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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룡과 춘향은 실존인물, 그리고 춘향전의 작가 - 연세대 설성경교수의 ‘춘향전의 비밀’과 kbs tv 역사스페셜을 중심으로 - 남원발전연구포럼 감사 서호련 년 전에 한국작가협회 김건중 회장께서 남원을 방문하여 하신말씀이다. “ 춘향전은 우리나라의 최고 고전소설임은 물론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문학작품입니다. 춘향전은 소설중의 소설로써 소설의 모든 요소를 완벽히 갖추고 있는, 모든 문학도들의 전범(典範)이 되는 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다섯 창 마당에서 나오는 한국어의 구수한 어투와 어휘, 사투리, 향토어 등을 번역, 표현하는 기법이 마련되지 아니하여 세계화 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춘향전은 소설인가 아니면 실제의 역사적 사실인가?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 인조시대 호남 암행어사 성이성. 순천에서 출두하였던 성이성은 이후 암행을 끝내고 남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눈보라가 심해 앞을 분별하기 힘든 날씨에도 불구하고 굳이 광한루로 나갔다. 그곳에서 성이성은 늙은 기생 여진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며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그의 일기는 적고 있다. 어사일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광한루 방문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흰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옇다. 나는 소년시절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이성 - 이몽룡 배경의 유사점 춘향은 조선시대 1596년 음력 4월 8일에 태어나 17세기에 사망한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며, 또 춘향의 연인 이도령 역시 본래 이름은 청백리 성이성( 溪書 成以性 1595-1664)으로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다. (소장의 갑 제 8-9호증) 실존인물 성이성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案義) 의 아들이고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같은 또래의 기생 춘향을 사귀었다.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남원을 떠나야 했다. 이는 이몽룡이 춘향과 헤어지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 남원부사의 송덕비가 남원 광한루에 세워져 있다. 남원 광한루 안에 있는 성안의 부사의 송덕비는 이몽룡 실존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며 그는 남원에서 가장 오랜 재임기간을 보낸 부사로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이도령으로 알려진 성이성이다. 다만 당시 유교 양반사회의 특성상 양반과 기생의 사랑 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춘향전에서는 성이성을 이도령이라는 인물로 이름을 바꾸어 등장시킨 것 같다. 즉 춘향전은 춘향과 성이성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사나 설화가 가미되어 집필된 당대 소설이다. (방자전 소장 갑 제 10호증- 영세대 설성경 교수의 저서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그리고 춘향전의 비밀 -서울대 출판부. 1999.12.4. KBS TV 역사스페셜 ‘이몽룡은 실존인물이었다.) *금준미주(金樽美酒) 시는 성이성이 어사출두 때 읊었던 시 였다.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成 涉 1718-1788))‘이 지은 '교와문고(僑窩文稿)’ 3권’은 그 동안 ‘필원산어’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춘향전에서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에서 지었다는 한시와 동일한 시가 발견된다. 성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과 다름이 없다. 특히 성이성이 여러 관리에게 보여준 한시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내보인 한시구절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금 술동이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 촛불의 촛물 떨어 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높도다.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성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습으로 음식을 청하니.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고 말하자 객이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 주었다. ‘금잔의 미주는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 높도다.’ 쓰기를 마치고 내 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기절초풍할 때 서리들이 암행어사출두를 외치며 달려 들어왔다. 관리들은 일시에 도주했고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사 성이성의 암행일지 과거에 합격한 성이성은 네 차례나 암행어사를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그가 친필로 쓴 <암행일지>원본과 인조실록의 아사파견 기록에 있는데 성이성의 이동경로는 이몽룡의 행적과 거의 같다. ‘춘향전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도, 조선중기 인조 때 어사 성의성이 암행을 다니면서 쓴 친필 ’암행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암행일지는 암행어사들이 자신의 행적을 적은 어사일지로서 성이성은 암행일지에 광한루에 들러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호남 암행록’에서는 그가 53세 되던 해인 정해년 11월 초 5일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같은 해 12월 1일 남원으로 가면서 광한루를 찾아가 늙은 기생 여진(女眞)과 늙은 서리 강경남이 성이성을 맞이하였으며 성이성은 이들 아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눈 내리는 광한루에 나와 앉아 소년시절을 회상한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 한 것이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雪色萬野 竹林階白 奶思少年事 深夜不能寢 설원만야 죽립계백 내사소년사 심야불능침) 1627년 성이성이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험의 답안지가 규장각 소장 문헌에 보관되어 있으며 성이성 이 조정으로부터 암행어사 직을 명받고 암행어사 출두 시 얼굴을 가리고 그 직분을 행했다는 얼굴가리개 사선(紗扇)이 그의 13대 후손 성기호 씨에 의해 현재 관리되고 있다. *성몽룡이 아닌 이몽룡으로-왜 성을 바꾸었을까?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닌 춘향이에게 붙여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이성의 내력에 대해서 공개를 거부하고 숨기기만 하던 성씨 문중이 최근에 들어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했다. 즉,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 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사연이다. 최근에 창녕 성씨 문중에서 춘향제를 창녕으로 옮겨 지내야 한다는 설을 제기하여 남원 일부 인사들이 성이성의 이몽룡 실존 인물 설을 반사적으로 부인하고 나섰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와 사료를 부인 할 수는 없다. 이미 춘향제는 82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성안의 남원부사와 성이성 암행어사의 일화는 모두 남원을 무대로 이루어 진 것이며 주인공 춘향과 월매는 남원 출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설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이 사실이었다면 춘향전과 춘향제는 오히려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새로운 전기와 지평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창녕과 남원이 자매 결연을 맺어도 좋을 것 같고, 83회 내년 춘향제 때는 성씨 문중을 정식 초청하여 암행어사 출두 장면 프로그램에 참여시켜도 좋을 것 같고 성씨 문중에서 보관중인 사료의 특별전시를 기획해 볼만 하다. 이와 함께 경남지사를 남원춘향제의 제전위원장으로 추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고는 항상 유연하여야 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를 들어 자주 발생하고 있는 춘향전의 폄하와 훼손문제는 물리력으로나 우격다짐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품위 있게 선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우리의 춘향전이 역사적인 실존인물, 실제사실에 근거를 둔 민족문학의 정수요, 춘향이와 이몽룡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춘향이의 고귀한 얼이 이 나라 각계각층에 더욱 확산 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춘향전이 국내에만 머물게 하지 말고 세계화 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미 79 년 전에 발레 춘향이 서구에서 절찬리에 공연을 했다지 않는가.
참고; 1. 성안의-조선 인조 때의 문신, 호는 부용당(부용당), 본관은 창녕, 1591(선조24년)식년문과에 급제, 벼슬은 사헌부 지평(지평)을 거쳐 남원부사, 광주 목사, 사후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었음. 아들 성이성을 13-16세 까지 사또 자제로 남원에 머물게 하였고 남원부사로 5년간이나 있으면서 쌓아온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가 광한루원에 세워졌다. 2. 성이성-봉화군 몰야면 가평리에서 출생. 현재 그가 세운 계서당-중요민속자료171호로 지정. 1627년 (인조 5년), 신년 시에 합격. 이 시대에 가장 요구되는 청백리이며 하얀 눈꽃처럼 고결한 선비의 상으로 알려져 있다.
3- 조경남 의병장 -춘향전의 작가로 추정
연세대 국문학과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의 비밀>에서 저자는 고정관념을 깨고, 춘향전의 원 작가를 실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산서 조경남을 <춘향전> 원작가로 제시했던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산서 조경남은 남원에서 70평생을 살았기에, <춘향전> 핵심공간인 남원과 광한루에 얽힌 사건과 상징적 의미에 정통하였다.
②산서는 임병양란 때의 국내외 역사를 57년간 잡록체 일기로 남길 정도로 엄청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③산서는 이도령 모델인 계서 성이성의 스승이며, 암행어사가 된 그를 광한루에서 만나 함께 보냈고, 이부사 모델인 부용당 성안 부사와도 교류하였다.
④산서는 남원 기생 춘향의 비극적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생긴 신원 설화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
⑤산서는 <춘향전>의 꽃인 <금준미주 시(金樽美酒 詩)>를 자신의 일기인 <속잡록> 속에 소개하였고,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되었다.
⑥<춘향전>의 구성이나 주제를 볼 때, <금준미주시>는 원작가의 창의력과 강력한 비판의식이 아니고는 표현하기 어렵다. 또 이 시는 <춘향전>의 역사적 전개에서 변하지 않은 대표적인 구절이다.
⑦산서는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상당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학제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진사에 급제했다. 그는 다수의 한시 문을 창작하였다.
⑧산서는 순국한 의병장 조헌의 수제자이며, 그 자신도 임병양란 때 적과 맞서 싸우며 왜병을 직접 격퇴한 무패의 의병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작품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 결과이다. 먼저 작품 내적 요소에서는 <춘향전>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금준미주 시>를 찾아 시의 원천을 추적하였고, 작품 외적 요소에서는 남원 고을을 거쳐 간 부사들 가운데 임기를 제대로 채운 부사를 검토하고, 나아가 남원 부사가 남원 고을에 재임할 당시 그 아들의 연령이 청소년 시기에 해당하며, 그 아들이 훗날 암행어사가 되어 다시 남원으로 내려온 인물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했다.
판소리계 소설은 모두가 작자 미상이라고 되어 있었으며, 지금까지 <춘향전>도 당연히 미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조경남 작가설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경남 작가설이 사실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춘향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전소설을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4. 춘향-춘향이의 성은 본디 무엇이었는지 정확치 않다. 성 춘향이라는 이름은 완전히 서양식(남편 성을 땀) 이름(?) 같기도 하다. 내 부인의 성은 권 씨이지만 서양식으로는 Mrs(미세스). 권이 아니라, 남편 성을 붙인 Mrs(미세스). 서 이기 때문이다. 단지 성이성 어사가 눈 오는 날 남원 광한루에 들려 늙은 기생 여진과 함께 소년시절을 회상하였는데 학계에 의하면 그 연인이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중에서도 관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인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과 절개를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춘향전은 현재 작가 미상으로 되어 있지만 역사적인 사료와 정황을 볼 때, 그리고 성씨 문중이 최근에 들어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볼 때, 어사 성이성이 이도령의 모델 이란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당시 유교 양반사회의 특성상 양반과 기생의 사랑 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 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성씨 대신 이씨로 바꾸어 성이성을 성도령 아닌 이 도령이라는 인물로 성을 바꾸어 등장시킨 것으로 추정 하는 것이다. 때문에 춘향전은 당시 성이성의 최 측근으로 그 옆에서 그들의 연정을 지켜보았던 조경남 의병장이 춘향과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썼고 그 뒤에 고사 설화와 각종 민중스토리가 가미되어 유능한 작가의 손에 의해 민중소설로 진화되어 후세로 전해 내려온 당대의 소설이라는 것이 지배적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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