌려 주었다. 담보물은 반드시 토지라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빌린 돈으로 씨앗을 사서 물이 빠진 기름진 땅에 뿌렸다. 소나 쟁기라든가 씨앗이 더 필요하게 되면 그들은 또 왕룽에게 농사에 필요한 돈을 꾸어갔다. 어떤 사람은 농토의 일부를 팔아서 추수할 때까지의 생활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농토들을 왕룽은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들은 돈이 급ㅎ기 때문에 그렇게 헐값으로라도 팔아야 했다. 농토를 팔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딸을 종으로 팔기도 했다. 그 중에는 왕룽이 부자일 뿐더러 세도도 있고 마음씨도 좋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딸을 팔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의 장래와 또 머지 않아서 자꾸 낳을 손자들을 생각한 왕룽은 계집종을 다섯이나 샀다. 그 중의 두 애는 열두살인 데다 몸도 건강했으므로 부엌일을 시켰고 다른 작은 두 애는 집안일을 거들도록 하고 또 한 애는 렌화의 몸종으로 쓰게 했다. 뚜챈이 늙은 데다 막내딸을 시집 보낸 뒤로는 집안 일에 일손이 많이 부족ㅎ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낯선 사람이 일곱 살 난 아주 연약한 계집애를 팔러 왔다. 왕룽은 그 애가 너무 작고 약해 보였으므로 안 사겠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렌화가 그 애를 좋다고 졸라 대는 바람에 흥정을 시작했다. "참 예뻐요. 내가 데리고 있고 싶어요. 지금 애는 밉고 냄새가 나서 싫어요." 왕룽은 어린 계집애를 다시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곱고, 몸이 가냘픈데다 기가 죽어 가엾게 보였다. 왕룽은 렌화의 청도 들어줄 겸, 또 불쌍한 애에게 먹이나 많이 주어 살찌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사도 좋아." 왕룽은 딸을 팔러 온 사내에게 은전 스무 닢을 주었다. 그 애는 렌화가 쓰는 침상 발치에 재우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았다. 왕룽은 자기도 좀 편히 지내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홍수가 빠진 여름이 되어 밭에 씨앗을 뿌리게 되자 왕룽은 그의 논밭을 돌아다니면서 칭 서방과 함께 토지를 살펴보았다. 기름진 땅과 나쁜 땅을 각기 토질에 따라서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다. 그는 밭에 나갈 때는 반드시 막내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막내 아들에게는 농사일을 가르칠 작정으로 어려서부터 견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왕룽은 막내 아들이 농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걷고 항상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룽은 막내 아들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왕룽은 아들이 묵묵히 자기 뒤를 따라오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름 농사 계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만족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나도 늙었으니 평생 들에서 일만 할 게 아니라, 머슴들도 여럿이고 아이들도 있으니까 집에서 편히 지내야겠다.' 그러나 왕룽에게 그런 편한 날이 있을 수 없었다. 며느리도 보았고 집안 일을 거들게 종들도 사다 놓고, 삼촌에게 소원대로 아편을 대주고 있었지만, 그런 하루도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사촌과 장남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장남은 자기 오촌을 악한 사람으로만 여기고 증오심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장남은 소년 시절에 이 아저씨가 얼마나 행실이 나빴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언제나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즈음도 항상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찻집에를 가더라도 오촌이 먼저 나가기 전에는 결코 집을 비우지 않았다. 렌화와의 사이도 한때 의심했으나 그것은 곧 풀어졌다. 렌화는 나이가 많아져서 나날이 몸이 뚱뚱해지고 지금은 먹는 것이나 술밖엔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곁에 오는 남자를 보더라도 그녀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왕룽이 늙어서 자주 곁에 안 오는 것을 오히려 그녀는 좋아하고 있을 정도였다. 왕룽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들에서 돌아오니 장남이 그의 소매를 잡고 한 구석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전, 이 이상 그 자식과는 한집에서 같이 못 지내겠어요. 옷단추도 꿰지 않고 빙빙 돌아다니고 계집종들을 엿보는 꼴을 더 이상은 못보겠어요." 장남은 그의 오촌이 뒤채까지 기웃거린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첩에게 마음이 쏠렸던 지난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계집종 이야기만 했다. 물이 빠지고 날씨가 좋은 데다가 막내 아들이 그의 뒤를 따라온 것이 기뻐서 유쾌한 왕룽은 몸가지 가뿐해진 기분인데 이런 소리를 듣자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너는 밤낮 그따위 소리만 하느냐. 너는 처에게 너무 빠졌어. 그래가지고야 어디 집안 꼴이 되겠느냐. 계집한테 반해도 이만저만 해야지. 사내 자식이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어디에 써 먹겠어." 장남은 이 말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 자기가 보잘것없는 무식한 인간처럼 돼먹지 않은 행동을 한다고 비난받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제 처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일이 우리 집에 있어서는 체면상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룽은 더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생각에 잠시 잠기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우리 집은 밤낮 사내니, 계집이니 하고 귀찮은 일 뿐이냐. 나는 늙어서 지금부터라도 좀 편히 지낼까 했더니, 또 너희들이 못살게 구는구나."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대관절 어쩌란 말이냐?" 장남은 아버지의 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왕룽도 또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장남은 마침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 집을 떠나 성안에 가서 살고 싶어요.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촌뜨기처럼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이 집엔 숙부네 식구들이나 살게 하고 우리들은 성안에 가서 사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아들의 말을 들은 왕룽은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담뱃대를 끌어당기면서 탁자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아들의 말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건 내 집이야." 왕룽은 이렇게 아들을 무시하는 듯이, "네가 이 집에 살건 안 살건 네 자유다. 이 집은 내 집이고 내 땅이야. 이 땅이 아니라면 나는 굶어 죽었을 게고 너도 선비처럼 잘 차려 입고 한가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을 거야. 이 땅이 있기 때문에 너도 이만큼 잘 지낼 수 있는 거야." 왕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일부러 쿵쾅거리면서 가운뎃방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마루에 침을 뱉기도 하는 등 상스러운 농군처럼 굴었다. 그는 장남의 세련된 풍채를 자랑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약함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생각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뒤를 쫓아가면서 끈질기게 말했다. "성안에 황부잣집이 비어 있어요. 바깥 채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안 채는 문을 닫아 놓은 채 그대로 있어요. 거기면 조용하니까 저는 그 집을 빌겠어요. 그 집을 빌려서 살아요. 그곳이라면 평화롭게 살 수 있어요. 아버지와 막내 동생은 논밭을 돌볼 수도 있어요. 저는 미친 개 같은 아저씨가 싫어서 못견디겠어요." 아들은 열심히 아버지를 설득했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마침내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일부러 훔치지 않았다. "저는 결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겠어요. 노름판에도 안가고 아편도 안 피우고 아버지가 정해 주신 여자 외에는 나쁜 곳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어요. 제발 소원이니 이것만은 들어주세요." 왕룽은 눈물 때문에 움직였는지 어쩐지는 자기도 모르지만 아들이 말한 '황부잣집' 이란 말에는 마음이 움직였다. 왕룽은 지난날 그가 겁을 먹고 그 집에 들어갔던 일이며 문지기에까지 모욕당하던 일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수치스런 기억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촌뜨기라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멸시당해 온 것을 언제나 뼈저러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황부잣집 노부인 앞에 섰을 때였다. 그래서 장남이 그 저택에서 살자고 졸랐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번개처럼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노부인이 나를 종처럼 내려다보던 그 높은 의자에 이번에는 내가 앉아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호령할 테다.' 그는 속으로 궁리하다가 또 이렇게 생각했다. '하려고만 하면 못할 것도 없지.' 그는 아들 말에 대꾸는 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말없이 빨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위대함을 상징하는 크나큰 황부잣집 대문안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들이 울음으로 호소한 까닭도 아니고 삼촌이 보기 싫어서도 아닌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룽은 다른 식구들에게 집을 성안으로 옮긴다거나 현재 상태를 바꾸어 보자는 말은 안 했으나 아들의 말을 듣고 나니 삼촌의 아들놈이 한층 더 불쾌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 녀석은 여종들에게 이상한 눈치를 던지는 것이었다. 왕룽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발정한 개 같은 자식과는 같이 살지 못하겠군." 그는 삼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삼촌은 아편을 피우고부터는 놀랄 만큼 몸이 쇠약해지고 살빛이 누렇게 되었으며 허리가 굽은 것이 갑자기 늙은 것 같았다. 기침을 하면 가래에 피가 섞여 나왔다. 숙모는 배추둥지처럼 몸이 굵어지고 아편 물촉을 잠시도 놓지 않고 졸기만 했다. 두 사람은 이제 귀찮게 굴 기력도 없었다. 이렇게 아편은 왕룽이 원하는 대로 제구실을 해 주었다. 그러나 숙부의 아들만은 혈기 왕성하였다.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고 정욕이 끓어올라 야수 같았다. 늙은 노인처럼 아편에 지지도 않고 꿈만으로 정욕을 만족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내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왕룽은 그를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다. 사촌은 아무 할 일도 없는 놈팡이였다. 일 할 필요도 없었고 또 누가 일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밤이면 어디론지 나다녔지만 요즈음은 멀리 떠났던 농민들이 돌아오고 지방의 질서도 회복되어 비적단이 북쪽 산속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밤 출입도 없어졌다. 그는 비적단에 끼여 산속에서 지내기보다는 왕룽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집안의 두통거리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한낮에도 옷을 바로 입지 않고 지껄이거나 하품을 하며 온 집안을 아무 데고 돌아다녔다. 왕룽은 어느 날 성안에 가서 둘째 아들과 의논을 했다. "네 형이 황부잣집 안채를 빌려서 살겠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둘째 아들도 이제는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다른 점원들 모양으로 차림도 말끔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제법 훌륭했다. 그러나 체격만은 그대로 작고 살빛은 누렇고 교활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저도 편리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집이 크니까 제가 장가 들어도 같이 살 수 있고 온 집안 식구가 같이 살 수 있으니까요." 둘째 아들의 성격은 침착했다. 다른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렸던 왕룽은 둘째 아들을 장가 보내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둘째 아들에 대해서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네 결혼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다른 일에 바빠서 여가가 없었다. 그동안 흉년이 들어 잔치할 형편도 못 됐고. 이제 곧 형편이 펴질 테니 빨리 결정하기로 하자." 왕룽은 어디 적당한 혼처가 없는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시다면 저도 장가 가겠습니다. 색시집에 가서 돈을 쓰기보다는 나으니까요. 또 아이도 낳을 게고. 그렇지만 저는 형수 같은 색시는 싫어요. 밤낮 친정 자랑만 하고 눈이 높아서 돈만 헤프게 쓰니까요." 이 말에 왕룽은 깜짝 놀랐다. 그는 맏며느리가 정숙하고 얌전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이런 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말이 일리 있는 말이고 또 돈을 아낀다는 그 마음씨가 한없이 기뻤다. 원래 이 둘째 아들은 체격이 좋은 형 밑에 가려서 자랐으므로 울고 불고 난리를 칠 때가 아니면 별로 눈에 뜨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왕룽도 이 아들에겐 깊은 관심이 없었고 더구나 성안으로 보낸 뒤부터는 거의 잊고 지냈던 것이다. 남들이 간혹 "아들이 몇이오?" 하고 물으면 "셋이오." 하고 대꾸할 때에나 비로소 둘째 아들의 존재를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는 둘째 아들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는 짧게 깎아서 기름으로 잘 다듬고 올이 가는 회색 명주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민첩한 동작이 무슨 비밀이라도 지킬 만큼 믿음직한 장부였다. '음, 내게 이런 자식도 있었던가!' 왕룽은 속으로 대견해 하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어떤 색시가 좋으냐?" 아들은 미리부터 차근차근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농가에서 검소하게 자란 색시가 좋아요. 촌 지주로서 가난한 친척도 없고 지참금은 많을수록 좋구요. 얼굴은 예쁘지도 밉지도 않고 음식 솜씨가 있어 부엌 종이 많아도 능히 감독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쌀을 살 때 한꺼번에 쓸데 없이 많이 사지 않고 옷감을 사도 한 치도 남지 않고 꼭 맞게 사는 여자가 좋아요." 왕룽은 또 한번 놀랐다. 그의 아들이지만 이런 성격의 청년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자기가 젊었을 때도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고 또 장남도 그러했다. 왕룽은 똑똑한 둘째에게 탄복하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런 색시를 구해 보자. 칭 서방을 내세워서 그런 색시를 찾아보자." 호탕하게 웃으며 둘째 아들과 작별을 나눈 왕룽은 황부잣집으로 향했다. 그는 돌 사자가 서있는 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지난날과는 달리 문지기가 없기 때문에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앞뜰은 그가 장남 때문에 갈보를 찾아왔던 그때처럼 추잡했다. 나뭇가지엔 빨래들이 널려 있었고 여기저기에 여자들이 둘러앉아서 조잘거리며 긴 바늘로 신을 꿰매고 있었다. 흙투성이가 된 벌거숭이 아이들이 봉당에 우글우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풍기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 왕룽은 전에 색시가 살던 방을 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을 본 왕룽은 기뻐하며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황부자가 번창하던 시절에는 왕룽도 이들과 같은 신세로 부자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했으나 지금의 그는 광대한 논밭을 가지고 또 수많은 돈을 가졌기 때문에 파리떼처럼 모여 있는 가난뱅이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들이 풍기는 불쾌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리고 숨을 죽이며 그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마치 지난날의 황부잣집 사람처럼 그들을 경멸하고 또 싫어했다. 그는 이 집을 빌리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들어가니 안채 대문은 잠겨 있고 그 곁에 노파 한 사람이 졸고 있었다. 눈여겨보니 노파는 이 집 문지기의 곰보 여편네였다. 왕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날에는 살결이 곱고 중년 여편네였는데 지금은 수척할 대로 수척하고 쪼그라질 대로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은 백발이 되어 누런 덧니가 빠질 듯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 모양이 된 문지기 여편네를 바라보려니 왕룽은 그 순간 그가 아직 젊은 농부로 아들을 안고 여기에 찾아왔던 그때부터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느껴 보지 않았던 그 자신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약간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이 문을 좀 열어 주게." 노파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껌벅거리면서 급히 일어나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이 안채를 전부 쓸 사람이 아니면 열지 말라는 분부인데요." 왕룽은 갑자기 결심한 듯 말했다. "암, 마음에 들면 전부 빌리지." 그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도 말하지 않고 노파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고요했다. 그가 지난날 음식거리를 담은 광주리를 두었던 방은 그대로 남아 있고 황홀하게 단장한 기둥이나 기나긴 복도도 옛 모양 그대로였다. 노파가 인도하는 대로 대청으로 들어가니 그는 이 집의 여종을 아내로 데려와서 여기에 섰던 자신의 처량했던 옛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그때 그 지체 높은 마나님이 은빛 공단옷에 싸여서 여종들의 부축을 받고 앉았던 높은 의자가 단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에 휩싸인 왕룽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가서 노부인이 앉았던 의자에 걸터앉아 손을 그 앞의 탁자 위에다 얹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무얼 하는 것인가 하고 몽롱한 노안을 까뭇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는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던 소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그의 가슴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는 별안간 탁자를 치며 느닷없이 말했다. "좋아, 이 집을 내가 빌리기로 하지."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