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보였네.
집 뒤 대안으로 통하는 문,
그리고 왼쪽에는
도장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하나.
어린 내 눈에는
그 작은 문 하나도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처럼 보였네.
큰방 윗목 왼쪽에는
솜이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자루에 담아둔 고구마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네.
겨울밤이면
그 고구마를 꺼내
아궁이 불에 구워 먹던 기억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있는 듯하네.
도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 작은 공간에
곡식과 종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네.
쌀도 있었고
보리도 있었고
다음 농사를 기다리는 씨앗들도 있었는데.
그 작은 도장은
우리 집의 겨울을 지켜주는
조용한 곳간이었네.
정지문을 열고 나오면
집 가운데쯤
네 평 남짓한 작은 텃밭이 있었네.
크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봄과 여름과 가을을 안겨주던
소중한 밭이었네.
그 곁 아래채에는
재래식 변소와 돼지우리가 있었고,
돼지의 울음소리와
흙냄새, 풀냄새가 섞여
시골집의 하루를 알려주었네.
텃밭 앞을 지나?
대안, 집 뒷마당으로 나가면
옆집 신종균네 집안 뒤에 길게 뻗어 나온
백 년도 넘은 팽나무 한 그루가
우리 집 뒤뜰을 거의 다 덮고 있었네.
넓게 퍼진 가지 사이로
햇살이 조각조각 내려앉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는 듯했네.
나는 그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네.
그때는 몰랐네.
백 년을 살아온 나무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품고 있는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오래된 그 나무는
어쩌면 나보다 먼저
마을의 모든 아이를 보았을 것이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떠나는 모습도
말없이 지켜보았겠지.
대안 난간 가까이 다가가
뒤쪽을 바라보면
마을의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네.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 먹고
빨래도 하던 큰 우물이 있었네.
그 곁에는
길게 누운 작은 연못이 있었고,
옛이야기에 따르면
이성계 장군이 황산벌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지금은 없지만 연못가에 정자가 있었는데.
오래전에 이미 소실 되고 이야기가 전해졌네.
그때 어린 내 눈에는 연못과 어울려 있던
정자의 흔적까지 어린 내 마음에는
그곳이 평범한 연못이 아니라
옛 장수들이 말을 쉬게 하고
풍경을 바라보던
아주 오래된 자리처럼 느껴졌다네.
연못 옆 논은
사람들이 연배 미라 부르던 곳.
논 한 배미,
또 한 배미,
우리 마을 사람들의 땀으로
계절마다 벼가 익어가던 들판이었네.
대안에서 바라보면
멀리 오른쪽으로는 논이 펼쳐지고,
왼쪽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던 사람이
주인이었다는 좋은 집이 있었네.
그 집의 이름도
주인의 이름을 따라
도 재 집이라 불렀지.
경사진 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경 노네 집,
동 길이네 집,
종수네 집이 차례로 있었지.
그리고 논 가운데
곧게 난 길을 따라가면
경 도네 집이 있었네.
그 집 입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던 샘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통 샘 집이라 불렀네.
샘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처럼
마을 사람들의 삶도
그곳에서 이어졌겠지.
통 샘 집을지나
다시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높다란 둑 하나가 나타났네.
그 가운데로
배수로가 길게 흘렀지.
보금산에서 내려온 물이
논과 논 사이를 지나!
마을의 생명을 적셔주던 물길이었네.
그 물길을 따라
박종수네 집이 있었고
조대환네 집도 있었지.
둑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북쪽으로 푹 꺼진 논이 보이고,
그 논을 돌아가면 황의채네 집이 있었지.
그리고 황의채 아버지가 가꾸던
넓은 채소밭이 펼쳐져 있었네.
봄이면 싹이 돋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온갖 채소가 익어가던 밭.
그곳은
한 가족의 밥상을 넘어
마을 사람들의 삶을 키우던
작은 생명의 터전이었네.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의 마을은
길 하나,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 샘 하나,
논 한 배미에도 모두 이름이 있었네.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알고
집의 이름을 알고
논의 이름을 알고
나무와 샘의 이름까지 알고 살았었지.
그곳에는
지도가 없어도 길을 알았고,
주소가 없어도 사람을 찾았으며,
시계가 없어도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하루를 알았네.
나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 풍경을 보며 자랐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수많은 길을 걸어
이제는 먼 곳에서
그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보이지만.
살구나무 집, 백 년 팽나무,
우물과 연못, 연배 미 논,
보금산에서 내려오던 물길,
그리고 그 길을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나.
내 인생의 첫 풍경은
바로 그 마을이었네.
그곳에서 나는
세상을 처음 보았고, 흙의 냄새를 처음 맡았으며
사람의 정을 배웠고
가난 속에서도 살아가는 법을 배웠네.
그래서 아무리 멀리 돌아와도
마음의 길 끝에는 언제나
살구나무 집과 그 집을 둘러싼
나의 작은 고향 마을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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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길
조용히 나를 기다리는 집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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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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