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7. 롬 8:12-17 고난과 영광
지난 22일 화요일 석가탄신일 공휴일에 영등포 당산동에 위치한 나사렛 남서울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 교회 가족들도 오시고 인천노회에서 부노회장님을 비롯해 몇 분 목사님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예배가 장인어른 88세 미수 예배였습니다. 예배중에 4남매 자녀손이 특송도 했습니다. 예배 후에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는 시간을 가졌는데 오셨던 목사님들이 옆에서 나에게 참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 더러 그런 집안에 자녀가 되었으니 참 복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복되다고 하는가? 장인어른이 나에게 물질적으로나 교회를 남겨준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복되다고 하는가?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큰 이득을 남겼다는 자축행사도 아니었습니다. 오셔서 축하하시는 분들의 축하 내용을 들어보면 아버님이 그동안 사시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베풀며 살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학교에 장학금을 기증했다든지,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분은 물질의 이득과는 상관이 없는 활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베풀며 나누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해서 그렇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에 반응해서 사는 삶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해서 일생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았고 그렇게 나누는 삶을 살았던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하면 나는 혈육으로 말하자면 그 집안의 피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 나는 집안에서는 그런 기독교 예배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였고 기독교 예배가 좋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자랑스런 주인공되는 그 분의 자녀로서 특송도 하고 오시는 분들로부터 인사를 받았는가? 그 분의 딸과 결혼으로 인해 그 집안의 자녀로 편입된 것입니다. 친자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통해서 그리고 입양을 통해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말미암아 진노의 자녀요 멸망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진노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요 이방인입니다. 혈통적으로 하나님을 대대로 섬겨온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과 동일한 믿음을 우리가 가진 것입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 자녀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집안에 입양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한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게 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바울 사도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상속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 우리 많은 사람들은 물질과 관련하여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그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 약속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때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만났으므로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내려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온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모습인가? 그 임재는 빛입니다. 장차 우리가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빛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왜 빛으로 가득했는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항상 비추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임재 곧 영광을 장차 상속으로 받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다 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속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받게 될 영광을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황금 집과 황금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테러범들도 죽어서 갈 천국을 물질적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테러로 죽으면 예쁜 여자들과 많은 물질을 보상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죽음에 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임재를 물질적 보상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것은 소속감이요 용서 그리고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에게 소속된 빛의 아들들이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의 관계가 지속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자녀된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소속감,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가 받는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연대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영광의 상 면류관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영광의 상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이 땅에서 고난에 대한 상으로 누리고 있는 영광의 자녀들 빛의 자녀들과 하나로 연대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지금도 공유하고 있음에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근본주의자들은 바울이 고생하는 것에서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성공한 기독교인이 못된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공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행하는 기적은 충분하지 못한 기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상을 물질적 잣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반응으로서 사도 바울은 고난과 고생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 고생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소속된 자로서 겪는 고난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을 다하고 난 후 상속을 받지 못하는 자유가 없는 종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상속자로서 겪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자랑스런 것이라고 합니다.
올림픽 경기때에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태극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몇 달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도 만나지 못하는 자유없는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위하여 금메달을 위하여 훈련하고 고생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고생이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상 금면류관을 목에 걸기 위해 훈련하고 있다고 믿으면 고생이 고생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 최강 미국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자기 나라 백성 한명이라도 끝까지 보호하고 뼈까지도 다 찾아내는 일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시민된 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앞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미국을 위해 싸웁니다. 그들은 미국시민의 소속감 때문에 그렇게 충성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집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소속된 자녀의 소속감 때문에 배고픔과 때로는 실패자처럼 보이며 가난과 씨름하며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젊은 날을 몸바쳤습니다. 이 땅에서 겪는 고통이 사람들 보기에는 실패자같고 낙오자같이 보일지라도 그 고통이 헛된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고통은 해방을 기다리는 고통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은 허무한 것 안에서 한번 피는 풀과 같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소망중에 겪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소망을 가지고 억압과 죽음에서 해방될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빛의 영광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피조물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과 억압의 멍에를 벗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