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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양근 성지
양근(楊根)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양근’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었다. 버드나무는 일단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이다. 그래서 남한강 변에 심어진 버드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폭우로 인한 제방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양근이라는 말에서 양제근기(楊提根基)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이 말은 튼튼한 근원, 기초란 의미로 더욱 놀라운 것은 양근이라는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양근 성지의 의미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현재 양평이란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8년 양근군(楊根郡)으로 전입한 지평군(砥平郡)의 평자와 양근군의 양자가 합해져 오늘날의 양평군이 되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이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李檗)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몸소 조과(朝課, 아침기도), 만과(晩課, 저녁기도),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은 신부의 역할을 하며 2년간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그리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양근 성지는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조 베드로는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837년 1월에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근으로 가서 머물며 4주일 동안 조선말을 공부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를 양근으로 불러 그곳에서 함께 부활 축일을 보냈다.
양근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한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양근 성지와 관련 있는 순교 복자는 조용삼(베드로, 1801년 3월 27일 순교, 독신),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1802년 1월 29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802년 1월 30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조숙(베드로)와 권천례(데레사, 1819년 8월 10일 이후 순교, 동정부부)이다.
양근 성지의 중요성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첫째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로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양근 성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사는 권일신이 1785년 봄 명례방(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후 양근 사람 조동섬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다.
2010년에는 순교자 광장에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순교 조형물을 세웠고, 감호암 위에 있었던 정자 감호정과 직암정, 녹암정, 쉼터 등을 광장에 마련하는 등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1년 5월 7일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및 시설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 후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 등을 설치하고, 2013년 5월 23일에는 양근 출신으로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 사형터에서 순교한 권복 프란치스코(권일신의 증손자)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치하였다.
양근 성지는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 운동의 거점이자 복음전파의 출발점이었던 성지의 의미를 살려 소공동체 봉사자 및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의 장이자 선교사들을 위한 훈련도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순교한 곳으로서 참다운 부부애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과 피정에 힘쓰고, 평신도 사도직과 순교자들의 신앙과 행적을 본받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5년 4월 9일)]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1736-1801년)
권일신의 형. 조선 개국공신이며 주자학자인 권근의 15대손으로 집안 대대로 거유가 많이 배출되었다.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제자들이 많았다. 이벽 성조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대상자를 찾다가 가장 먼저 선택한 집안이 권철신의 가문이었으며, 그는 5형제 중 장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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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천주교 전파를 위해 학덕이 높은 학자를 입교시킬 의도로, 1784년 음력 9월 양근의 권철신 형제에게 입교를 권하게 되었으며, 이때 셋째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아들 권철신도 주저하다가 결국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는데, 그는 매사에 조심성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입교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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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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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와 지황 사바(1767-1795년)와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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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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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유한숙(兪汗淑, ?-1801년)과 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년)
대왕대비의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조정의 대신들은 일제히 그동안의 온건책을 버리고 천주교도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잇달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정약종의 심문에 참여하였던 영부사 이병모는 "이들 흉악한 역적의 경우는 남을 죽이는 것보다 그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엄히 심문하여도 한결같이 진술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다"고 하면서 이들을 엄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복자 윤유오 야고보(?-1801년)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윤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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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의 강요에도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복자 윤점혜 아가타(?-1801년)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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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복자 윤운혜 루치아(?-1801년)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 아가타는 그의 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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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조에서 윤운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다. 뒷날 권 세바스티아노는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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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에 이용하였다.”
복자 조숙 베드로(1786-1819년)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후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복자 권천례 데레사(1783-1819년)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3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데레사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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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데레사는 관장이 배교를 권유하자 이렇게 답하였다.
“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 모두, 부모를 배반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실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 하며 권면하였다.
복자 조용삼 베드로(?-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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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1802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사촌(庶四寸) 동생이요, 홍필주 필립보와 이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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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가 재판관들 앞에서 대답한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 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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