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와의 대화
유기섭
미국의 시애틀 항을 떠난 배가 꼬박 하루 하고도 몇 시간 만에 알래스카의 주노 항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배에서 육지가 가까워지자 눈 덮인 험준한 산들이 머리를 내민다. 생태관광의 보고 주노는 부동항이다. 배에서 내려서 멘델 홀 빙하를 만나러 갔다. 빙하 녹은 물이 모여서 만들어진 호수. 빙하가 녹아서 물이 탁하다. 짧은 첫 만남을 뒤로하고 스캐그웨이에 도착하여 하이패스 기차여행으로 미국인의 개척정신을 체험해본다. 금광개발을 위하여 산 정상으로 통하는 난공사 끝에 선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일한 사람들의 불굴의 개척정신과 애환이 섞여 있는 곳이다.
다시 배는 밤새 달려서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글레이셔 베이에 접어들었다. 움직이는 호텔, 골든 프린세스 호가 십만 톤을 넘는 무거운 몸으로 비바람 속에서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윽고 바다를 호령하던 배의 위용이 빙하 앞에 멈춰 서자 배위의 사람들이 함성으로 그를 맞는다. 부슬비를 맞으며 갑판 위에서 그와 눈을 맞춘다. 몇 년 전에는 빙하 위를 걸어보았는데 오늘은 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행운을 맞았다.
배가 멈춰서고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마저리 빙하가 첫인사를 한다. 그는 언제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을까. 춥고 험한 세월을 이겨낸 흔적이 푸른 빛깔을 띠어 보이며 수만 년 쌓여진 역사의 편린들을 조금씩 떼어낸다. 보기에는 작은 얼음 조각 같은데 바다에 닿는 순간 너른 바다를 호령하는 소리에 큰 배도 움칫하며 흔들린다. 채 백 년이 되지 않는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이 수많은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빙하 앞에서 그 비밀의 장막을 걷어내어 보려고 애쓰고 있음이 부끄럽다. 그들도 처음에는 고운 눈의 형태로 지상에 내려왔다. 때 묻지 않고 순수한 모습으로 인간의 세상에 발을 내려놓았지만,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 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녹는 눈보다 쌓이는 눈의 양의 많아지고 그 무게에 눈은 단단한 얼음이 되었다. 수천수만 년의 단련된 몸이 오늘의 빙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따금 쫙쫙 갈라지며 바다로 떨어질 때는 우레와 같은 굉음으로 울부짖는다.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게 해달라는 애절한 외침으로 빙하 바다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처절한 절규는 언제쯤 멈출 것인가. 지금까지 온갖 아픔을 근근이 참아왔는데 날로 그 도를 더해가는 글레이셔 베이의 수난사. 수만 년 쌓아 올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 속에서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하루를 지새운다. 글레이셔 베이 깊숙이 뱃머리를 들이댄 우리의 배는 멈춰 서서 깊은 사념의 시간에 빠진다. 이제 더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나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들의 소망이 빗물로 변하여 바다를 적신다. 그들의 사지가 예고 없이 수시로 떨어져 나가는 아픔은 잠시 참을 수 있다고 하여도 기약 없이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사람들이야 언제든 이곳을 떠난다. 그리고 쉽게 이곳의 아픈 역사를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남아있는 그들의 세계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슬아슬한 하루의 생명을 이어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갈라지고 바다로 곤두박질하는 모습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못 볼 광경이라며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그들은 상처 난 모습만 담지 말고 그들의 아픔까지도 담아가 달라고 소망한다. 아마도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는 한 그들의 울부짖음은 더욱 크고 깊게 바다에 메아리치며 인간들에게 그 해결책을 요구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글레이셔 베이에는 백여 개가 넘는 빙하들이 있었지만, 최근에 이르러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수십 개만이 남아서 큰 바다를 지키고 있다. 빙하가 녹으면 인간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던 터라 그들의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오늘 그들의 아픈 현장을 보고 나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아픔과 고독을 뒤로하고 배가 천천히 움직여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린다. 유빙이 떠다니며 작별의 몸짓을 보낸다.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만년설이 간직한 역사를 더듬어 보겠다고 나섰지만, 수만 년의 아픔과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나온 빙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백설의 하얀 눈꽃 송이를 예상했던 기대와는 달리 온몸이 찢기고 비틀어져 만신창이 몸이다. 켜켜이 다른 세월의 층에다 어느 신들린 조각가가 거침없이 빚어 놓은 듯한 모습에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인간의 짧은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의 강을 지키고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어떤 아픔과 외로움도 기다림 속으로 녹여가는 그들의 세상살이 모습을 닮고 싶다.
지나고 나면 잊혀질 아픔의 현장에서 온난화를 더디게 할 수 있는 작지만, 실천 가능한 일은 무엇일까. 먼 훗날 다시 그들을 찾아오면 그간 생겨난 상처들을 매만져주리라.
-원주문학 제54호 게재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