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비평
창작문예수필은 방금 필자에 의하여 발견되어 이제 막 기초 원리 격의 이론서 한 권이 만들어졌을 뿐 하나의 건물로 서기 위한 대들보며 석가래 등 자재와 세부 설계도 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필자가 발견한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양상은 <산문 구성적 비유(광의적 의미. 은유. 상징 등)의 형상물의 창작>이라는 것이다.
문학(상상력)의 세계는 森羅萬象의 萬象의 수 만큼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상 하나 하나가 다 다른 형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학의 형식도 만상萬象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근접하여 비슷한 것들끼리가 군을 이루어 모이게 될 때 하나의 문학 장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우리 수필문학 1백년 사에서 창작문예수필 작품들을 발견하고 '심봤다'식의 소리를 외치게 된 까닭은 순전히 이 비슷한 양상의 작품군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산문 구성적 비유의 형상물'의 창작이라는 것이다. e-수필에 발표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품들 거의 다가 그 같은 동일양식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필자가 현재 하고 있는 창작 비평이라는 것은 그 같은 동일양식의 작품군 안에 들어 오는 작품들에서 발견한 현대문학 이론이 말하고 있는 창작개념에 관한 것이다.
그런 동일 양상의 작품군들 외에 유병근의 <몽타주,>와 같은 완전히 형식을 달리한 작품들이 종종 발견될 때가 있다. 남홍숙, 최이안 등이 발표하고 있는 전통적인 산문 형식의 틀을 깨트리고 나오는 형식의 작품들이 그 예이다. 이번 봄호에 발표되고 있는 최이안의 <나무를 낳는 왕>도 그 한 예이다.
그 같은 일련의 낯 선 양식의 작품들에 대한 이론적 비평은 처음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하였다. 시, 소설 문학의 경우라면 전례가 있을 것이므로 배워서 하면 될 터이지만 창작문예수필은 전례라는 것이 없는 신생 문학 장르다. 그러나 남홍숙 등이 창작해 내는 작품들에 대한 비평은 한인자의 <또>에서 얻은 '수필어' 창작의 가능성에서 실마리를 찾게 되어 일단 물고는 트게 되었다.
그러나 유병근의 <몽타주,>에 대해서는 필자에게는 아직 이 작품을 비평할 아무 비평 이론이 없다. 필자가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뿐이다.
1) 이 작품은 연작聯作 형태로 되어 있다.
2) 그러나 한 편 한 편은 聯作의 聯의 고리를 끊고 독립되어 있다.
3) 한 편 한 편의 연聯은 그대로 시(창작) 작품이다.
4) 그러나 전통적 기법의 시작품은 아니다.
5) 분명한 산문형식의 시 작품이다.
6) 그러므로 이 작품도 필자가 말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이론적 해석인 '산문의 시'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가 말 할 수 있는 이론은 6)번까지 뿐이다. 연작 형태로 되어 있으면서 각 연이 연결고리가 끊어진 독립된 작품이 되고 있는 이 같은 형식의 창작수필 작품을 이론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필자는 아직 아는 바가 없다. 좀 더 연구에 쫓겨야 할 대목이다.
분명한 사실은 놀랍다는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실로 삼라만상의 만상萬象만큼 다양한 양식을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현실이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작가 자신에게 자평을 부탁하였다. 감사하게도 선뜻 원고를 보내 오셨다. 아래에 전재한다.(이관희)
*허튼소리에 관한 변명
수필가는 세계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오감을 갖는다. 어제 본 세계는 오늘 다른 세계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은 어제의 것이 아닌 오늘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의 시공은 이미 동일한 것에서 벗어난다. 하기에 수필가에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삶은 없다.
새롭다는 말은 그것을 지각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무지개현상이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 있어도 지각하지 못하면 세계는 언제나 그것이 그것인 고리타분한 수렁이다. 수렁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새로운 수필을 하는 길이 된다. 지각하지 않고 공짜로 오는 대박은 어디에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안다는 말은 수필가에게 끈질긴 힘이 된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는 세계를 보는 눈이 새로워야 한다. 세계와의 충돌은 이 점 하나의 갈등이 된다. 가령 꽃을 보는 수필가의 눈은 꽃 속의 꽃을 본다. 밖으로 나와 있는 꽃의 형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꽃을 찾는 투시력에서 새로운 꽃이 보인다. 흔히 말하는 외면묘사니 내면묘사란 말이 이에 도움이 된다.
꽃은 지금 피어 있는 상태 그대로의 꽃이 아니다. 꽃잎 하나, 꽃술 하나하나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수많은 손발이 꽃의 커튼 너머에서 이리 분주하고 저리 분주했을 것이다. 그런 노력 끝에 비로소 꽃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깥세상의 기온과 풍력, 풍향에 귀 기울인다. 폭우라도 쏟아지면 어쩌나 하고 마음 조릴 것이다.
한 장면의 드라마를 찍기 위해서 연기자는 물론 그 밖의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이 드라마 뒤에 깔린다.
일인칭 문학인 수필은 이 모든 것을 수필가 혼자 통섭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그 힘든 노력을 위안하느라고 가슴이 따뜻한 문학이니 담담한 문학이니 품격의 문학이니 하는 찬사가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언사에 혹하지 말아야겠다. 수필은 세계에 상처를 내서라도 세계의 속사정을 깊이 파헤치고 세계를 새롭게 나타내려는 문학임을 인식해야겠다. 겉만 번드레하고 속이 텅 빈 포장에 속을 수 없다.
수필은 병 주고 약 주는 문학임을 알아야겠다. 꿰뚫은 세계의 상처에 혓바닥을 대고 그 세계의 아픔을 핥아보고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손이 수필이다. 음풍농월은 이미 지난 시절의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와 더불어 지나갔다.
수필의 약 처방은 상상력이 그 주류를 차지한다. 문학에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원인은 상상력을 픽션과 흡사한 개념으로 보는 데서 이미 시작되었다. 생각과 느낌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쓰다듬느냐의 길이며 그 결과물이다.
상상이란 세계를 새롭게 보고 느끼고자 하는 번득이는 이미지를 낳는 둥지다. 그 힘이 상상력이다. 재생적 상상을 창조적 상상으로 몰고 가는 수레다. 함으로 상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능력을 갖는다.
고요 속에는 고요만이 아닌 뜨거운 싸움이 불붙고 있음을 고요가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는 감각을 수필가는 당연히 갖는다. 정적의 소리가 들린다고 할 적에 수필가는 이미 고요의 세계 속에서 고요를 느끼고 어루만지고 있는 셈이다.(유병근)