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문명의 상징
종교건축으로 꽃핀 문명
고전기 동남아시아는 국가형성기부터 인도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왕권사상, 힌두교와 불교의식, 푸라나신화, 다르마,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등 다섯 가지 문화적 요소를 공통적으로 수용했다.
크메르 문명은 현재 남아 있는 종교건축에서 그 정수를 찾아 볼 수 있다. 앙코르의 유적은 역대의 왕들이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국가사원을 건설하여 힌두교의 지배이념을 건축에 반영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약 100만평이나 될 정도로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크메르 문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힌두교의 사상이 모든 영역에 침투하면서 생활은 물론이고 건축에 그 세계관을 반영시키면서 사원의 구조는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의 중심 산이 메루산을 지상에 그대로 복사해 놓은 형태로 만들었다. 메루산은 성스러움 카일라시산을 신비화시킨 우주의 중심지다. 카일라사산은 실제로 티벳 고원의 표고 6,656m에 불과한 산이지만 힌두교와 불교도들에게는 에베레스트보다도 높은 세계 제일의 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중심축인 메루산이 현실세계에 투영된 것이 카일라사산이다. 힌두교에서 메루산은 그 정상에 인두라신이 거주하는 궁전이 있으며, 불교에서 수미산으로 불리는 메루산은 인드라신 위에 야마신이 거주하고 그 위에 미륵의 수행장이 있다고 여겨지는 성스러운 곳이다.
이와 같이 메루산을 상징하는 사원은 신왕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질서의 창조자인 왕은 비슈누신이 거주하는 중앙신정에 위치한다. 그리고 왕이 있는 중앙신전을 중심으로 회랑, 주벽 환호가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바깥에는 신왕을 존경하는 백성의 순서로 정치적 만다라을 이루고 있다.
둘째
왕은 자신에게 부여된 신왕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재임 중에는 하나 이상의 ‘국가사원’을 건설하는데 몰두했고, 사원은 인도에서 그 정형으로 간주하는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배치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사원은 초기에는 하나의 사원에 하나의 탑을 가진 단순한 구조로 출발하였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복합적인 사원군이 생겨나고 당시 행정계층과는 별도의 기능을 갖는 독립적인 조직으로 유지되었다. 사원은 도시 중앙에 들어서서 정치경제의 중심센터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프레아 칸 사원의 경우 97,840명의 승려와 무희가 속해 있었고, 이 사원 내에 10만명의 농민과 노예들이 거주했으며, 왕도 부근에 60만명이 살았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사원은 도시 그 자체로서의 기능을 했음을 알 수있다.
셋째
크메르 왕의 정통성은 어머니, 누이, 숙모 등 모계의 혈통을 이어받는데서 나온다. 인도의 승려 카운딘야가 달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소마’라는 크메르 여인과 결혼을 통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신화, 피메아나카스의 탑에서 국왕이 뱀 왕의 딸과 매일 밤 만났다는 신화는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모계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음을 암시하는 한편 크메르의 주권과 토착신앙에 인도의 종교가 이식되었음을 뜻한다.
소마는 달을 토템으로 숭배했던 부족이며, 물과 유연성, 비옥한 자연, 다산을 상징하는데, 달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부족이며, 달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여인과 결혼해야만 왕으로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소마 숭배는 후에 가서 ‘시바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이마에 초승달을 달고 있는 시바신은 토착신앙과 결합하여 숭배되었고 크메르 왕들은 국가사원에 자신의 링가를 세워 스스로를 신의 화신으로 내세웠다.
또한 국왕이 뱀 왕의 딸과 매일 밤 함께 지냈다는 설화는 여성에 의해서 국가의 토지 권력구조가 지탱되는 모계사회의 원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며, 앙코르 왕들이 후에 모계 쪽의 혈통을 강조하고 사원을 지어 어머니에게 바친 것도 이런 사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넷째
건축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지만 동서 방향으로는 약간 길게, 남북 방향으로는 그보다 약간 짧은 장방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비율은 대략 1.1~1.3:1을 이루고 있다.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의 성벽, 바이욘 사원이나 타프롬 사원과 같이 대다수 사원의 축조규모를 보면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난다.
다섯째
크메르인들은 목조에서 석조건축으로 이동하면서 내구성이 강하고 넓은 공간을 가진 사원을 짓기 위해서 흙을 구워서 만든 연와, 사암, 그리고 라테라이트로 불리는 홍토석과 같은 재료를 사용했다.
여섯째
앙코르의 유적은 웅대한 건축미를 과시하면서 각 부분의 구석구석까지 우아하고 섬세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장식의 모티브는 초기에는 꽃, 나뭇잎, 당초무늬와 같은 형태였으나 점차 양식화되어 주로 탑문, 회랑에<라마야나>,<마하바라타>와 같은 대서사시로부터 발췌한 주제를 부조해 놓았다.
앙코를 왕조가 존립했던 시기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보면 중세기에 위치하지만 크메르 건축상의 특징인 그 거대성, 종교중심의 건축, 종교사상에 얽매인 형식 등으로 볼 때 고대건축의 범주에 속한다.
13세기 이후부터 원나라의 동남아시아 원정, 해양에 물밀 듯이 밀려든 이슬람의 유입, 내륙으로 밀려든 소승불교, 바다가스코마의 인도대륙 발견 등과 같이 새로운 역사으 ㅣ흐름이 전개되어 중세기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역사적 선회’가 일어난다.
이런 가운데 앙코르왕조는 참파국과 아유타야왕국으로부터 협공을 받으면서 국력이 급속도로 약해지기 시작하여 결국 구질서 속에 같혀서 역사적인 운명을 다하게 된다.
13세기 타이족의 성장에 비례하여 앙코르왕조의 국력은 후퇴하기 시작한다. 앙코르 와트 회랑에 ‘시암 쿡’이라는 야만족으로 묘사되었던 타이족이 1238년 서쪽 변방인 챠오프라야 강변에서 독자적인 수코타이왕국을 세운다. 타이족의 독립은 점령지에서 충원되던 제국에 인적, 재정적 손실을 가져왔다. 그리고 1351년경 그 뒤를 이어 들어선 아유타야왕국이 말레이 반도까지 영토을 확장하는 대국가로 성장한 후에 1431년 앙코르 왕도를 공격하여 찬란했던 앙코르 문명에 종말을 가져왔다.
아유타야왕국은 앙코르 제국을 8개월이나 점령하여 주변의 수리시설을 파괴하고 많은 포로와 서적,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그 이후 앙코르왕조는 도성을 포기하고 바산, 로백을 거쳐 프놈펜에 왕도를 옮겨서 명맥을 유지해 갔다. 이처럼 신세계의 변화 한 가운데서 구질서의 지배자였던 앙코르왕조는 역사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캄보디아는 프놈펜을 비롯한 남부는 베트남에, 시엠렙의 북부지역은 태국에 병합되어 속국으로 전락하였으며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이 수립될 때까지 앙코르 와트 또한 태국에 편입되어 소승불교들의 도장으로 변하였다.
정치와 힌두 세계관의 결합, ‘데바라자’사상
국가를 세우면서 중요한 과제는 국민을 하나의 신념으로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통치자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념을 필요로 했고, 초기에는 그 역할을 힌두교가 담당했다. 크메르인들은 힌두교를 기초로 정치적, 문화적 통합을 달성하였으며, 왕은 이를 통해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립해 나갔다.
고승들은 왕의 통치철학을 완성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자야바르만 2세는 802년 ‘왕중의 왕’, ‘세계의 군주 챠크라바르틴’이라는 칭호를 갖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바라문승려에게 지시하여 종주국이었던 자바에 대한 부정의식을 거행하고 통치철학인 데바라자 사상을 완성하도록 했다.
‘챠크라’는 비슈누신의 무기인 수레바퀴를 가리킨다. 수레바퀴는 도덕, 다르마, 법 , 질서를 지배하는 신의 상징이다. 무기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법륜으로 사람들을 통치하는 자가 곧 챠크라바르틴이다. 붓다의 상징 또한 법륜이다. 마찬가지로 왕이 황금으로 된 수레바퀴를 동서남북으로 굴리면 제후들이 타와서 복종하며 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천하를 바르게 통치할 수 있다. 그러한 존재가 챠크라바르틴이다.
이 챠크라바르틴은 다른 말로 데바라자라고 하며, 한자문화권에서는 전륜성왕이라 불린다. 데바는 ‘신’을,라자 는 ‘왕’을 뜻하므로 데바라자는 곧 ‘신인동시에 왕’이다. 국내적으로는 크메르 전 국토을 수호하는 왕중의 왕으로서, 대외적으로 자바에 대해서는 독립을 선언하며 침략을 막아 방어하는 신비적인 힘을 가진 신의 화신으로 내세웠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데바라자’사상으로 불린다.
데바라자는 인도의 사원에 안치된 800여 신 가운데 맨 위에 모셔진 최고의 신, 혹은 ‘신들의 왕’이란의미로서 원래를 시바신을 지칭했던데서 유래한다.
‘신들의 왕’이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왕’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왕권을 종교적으로 상징화하고, 세습화 해 나가는 통치철학으로서 유용한 것이었으며, ‘바 프놈’에서 발견된 <와트 삼론 비문>에 의하면 ‘왕은 정벌뿐만 아니라 위대한 창업자로서 외국의 침입을 극복할 수 있는 두려운 주술과 신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서 후세에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왕은 바라문 승려를 시켜 자바 부정의식, 신왕의식을 거행하고 통일국가의 왕으로서 위엄을 세우고자 했다. 이처럼 왕이 ‘정의를 갖고 세계를 통치하는 성왕’임을 내세우기 위해서 성스러운 언덕에 사원을 만들고 봉양의무도 충실히 이행했다. 국가사원에서 발견된 비문에 의하면 이 시대부터 왕을 신과 동일시하는 신왕사상이 자리잡게 되었고, 역대 왕들은 형태를 달리하여 데바라자 의식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와 같이 국가 종교로서 신왕사상를 확립하여 국민들에게 전파할 수 있었던 사상적 뿌리는 크메르의 국가형성기부터 인도에서 유입된 힌두교의 경전인 <하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 두고 있다 고전기 앙코르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힌두 서사시와 고전기 동남아시아
힌두신화에 의하면 세계가 악마들에 의해 파괴되고 인간이 타락해 질 때 신들의 왕 비슈누신이 세상의 구원자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다. 탐욕과 부정, 타락과 집착으로 도덕률이 사라지고 투쟁과 죽음이 만연하는 우주의 마지막 주기에서 최고신의 회신으로 태어난 영웅들은 신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인간세계의 도덕률을 재확립한다.
<마하바라타>,<라마야나> 그리고 고담집이라 불리는 <푸라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왕권을 인계받거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왕이 새로이 등득할 때마다 대관식을 거행하고 국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전범, 그리고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사상적 뿌리는 모두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서 찾았으며,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앙코르 와트의 회랑 벽면에 장식된 부조다.
정법왕, 다르마라자
세계의 중심, 왕 중의 왕이 지켜야 하는 것이 ‘다르마’다. 다르마는 ‘지탱하다,유지하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하며 달마, 다라니도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다르마는 종교, 진리, 법칙, 생활규범, 윤리, 의무, 제도, 도덕률, 정의 법 등 수많은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야마신의 별명도 다르마다.
모든 다르마는 ‘왕의 다르마’에 의존하며, 모든 것은 왕을 중심으로 수렴되고 군주의 인격은 왕국의 인격과 결부되어 있다. 즉 ‘모든 사람은 라자다르마를 머리에 이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왕은 다르마를 달성하기 위하여 정의와 법의 기능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서 타인의 다르마를 보호하며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처럼 다르마에 충실한 왕이 공정한 왕이다. 다르마에 의한 통치는 왕의 도덕적인 의사를 정확히 반영하여 국가를 통치하기 때문에 다르마라지는 곧 정법왕이다.
다르마라지는 비록 인간으로서 정의와 도덕을 갖는 왕이지만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지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왕=신’의 성격을 갖는다. 비슈누신은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신으로 다르마가 위기에 처하자 10개의 화신으로 지상에 내려온다. 물고기 마씨야, 거북이 쿠르마, 야생 멧돼지 바하라, 사자인간 나라싱하, 난장이 바마나, 도끼를 든 파라수라마, 라마왕자, 크리슈나, 붓다, 말 칼킨으로 변하여 인간세상에 등장하여 지상에 도덕, 진리와 질서를 세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라마야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는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 보다 더 방대한 고전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라마왕자와 시타왕비는 완전한 인간의 모델이며 중세유럽의 시대정신을 단테가 <신곡>으로 표현한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정의에 대한 힌두교적 정신을 담고 있다.
<마하바라타>에서 사촌간인 유디스티라와 두료다나가 정의와 악의 상징이라면 아르쥬나와 카르나는 양대 세력의 중심인물이다. 이들은 일리아드의 아킬레스오 헥토르와 같은 라이벌로 시종일관 정의와 악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다. 아울러 도덕과 정의를 추구하며 무한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크리슈나는 서양의 율리시즈로 평가된다.
<라마야나>의 중심 무대인 코살라 왕국은 아리안족이 세운 국가로 기원전 460년에 마가다 왕국에 흡수되었으며, 6세기 경에는 불교개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곳이다. 인근의 비데하왕국의 수도 미틸라 또한 석가모니 시대의 중심도시였다.
발미키가 쓴 <라마야나>는 24,000송의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전 일곱편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각 권마다 주제가 붙어 있다. 원본은 현재의 1/4정도 였으며, 제 1편과 제 7편은 이야기꾼들에 의해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 한다.
<라마아냐>
제1편 발라칸다
모든 신들이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비슈누신의 화신, 라마의 탄생을 기다린다.
코살라 왕국의 라마왕자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성자를 따라서 고행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라마는 마법과 신의 무기를 전수받고, 현재 인도와 네팔국경에 있던 비데하왕국의 시타공주와 결혼한다.
제 2편 아요드야칸다
아요드야왕국에 관한 얘기다.
다사라타왕이 둘째 왕비 ‘카케이’의 간청으로 그의 아들 ‘바라타’에게 국왕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라마왕자는 부친을 위해서 부인 시타, 동생 락슈마나와 함계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숲으로 들어가 14년간의 고행을 시작한다.
제 3편 아라야칸다
숲 속에서 라마왕자가 겪는 시련의 이야기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악마의 왕 라바나가 숲 속으로 진격해 들어가 시타왕비를 납치하여 랑카에 유폐시킨다. 한편, 라마왕자는 숲 속을 수색하다가 은둔자 ‘사바리’를 만나서 한 때 원숭이 왕국의 왕이었으나 형에 의해 추방된 ‘수그리바’와 그의 충성스런 신하 하누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제4편 키슈키다칸다
원숭이의 성채 ‘키슈킨다’를 무대로 전개된다. 라마왕자는 처지가 비슷한 원숭이 왕 수그리바를 만나 형 ‘발리’가 자신을 몰아 낸 왕권투쟁에 관한 내용을 듣고 두 인물의 협력관계가 이뤄진다. 라마는 원숭이 왕국의 찬탈자 ‘발리’를 쏘아 죽이고, 수그리바는 시타왕비를 구출하기 위하여 랑카섬으로 출발하면서 키슈킨다는 끝난다.
제5편 순다라칸다
랑카섬에서 영웅 하누만의 모험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된다. 하누만은 라바나의 왕궁을 파괴하다가 라바나의 아들 인드라지트에게 잡혀 꼬리에 불을 붙이는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하누만은 링카섬을 날아다니며 꼬리에 붙은 불을 집집마다 옮겨놓아 모든 것을 태우고 키슈킨다로 귀환한다.
제6편 유다칸다
라마왕자와 원숭이의 왕 수그리바가 이끄는 원숭이 군단이 랑카섬에 상륙하여 3일간의 전투끝에 라바나을 활로 쏘아 죽이고 시타왕비를 구출해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시타의 정절을 의심하는 수군거림이 읽 라마도 시타를 차갑게 대한다. 그녀는 순결을 증명하려고 불어 뛰어들었으나 불의 신 아그니가 구출하여 정죄해 준다. 라마왕자는 정숙함을 인정받은 아내 시타와 귀국하여 그 동안 이루지 못했던 대관식을 갖게 된다.
제7편 우타라칸다
라바나와 하누만에 관한 이력, 마하바라타와 중복된 영웅 이야기, 그리고 라마왕자가 세상에서 은퇴하는 이야기가 혼합되어 있다. 시타왕비는 두 아들을 낳고 대지의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슬픔으로 뒤덮인 라마는 다르마의 길을 성실히 이행하다가 죽어서 비슈누신으로 환생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마하바라타
<마하바라타>는 기원전 10세기 ‘바라타족’과 ‘판두족’간에 벌어진 전쟁야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완성된 것은 대략 기원전 5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마하바라타는 바라타 족의 사촌간인 판다바 형제의 7사단과 카우라바 형제의 11사단 등 18사단이 쿠루평원에서 18일간 벌이는 전쟁속에서 수많은 고담과 지혜가 전체 18권 10만송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가운데 대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아르쥬나가 비슈누신의 화신인 크리슈나에게 삶의 의마를 질문하고 자기실현의 길, 요가와 해탈, 헌신에 대답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제 6권 ‘바가바드기타’다.
바라타족의 왕위는 큰 아들 드리타라슈트라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동생 ‘판두’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판두왕이 숲 속에서 저주를 받고 죽자 장님인 형이 임시로 왕위에 올랐다.
갈등의 씨앗은 이들의 자식이 장성하면서부터. 드리타라슈트라에게는 장남 두료다나, 차남 두샤샤나를 비롯하여 10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을 통칭하여‘카우라바’형제로 부른다. 반면 판두왕에게는 두 명의 왕비로부터 유디스티라, 비마, 아르쥬나, 쌍둥이인 나쿨라와 사하데바 등 5형제를 두었다. 이들을 ‘판다바’형제로 부른다.
장남 유티스티라는 야마신의 은혜로 태어났고, 차남 비마는 바람의 신 바유의 은혜로, 3남 아르쥬나는 인드라신의 은혜를 받아 태어나 학문과 무예, 도덕률에서 카우라바 형제들을 압도했다.
카우바라의 장남 ‘두료다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판다바 형제 때문에 왕위 상속에 위협을 느끼자 주사위 게임을 벌인다. 게임에서 진 자는 13년간 숲 속 망명을 해야 한다는 것. 결국 승자가 된 두료다나는 사촌들에게 분할해 준 왕국을 몰수하고 추방한다.
13년간의 숲 속 망명을 마치고 돌아온 유디스티라에게 두료다나는 왕국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유디스티라는 산촌과 왕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여 비슈누신의 화신인 크리슈나의 도움을 받아 18일간의 전투 끝에 카우라바 형제와 그 추종자를 모조리 죽이고 다르마라자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러나 가족과 친족을 잃은 승리는 패배만도 못한 것, 그는 손자를 왕으로 앉히고 히말라야로 순례를 떠난다. 히말라야 산의 천계에 오르면서 동생들과 왕비가 차례로 죽어가고 천계에 도착한 뜻하지 않게 자신의 형제와 왕비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본 유디스타라는 형제들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
물론 이것은 유디스타라를 시험한 것일 뿐, 그는 야마신의 도움으로 천계에서 육신을 벗고 신이 되었다. 그제서야 진실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마하바라타의 전반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 카우라바군과 판다바군의 설전과 비난이 오가고, 심판관 신들이지켜보는 가운데 18일간의 전쟁으로 카우라바군이 대학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사시에서의 전쟁은 하나의 스포츠 게임과 같은 인상을 준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설전과 비난 메시지가 교환되고, 양측의 총사령관이 만나 전쟁의 룰을 정한다. 전투는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며, 전투가 중단된 저녁에는 술 마시고 양쪽을 오가기도 하는 등 하나의 유희와도 같다.
전투규칙은 마치 장기처럼 4군이 같은 조건으로 싸우는 것이다. 코끼리부대는 코끼리부대끼리, 보병은 보병끼리, 기마병은 기마병끼리, 전차부대는 전차부대끼리 같은 조건에서 우며 반칙은 허용되지 않는다. 1대 1 싸움에서 제 3자가 공격할 수 없으며 군수품을 지원하는 비전투요원은 공격할 수 없다.
샤쿠나와 유디스키라의 주사위 게임에서 알 수 있듯이 4군이 같은 조건으로 싸우는 상징물은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 모형으로 만든 고대인도의 장기다. 인도의 장기는 알렉산더대왕 이후 동서양으로 이식되어 서양의 체스, 동남아시아의 장기로 발전했듯이 신화가 만들어낸 고전사회의 시뮬레이션 게임이자 규칙이었다. 전쟁이 룰을 정하고 심판하는 것은 최고의 신이다.
그러나 신, 그 이념을 공유하지 않은 집단간의 전투는 그야말로 대학살을 가져온다. 인도의 델리 평원엣 전개된 18일간의 대전투 이후에 전쟁은 스포츠 정신을 상실했다. 그것이 1975년 크메르의 내전으로 170만 명이 학살되 킬링필드에서 재현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현대에서도 신념을 공유하지 않은 집단간의 대학살은 800년 전의 앙코르 와트에서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크메르 루즈군이 양민을 손에 묶고 수갑의 일종인 가쇄을 채워 형벌을 가했던 킬링필드의 비극이 앙코르와트 회랑에 부조된 지옥의 장면과 무엇이 다른가?
1970년 3월 우파의 론놀 수상은 외유 중인 시아누크 원수를 해임하는 쿠테타를 단행하고 대통령에 올랐다. 이 때부터 론놀의 정부군과 크메르 루즈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어 앙코르왕조의 무대였던 시엠렙이 1973년 크메르 루즈군에 장악당하고 전쟁터로 변했다. 크메르 루즈는 1975년 론놀을 축출하고 이듬해에 민주캄푸치아를 세운 다음에 1977년에는 베트남을 침공하여 과거 앙코르왕조가 참파국, 대월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처럼 구원의 역사를 재연했다.
노르돔 시아누크 바르만 국왕은 1797년 크메르 루즈군으로부터 탈출하여 북경, 북한과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귀국하여 1993년 새로운 헌법에 따라 입헌군주게의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크메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복귀하였다. 그는 자야바르만 7세가 대승불교를 통해 국가쇄신을 추진했던 것처럼 불교사회주의 이념을 택하면서 현대의 전륜성왕으로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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