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교실에 한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들이닥쳤다. 소녀는 교실에 서 있는 학생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고 곧장 책을 정리하고 있는 덥수룩한 적갈색 머리의 여학생에게 걸어가서는 뺨을 후려 갈겼다.
“넌 비겁해. 넌 위선자야. 너 같은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죽어버려!”
“으아악!”
“뭐, 뭐야! 도둑이야! 불이야! 바퀴벌레야!”
예린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는 내 옆에서 함께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녀는 도토리를 가지고 도망치는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불을 꽉 잡고 사방을 두리번댔다.
“도둑은? 불은? 바퀴벌레는?”
땀에 젖은 이마를 짚고는 예린을 바라봤다.
“도둑도, 불도, 바퀴벌레도 없어. 아, 바퀴벌레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말에 예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눕는다. 아마 이 녀석에게는 저 세 가지가 인생에 있어 제일 무서운 것 인 듯하다.
“비명의 3요소가 없는데도 비명을 질렀단 말이야? 바보. 너 때문에 엄청 놀랐다고!”
“바보는 너야, 바보야. 잠귀도 밝지.”
밑에서 자는 녀석들은 잘만 자는구만, 저 혼자 깨고 난리야. 예린이 잠드는 것을 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웬일로 컬러로 된 꿈을 다 꾸었지, 애써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이제 11월 달인데도 새벽공기가 그다지 차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로 가는데 발에 무언가 물컹거리며 밟힌다. 유나였다. 이 녀석, 또 나와서 자네. 슬그머니 웃으며 발로 마구 차줬다. 어차피 술에 만취해서 잠들었으니 내일 오후가 되어야 일어날 거야. 인상을 구기며 뒹구는 유나를 보며 킥킥대다가 문득 아주 잠시간 머릿속에 펼쳐졌던 꿈이 생각났다.
나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구였더라… 미간을 모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가 이내 벽에서 등을 떼었다. 꿈은 꿈일뿐이야. 점차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랬다.
“윤혜야. 너 오늘 과외 있어?”
두시에 늦은 점심을 먹으며 소영이 묻는다.
“과외? 이번 주에는 밀린거 없으니까… 없어. 왜?”
“바보야, 오늘 수요일이잖아. 머리하러 가자는 거지 뭐.”
예린이 밥솥에서 밥을 뜨며 말했다. 예린이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화장실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나오던 유나가 잽싸게 달려오며 소리친다.
“김예린, 앉지 마!”
모두의 시선이 유나에게 쏠렸다.
“왜?”
예린이 유나의 말을 무시한 채 앉으려 하자 무슨 일인지 다급해 보이는 유나가 빽 외쳤다.
“바퀴벌레다!”
“꺄악! 어디!”
밥그릇을 내던지며 경기 하는 예린을 끌어내며 유나가 크게 웃는다.
“푸하하, 자리 Get!”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나와 소영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유나를 쳐다봤고, 예린은 새빨개진 얼굴로 유나의 목을 조르며 애타게 자신의 잃어버린 자리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우리가 단체 동거하는 이 집의 식탁은 의자가 세 개뿐이라서 한 명은 부득이하게 내려가 혼자 쓸쓸히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늘 늦게 일어나던 유나가 그 쓸쓸한 자리의 주인이었지만 오늘은 어리벙한 예린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모양인 듯 싶다.
“그래서, 머리하러 가자고?”
“응. 머리 좀 짧게 치려고.”
“더 짧았다간 중학생처럼 될 걸?”
내가 귀 밑에서 손을 움직여 보이자 소영이 웃는다.
“그렇게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르려는 거야.”
“그래? 그럼 나는 염색이나 해야겠다. 요 전에 시영선배가 블루블랙 하고 왔는데, 예쁘더라.”
우리는 둘의 투닥거리는 싸움에 등을 돌린 채 느긋하게 오늘은 어떤 머리스타일을 할까 고민했다. 흔치 않은 일도 아니고 저러다가 우리가 자리를 비키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이좋게 앉아 밥을 먹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네는 안 가?”
내 말에 누워서 만화책을 보던 유나와 예린이 동시에 손을 흔든다. 저럴 때만 무지 잘 통한단 말이야, 바보들.
“정윤혜, 빨리 나와.”
“아, 으응. 그럼 간다.”
“맞다, 윤혜야! 부탁할게 있어.”
막 현관문을 열며 나서는데 유나가 자못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날 불러 세웠다.
“뭐?”
“오면서… 감자칩 좀 사와라!”
“바보.”
나는 혀를 내밀며 문을 닫았다. 저러다가 나무늘보로 퇴화해 버려도 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도중 소영이 갑자기 핸드폰을 두고 왔다며 올라갔다 오겠다는 통에 나는 혼자 미용실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야, 윤혜씨. 이번 주도 푸들머리?”
미용실 문을 딸랑이며 들어가자 원장이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아뇨, 오늘은 염색만 하려구요.”
“알겠어, 그럼 저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오늘은 손님이 좀 많네, 호호.”
원장의 웃음을 뒤로하고 잡지가 잔뜩 꽂혀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던 나는 숨이 막혀오고 있음을 느꼈다. 뭐, 뭐지? 순간적인 오한에 고개를 번쩍 들어 쳐다보니,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날카롭게 생긴 미인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바라봤다기 보단 노려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얼굴이었지만). 그 눈길만 느낀 것이었다면 나 또한 눈을 흘겨주고 가만히 앉아 느긋하게 순서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 분명 어디선가 봤다. 어디서였지, 어디서… 열심히 기억의 조각을 짜 맞추던 나는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일어섰다.
“윤혜씨, 이제 좀 있으면 머리 할 수 있는데.”
“죄송해요,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다음에 올게요.”
현기증을 느끼며 급하게 문을 열던 나는 마침 들어오던 소영이와 부딪쳤다.
“야, 너 어디가?”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가 아니고, 너 잠시만 이리 와봐.”
나는 미용실에서 있었던 그 짧은 순간에 내가 느낀 감정과 복잡한 심정 등을 모두 소영이에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 여자를 꿈에서 봤다고?”
“응. 그게, 지금 모습이 아니고, 학생 때 모습이었는데 그 여자랑 완전 똑같이 생겼어.”
소영이는 못 믿겠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한번 보고 와도 괜찮겠어?”
“얼마든지. 하지만 난 안 갈래.”
“왜, 네가 보고서 나한테 누군지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그, 그렇지만 뭔가 꺼림직해서…”
“그까짓 꿈 가지고 뭘 그러냐. 가보자.”
결국 소영의 재촉에 못 이겨 다시 미용실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잡지가 꽂혀있는 소파를 훑어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미용실에선 아무도 안 나온 것 같았는데, 머리하고 있나?
“어머, 윤혜씨. 볼일은 다 봤어?”
한참을 멍하니 두리번대는데, 원장이 나를 돌아보더니 눈웃음을 짓는다.
“아, 아하하. 그게, 네. 다 봤어요.”
“그래, 그럼 소영씨는 여기서 하고, 윤혜씨는 저기, 창가 쪽에 앉아서 기다려줘.”
소영이 ‘뭐야, 없어?’라며 해 보이는 제스처에 난 그저 입만 벙긋거리며 원장에 의해 창가 쪽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 귀신이라도 되는거야? 왜 없어지고 난리야? 미용실이 좀 넓긴 하지만 거울에 얼굴이 비치기 때문에 한 눈에 모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에, 창가에 앉아서 혹시 놓친 얼굴이 있나, 다시 돌아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작스레 옆쪽에서 들리는 싸늘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타고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너 혹시. 정지혜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아니, 머리카락 뿐 아니라 온 몸에 있는 털들이 즉각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가웠기 때문도, 갑작스레 오싹한 숨결과 함께 내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도,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토록 내가 겁에 질리는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그 사건 이전의 내 본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혹시. 정지혜냐?”
제기랄. 입이 굳어버렸다. 입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아마도 지금의 내 표정을 공포영화 감독이 본다면 날 주연급으로 내세울 것이 틀림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동자와 함께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내 입이 그만 모든 상식과 개념을 무시한 채 단독으로 그 무서운 여자와 맞서고야 말았다.
“아닌데요.”
마른 침이 넘어간다. ‘아닌데요’ 라니, ‘아닌데요’ 라니! 좀 더 좋고 그럴 듯 한 말을 내뱉었어야만 했는데!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목 언저리를 스쳐가는 것을 느끼며 기계적으로 바로 앉았다. 이 여자, 여태까지의 분위기로 봐선 내 목을 조르며 ‘정지혜 맞잖아’이럴 것만 같은데…
“아니에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체 못하며 조심스럽게 거울 너머 비치는 지독한 흑발의 그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다정한 목소리가 거울 속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갑자기 웬 높임말? 하지만 나로선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여자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무언가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오오라가 발산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 과거를 알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나는 와하하 웃어 재꼈다.
“네, 제 이름은 정윤혜 인걸요.”
나는 겨울에서 봄이 오는 그 순간의 안락함 같은 것을 느끼며 푸근하게 의자에 기대었다. 한 숨 돌리자 괜히 이 여자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네요. 너무 닮으셔서 그만.”
“아녜요. 사실 저도 가끔 사람들이 저더러 정지혜라고 부를 때면 늘 대답을 해버리곤 한답니다. 많이들 그 이름으로 착각하곤 해요. 하하하…”
내뱉어놓고 아차 하는 나였다. 긴장을 풀었더니 말이 헛 나오기 시작했나보다. 저 이름 바꿨습니다요, 라고 광고라도 해준 셈이었으니… 나비가 날아다니는 느긋한 봄바람에 황사가 불어 닥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성과 끝자가 같네요. 착.각.하.실.수.도.있.으.시.겠.어.요.”
각별히 문장에 악센트를 넣어 발음해준 그녀는, 갑작스럽게 내 이름을 한자로 써달라며 앞에 놓여있는 휴지와 볼펜을 건넸다. 무신경하게 들리는 ‘죄송하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난감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자로 써달라는 것으로 보아 내 본명의 한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말인데… 이대로 내 이름을 그대로 써준다면 봉변을 당할 것만 같았다. 손을 떨며 눈동자를 굴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실소를 내뱉는다. 이미 다 알아챘으니 쓸데없이 버둥거리지 말라는 것처럼. 헐떡거리던 나는 한숨과 함께 볼펜을 내려놓았다.
“아, 이런. 갑자기 물어보니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런데 제 이름은 왜…?”
나와 부들거리는 손을 함께 쳐다보던 그녀가 눈을 내리 깔며 고개를 젓고는 여성잡지로 눈을 돌렸다. 그게 다였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초조하게 그녀를 훔쳐봤다. 정지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스르르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희는 풍문여고 신문부원인 있는 김예린, 김민서, 이유나 라고 합니다. 우리 교실 분위기가 너무 썰렁하죠? 그래서 오늘 아침은 저희가 특.별.히! 분위기를 좀 업 시켜볼까 하고 질문을 할 겁니다. 자아, 이제 돌아가면서 하나의 정해진 질문을 할 건데요, 대답 안 하는 사람은 엉덩이로 이름을 쓰는 벌칙을 받게 됩니다!”
민서가 캠코더를 들고는 한명, 한명 얼굴에 들이밀었고, 다들 즐겁게 질문에 응했다.
“아침부터 뭔 지랄이래. 쟤네는 피곤하지도 않나봐.”
새우깡 봉지를 뜯으며 소영이 다가왔다.
“왜, 애들은 좋아하는데?”
“원맨쇼도 이제 대중화가 된 거지.”
우리가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민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런 불손분자들! 아침부터 신성한 교실에서 과자를 먹고 있다니! 자, 이 가여운 어린 양들에게도 우리의 질문은 어김없이 찾아갑니다. 대답해주세요!”
“질문이 뭔데?”
새우깡을 우물거리던 내가 종이를 뭉쳐 만든 마이크를 들고 온갖 수선을 다 떨고 있는 민서를 보며 물었다.
“세-상에! 질문조차 모르다니, 너네는 벌칙이야!”
어느 새 새우깡을 한 움큼 집어가 우물거리던 예린이 나에게 검지를 들이밀며 외쳤고, 그와 동시에 반 분위기가 엉덩이로 이름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평소 조숙하던 애들마저 나의 애절한 눈빛을 무시한 채 팔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그런 게 어딨…”
“엉덩이로 이름 쓰기 말고 댄스는 안 될까, 신문부 어린이들?”
발끈하는 나를 손으로 제지하고 나서는 소영이 뜬금없이 댄스를 제의했다.
“댄스는 더 좋지! 여러분, 동의 합니까?”
물론 반 애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동의했음은 말 할 필요도 없겠으리라 생각한다. 모두가 하나같이 “강소영! 강소영!” 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고, 그 환호성에 화답하듯 소영은 멋들어진 웨이브를 선사했다.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가 된 교실에서, 춤이라면 게다리 춤 밖에 모르는 나는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왔다. 점차 시끄러운 소리가 멀어져 갈 즈음, 나는 복도에 나와 있는 한 쌍의 커플을 보았다.
오늘 아침은 선생이고 학생이고 다 미쳤나봐. 이렇게 단속을 안 하니 다들 춤추고 연애질이지. 사실 풍문고등학교는 여고가 아닌 번듯한 남녀 공학이다. 단지 여자건물과 남자건물이 따로 떨어져있을 뿐. 그래서 틈만 나면 공유하는 복도에서 연애질이 빈번히 일어난다. 쨌던, 나의 애인 없는 서러움은 그들에 대한 질투로 바뀌었다. 후후후, 너희들의 오붓한 시간을 망쳐주겠다! 둘 다 체육복을 걸쳐서 누가 여자인진 구분이 안 갔지만 조용히 키스하고 있는 그 때에 다가가 친구로 착각한 척 등을 때리고 태연하게 이무 이름이나 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왕소심한 나는 머릿속으로만 그 유쾌한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혼자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대며 그 커플들 옆을 지나치던 나는 순간적으로 강한 충동이 들었다.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느라 누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니. 물론, 지금은 명색이 아침자습 시간이니 학생이건 선생이건 돌아다닐 위험이 없다고 간주해버린 까닭도 있겠지만. 장난을 쳐보고 싶다는 엄청난 충동을 이기지 못 한 나는 상대를 벽에 밀착시키고 서 있는 녀석의 등을 아주아주 세게 때렸다.
“야, 황지숙, 뭐하냐!”
싱글싱글 웃으며 결과를 기대하던 나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내가 겁 없이 등을 갈긴 상대는 여자건물에서 제일 인기 많던 3학년 선배였고, 벽에 붙어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녀석은… 나와 같은 1학년의 음침해서 스스로가 그룹에서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는 일명 ‘자따’로 불리우는 임가영이었다. 둘, 둘다 여자네? 나는 그 험악한 분위기에 덜컥 겁을 먹어 죄송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내뱉었지만 선배는 무섭도록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정… 지혜.”
선배는 차가운 눈을 내리깔고는 내 명찰을 읽었고, 그 차가운 눈빛에 짓눌려 겁에 질려버린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교실로 달려갔다.
“윤혜씨, 너무 기다리게 했지? 색이라도 고르고 있지 그랬어~”
갑작스러운 원장의 출현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휘둘렀다.
“아, 색은 정했어요. 블루블랙으로 해주세요.”
“어떤 종류로?”
“종류가 또 있어요?”
“몰랐구나? 기다려봐, 표본 가져다줄게.”
원장의 종종걸음을 지켜보다가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 그 뒤론 어떻게 되었더라. 그녀들이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진 것은 그 날 이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래, 그날에… 아, 기억났다. 그 날 아침, 가영이 나에게 와서 엄청난 욕을 하고 갔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손목을 그었다고 했었나. 가위로 손목을 자르려고 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자살시도를 몇 번 한 뒤 자퇴했을 거다. 맞아… 학생부에 걸렸었나? 나 때문이라 생각했었던 걸까. 얼굴에 멍이 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좀 억울하네.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자기들이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의 정렬로 애정행각을 벌이다가 걸린 거 아냐. 난 그 뒤로 입을 다물었는데, 괜히 뺨 한대 얻어맞고 찔려서 이름도 개명하고. 한창 팬픽이반이 유행하던 때라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도 안 했었는데. 나는 오른쪽 뺨을 문지르며 궁시렁 댔다.
아차, 그 선배는 누구였지? 한참을 시부렁대던 나는 옆자리를 흘낏 바라보았다. 저 여잔가? 날카로운 눈매로 보아 저 여자 같기도 하고, 내 이름도 알고 있고. … 그 선배 이름이 뭐였더라. 김… 김… 김…
“태연… 선배?”
맞다, 김태연! 맞어, 맞어.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앞에 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을 보고 웃어보였다. 내 옆의 무서운 여자는 잠시간의 기쁨에 젖어있는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기쁨과 용기는 비례한다. 기쁠 수록 용기가 커진다고 했던가. 물론 플러스로, 실수로 생각을 발설해버린 기억도 지워주고 말이다. 기억나지 않았던 것을 막 기억해냈을 때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나를, 누군가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겠지?
“이 집 솜씨가 제일이라니까.”
멋들어지게 염색된 머리를 들여다보며 혼자 감탄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참을 울려도 아무도 나가보지 않는다.
“누가 좀 나가봐.”
여전히 초인종 소리는 허전한 집안을 울릴 뿐 멈추질 않는다.
“진짜, 다들 언제 나간거야?”
쉼 없이 울려대는 초인종에게 '예, 알았습니다.'라고 짜증을 부리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까 미용실에서 본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못 쳐다봤지만, 머리를 말고 있었나보다. 멋들어진 웨이브 헤어가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잠시 춤추는 웨이브에 정신이 팔렸던 나는 고개를 눈을 꿈뻑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누구냐고 물어야 할 까, 왜 왔느냐고 물어야 할 까. 이번 역시 입이 방정이다. 생각 할 틈도 주지 않고 내 입은 그녀에게 “태연선배죠?”라고 묻고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왼 손을 들어올렸다.
“틀렸는데.”
그녀의 왼 손목엔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 흰 색의 끔찍한 흉터가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 그녀의 백옥 같은 아름다운 손에는 커다란 제봉용 가위가 들려져 있었다.
“으아악!”
“뭐, 뭐야! 도둑이야! 불이야! 바퀴벌레야!”
예린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는 내 옆에서 함께 비명을 지르고 깨어났다. 그녀는 도토리를 가지고 도망치는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불을 꽉 잡고 사방을 두리번댔다.
“도둑은? 불은? 바퀴벌레는?”
땀에 젖은 이마를 짚고는 예린을 바라봤다.
“도둑도, 불도, 바퀴벌레도 없어. 아, 바퀴벌레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말에 예린은 한숨을 내쉬며 눕다가 벌떡 일어선다.
“바보야, 비명이란 것은 멋진 남자가 지켜보고 있을 때 연약해보이려고 지르는거야!”
“아니야, 바보야. 나보다 키도 작은 게 남자타령이야, 남자는.”
“야! 겨우 칠 센티 가지고 쪼잔하게 그럴래? 어쨌든 너 때문에 잠 다 깼잖아. 어쩔거야, 내 피부 나빠지면!”
잠시 시계를 봤다. 날이 어둡긴 해도, 벌써 7시 반이잖아.
“점마, 피부가 나빠지기는 개뿔. 이제 30분만 있으면 여덟시야. 일어나, 이 코알라 같은 자식아.”
“김예린, 정윤혜, 둘 다 닥쳐주면 안되겠니? 시끄러…”
어느 새 소영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너도 일어나. 오늘 수요일이다. 머리 하러 안가?”
“수요일이 뭐어. 시꺼, 잠 자.”
“수요일마다 SK회원들 30% 할인인거 잊었으면 됬구. 오늘은 내 카드 필요 없겠네~”
내 말에 거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인다. 저 여시. 애인도 없는 게 제 머리 만지기만 좋아해요.
“맞다! 잊어먹고 있었네. 윤혜, 너도 같이 하러 갈래?”
“나? 난 지난주에 말아놓은 이 머리 때문에 미칠 지경이야.”
“그러니 가야지. 시영선배 염색한거 못 봤냐? 진짜 예쁘더라. 방학 중에 웬일로 동아리 방에 나왔나 했더니, 제 머리 염색한거 자랑하려고 왔지 뭐니.”
너도 그렇잖아, 불여시야. 하지만 이 말은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아, 그 블루블랙? 근데 거의 파란색 같더라. 블랙은 어디 갔어?”
아직 한밤중인 유나를 빼 놓고 다들 킥킥대며 각자 선호하는 머리스타일을 말 하고 있는데, 문득 이 상황이 어디선가 일어났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게 데자뷰인가? 예린이 샤워하러 들어가고 소영과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다.
“소영아, 혹시 우리. 이런 적 있지 않았어?”
소영이 갸웃대며 후라이 하나를 집는다.
“어떤 거?”
“그냥, 시영선배 머리 얘기하고, 밥 먹고… 혹시 너, 중학생처럼 보이려고 머리 자르러 가려는거야?”
내 말에 박장대소 하는 그녀.
“야, 내가 이 머리 기르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자르겠어. 너 혹시 꿈꿨냐?”
나는 무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꿈이었나 보다.”
배를 잡고 끅끅거리던 소영이 총각김치를 자르려고 가위를 들었다. 그래, 꿈 일 뿐이야.
그냥, 지독한 악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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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억지, 뜯어봐도 억지 ...
그 참, 글 쓰는 재주가 저에게도 듬뿍듬뿍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작가분들처럼!(웃음)
실화니 어쩌고 해버렸는데, 생각해보니 1화에서는
미용실 가는 것 밖에 실화가 안 나왔네요-0 -;
2화에서야 비로소 고등학생때의 추억이 나왔다는 ..
벌써 노인성 치매인가봐요 (..)
또 일요일이 끝났습니다.
맘같아선 시계 돌려!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뭐..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요?
오늘은 좋은 밤 되시고, 내일 다시 아자아자!
첫댓글 잘 봤습니다. 이름을 굉장히 잘 지으시는 것 같으세요. 글은 계속 쓰다보면 점점 실력이 늘어간다고 하더라구요, 앞으로 점점 발전해 나가면 될거에요!
그런데 말이죠, 양파님의 소설을 운영자님이 대신 올려주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